북한 의사가 어린아이의 입을 벌리고 검진하고 있다. ⓒphoto UNICEF
북한 의사가 어린아이의 입을 벌리고 검진하고 있다. ⓒphoto UNICEF

영화 ‘강철비’에는 쿠데타를 피해 ‘북한 1호’와 함께 얼떨결에 한국으로 넘어온 개성공단 노동자들이 햇반과 인스턴트 음식을 먹으며 “이밥, 이밥!”이라고 환호하는 장면이 나온다. 탈북자들은 대부분 이구동성으로 이런 장면은 ‘실제 상황’이라고 말한다. 북한 주민들은 대부분 ‘이밥(쌀밥)’을 제대로 먹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김일성은 1962년 10월 22일 3기 1차 최고인민회의에서 “1964년에는 모두가 기와집에서 이밥에 고깃국을 먹으며 비단옷을 입고 사는 부유한 생활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하지만 김일성의 약속은 지금까지 실현된 적이 없다. 김일성은 1992년 1월 1일 신년사를 통해서 “모든 사람이 다 같이 이밥에 고깃국을 먹으며 비단옷을 입고 기와집에서 살려는 염원을 실현하는 것은 우리가 달성하여야 할 중요한 목표”라며 또다시 ‘이밥 타령’을 되풀이했다. 할아버지 김일성을 흉내 내고 있는 김정은은 2012년 4월 15일 김일성 탄생 100주년 열병식 때 첫 공개연설을 하면서 “인민들이 다시는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고 사회주의 부귀영화를 누리게 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오히려 배급제까지 철폐해버렸다.

식량배급량 다시 하루 표준에도 못 미쳐

북한이 최근 자연재해와 유엔의 대북제재 때문에 식량부족이 초래됐다며 유엔 산하 국제기구들에 식량지원을 요청했다. 유엔 주재 북한대표부의 김성 대사는 2월 20일 유엔 산하 국제기구에 보낸 문서에서 지난해 북한의 전체 식량생산량은 495만1000t으로, 2017년에 비해 50만3000t이 줄어들었다면서 1인당 식량 배급량이 하루 표준 550g에 크게 못 미치는 310g에 그칠 것이라고 밝혔다. 김 대사는 식량생산 감소는 이상고온, 가뭄, 폭우 등 자연재해와 유엔의 대북제재 때문이라고 밝혔다. 특히 김 대사는 대북제재로 씨 뿌리는 기계, 수확용 기계, 화학비료, 살충제 등이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이유로 반입이 금지됐으며 정제유 수입이 제한되면서 농업 분야에 필요한 연료공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김 대사는 국제기구들의 대북지원 사업도 제재 때문에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대북제재는 비인간적이라고 비난했다. 이에 대해 미국 민간 싱크탱크인 카네기국제평화재단의 제임스 쇼프 선임연구원은 북한의 식량부족 현상은 북한 정권이 식량생산성 향상보다 핵과 미사일 등 군수사업에 자원을 우선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윌리엄 뉴컴 전 미국 재무부 선임 자문관도 북한 정권이 사치품보다 식량과 비료를 수입하고, 탱크나 장갑차 대신 농업장비들을 생산하고, 농민들이 토지를 소유하게 하고 생산물을 시장에 팔 수 있도록 했다면 식량부족 문제는 상당부분 해결됐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북한의 만성적인 식량부족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유엔 산하 식량농업기구(FAO)는 ‘2019 북한의 인도주의 필요와 우선순위’라는 제목의 보고서(2월 11일자)에서 북한 전체 인구의 43%인 1090만명이 만성적인 식량 불안정과 영양결핍에 고통받고 있다고 밝혔다. 특히 보고서는 지난 6년간 반복되는 가뭄과 홍수 등 자연재해로 식량과 영양결핍, 위생과 식수부족으로 북한 주민들의 인도주의적 상황이 악화돼 있다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6~23개월 된 북한 영유아 3명 중 1명이 최소한의 끼니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으며, 23개월 이상 된 북한 영유아 5명 중 1명이 만성적인 영양실조를 겪고 있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또 북한의 식량생산량이 매년 100만t 정도의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북한 의사가 입원한 환자들에게 질병 감염 예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photo UNICEF
북한 의사가 입원한 환자들에게 질병 감염 예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photo UNICEF

북한 모성사망률 한국의 8배

북한 주민들은 식량부족 때문에 기아와 영양부족 등의 인도주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유엔인구기금(UNFPA)에 따르면 북한의 모성사망률은 2017년 기준 신생아 10만명당 82명으로 한국의 11명보다 8배 높다. 이는 2008년 10만명당 77.2명에서 더욱 높아진 수치다. 모성사망률이란 임신 중이나 출산 직후 임신과 관련된 병으로 사망하는 여성의 비율을 뜻한다. 세계보건기구(WHO)는 북한의 모성사망률이 높은 이유는 식량부족으로 임산부의 영양상태가 나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북한의 5세 미만 영유아의 사망률도 높다. WHO에 따르면 북한의 영유아 사망률은 1000명당 24명으로 한국(3명)에 비해 8배에 달했다. 북한의 영양결핍 인구 비율은 40.8%로 매우 높고 이 중에서 5세 미만 발육부진 영유아는 27.9%나 된다.

국제사회는 그동안 북한의 이 같은 인도주의 위기를 안타깝게 생각해 상당한 지원을 해왔다. 특히 인도주의 지원단체와 기구들은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면서 유엔의 제재조치에도 불구하고 북한에 각종 지원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실제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산하 대북제재위원회는 올 들어 WHO와 아일랜드의 국제구호조직 컨선 월드와이드(Concern Worldwide), 독일의 세계기아원조(Welthungerhilfe), 유엔아동기금(UNICEF), 조선의 그리스도인 벗들(CFK), 유진벨재단, 퍼스트스텝스, 스위스 외무부 인도주의지원국(SHA), 월드비전, 국제적십자사연맹(IFRC), 핸디캡인터내셔널, 프리미어어전스(PUI) 등의 대북 인도주의 지원 사업을 위한 물자 반입을 허가했다.

그런데 문제는 북한 정권은 지금까지 자구노력을 전혀 하지 않은 채 인도주의 위기를 국제사회의 지원에 의존해 해결해왔다는 것이다. 심지어 북한 정권은 국제사회가 지원한 구호물품마저 빼돌려 사치품 수입이나 핵무기 개발 등에 사용해왔다. 국제인권 전문가들은 북한에 대한 인도주의 지원은 1995년 고난의행군 때부터 시작돼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면서 매년 국제사회가 상당한 규모의 지원을 하는데도 북한 취약계층의 위기가 계속된다는 것은 북한 정권의 잘못된 정책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벤자민 실버스타인 미국 스팀슨센터 객원연구원은 “북한 정권은 취약계층에 식량 등을 지원할 예산이 있지만 대도시 개발이나 스키장 건설 등에 먼저 돈을 쓰고 있다”면서 “취약계층 지원은 북한 정권의 우선순위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실버스타인 연구원은 “매년 유엔 지원을 받아가는 북한 정권이 지원 규모의 여섯 배에 달하는 사치품을 수입하고 있다”면서 “북한 정권은 이제 스스로 취약계층을 돌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 국무부도 북한 주민들이 겪어온 오랜 인도주의 위기는 오로지 북한 정권이 자초한 것이라면서 북한 정권이 핵무기 프로그램에 들어가는 자금과 재원을 주민용으로 돌린다면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이 대북지원 비용으로 요청한 1억1100만달러를 완전히 충당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존 에버라드 전 북한 주재 영국대사도 “국제사회의 지원이 북한 주민들에게 전달되기도 하지만 북한 정권이 이를 전용하는 사례도 많다”면서 “인도주의 지원이 오히려 북한 정권과 핵심 계층의 잇속만 채울 뿐”이라고 지적했다. 심지어 북한 정권은 국제사회의 인도주의 지원을 김씨 일가의 위대성을 선전하는 수단으로 악용한다.

핵 개발 대신 취약계층 스스로 돌봐야

북한에는 김정은과 그 가족만을 위한 초호화 특급병원인 봉화진료소와 중앙당 고위간부들의 진료를 전문으로 하는 남산진료소, 인민군 장성급 장교들만 따로 치료하는 어은병원 등이 있는데, 이들 병원은 최신식 의료설비와 외국에서 수입한 고가 약품들을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북한 주민들은 낙후한 병원에도 제대로 갈 수 없는 데다 수술 등 치료를 받으려면 장마당에서 약품을 사서 써야 하는 형편이다. 국제사회는 북한에 많은 의약품을 보냈지만 간부용 병원에만 공급되었을 뿐 주민들에겐 전혀 혜택조차 가지 않고 있다.

때문에 앞으로 북한에 대한 인도주의 지원을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법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국제사회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국제인권 전문가들은 북한에 대한 인도주의 지원은 투명성과 분배 감시 등 조건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면서 북한 정권에 대해서도 자구책을 마련하도록 압박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에버라드 전 대사는 “전용을 막기 위해 모든 가능한 조치를 취하고 적극적인 감시 조치가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다. 실버스타인 연구원은 “북한 주민들에 대한 1차적인 책임은 북한 정권에 있으며 북한 정권은 최소한 주민들이 가난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있는 조치에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윌리엄 브라운 미국 조지타운대 교수는 “국제사회가 북한 주민들을 돕고 싶다면 북한의 경제 시스템에 개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로버타 코헨 전 미국 국무부 인권담당 부차관보도 “북한의 가장 취약한 계층에 지원이 돌아가도록 보장하는 시스템이 먼저 마련돼야 한다”고 밝혔다. 코헨 전 부차관보는 “특히 미국 정부가 북한의 정치범수용소 등 수감시설에 대한 접근을 요구해야 한다”면서 “인도주의 단체들이 북한에서 직면하는 접근의 제한과 이동의 제한 등도 해결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미국 의회도 트럼프 정부가 비핵화에 대한 상응조치로 북한에 대한 인도주의 지원을 확대하더라도 이런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밥 메넨데즈 상원 외교위 민주당 간사는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이 필요하다”면서도 “김정은의 방해를 받지 않고 지원물품이 제대로 전달될 수 있는지 분명히 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남북 경제협력도 철저한 ‘상호주의’로 추진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특히 동·서독처럼 프라이카우프(Freikauf·자유를 위한 거래) 방식을 남북 경협에도 적용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프라이카우프는 ‘자유를 산다’는 의미의 독일어로, 동독 공산정권에서 정치적 이유로 구금된 반체제 인사 등 정치범들을 서독으로 이주시키기 위하여 서독 정부가 거액의 몸값을 지불하고 석방시킨 것을 말한다. 프라이카우프는 1963년부터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1989년까지 26년간 진행됐다. 서독은 3만3755명의 정치범과 25만명에 달하는 그들의 가족에 대한 송환 대가로 동독에 34억6400만마르크를 지불했다. 당시 환율로 4조원이 넘는 돈이다. 프라이카우프는 당시 서독 내독관계부가 주관했다. 서독 정부의 이런 정책으로 동독 주민들의 인권이 향상되고 고통을 덜어준 계기가 됐다.

북한 주민들이 장마당에서 물건을 팔고 있는 모습. ⓒphoto NK Economy Watch
북한 주민들이 장마당에서 물건을 팔고 있는 모습. ⓒphoto NK Economy Watch

재정 지원 대신 인도적 조치 받아내야

역대 서독 정부는 동독 공산정권과의 협상에서 △동·서독 주민 간의 이주, 왕래 및 가족 재상봉의 확대 △국경 탈출자에 대한 사살명령 중지 및 탈출기도자에 대한 도주죄 형량(5~8년 징역)의 경감 △정치범 구금, 반체제 인물에 대한 박해 및 서독 이주 강요, 서독 이주자에 대한 동독 방문 제한 등의 해제 △동·서독 주민 간의 통신 및 정보교환의 자유 확대 등을 달성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헬무트 콜 전 서독 총리는 동독과의 협상에서 철저하게 ‘상호주의’ 원칙을 고수했다. 콜 전 총리는 동독에 대한 대규모 재정 지원을 해주는 대신 이에 상응하는 동독의 인도적인 조치를 받아냈다. 실제로 서독 정부는 1983년과 1984년 동독 공산정권이 서방 은행에서 10억마르크와 9억5000만마르크를 빌리는 데 보증을 서주는 대신 동독 공산정권으로부터 상당한 대가를 얻어냈다. 그 내용을 보면 동·서독 주민의 자유 왕래, 동독 탈출 주민에 대한 자동사격장치 5만4000개 제거, 서독 주민의 동독 방문 기간 확대, 서독 서적과 레코드의 동독 유입 확대 등이다.

통일부에 따르면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당시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등을 통해 북한에 들어간 현금과 현물은 모두 68억달러나 됐다. 김대중 정부의 경우 현금 17억455만달러와 현물 7억6610만달러, 노무현 정부의 경우 현금 22억938만달러와 현물 21억4694만달러이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는 이에 대한 대가로 이산가족 상봉 정도밖에 얻어낸 것이 없었다. 일각에서 일종의 ‘평화비용’이라고 주장했지만 북한 정권은 핵과 미사일 발사 실험을 실시하고 각종 도발을 일삼았다. 문재인 정부도 북한과 경협을 추진할 경우 자칫하면 일방적인 ‘퍼주기’가 될 수 있다. 문재인 정부는 남북 철도·도로 연결 및 현대화,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재개 등 3대 경협사업을 적극 추진할 방침이다. 물론 북한 정권이 노동력과 토지 등을 제외하고 투자하는 자금은 하나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문재인 정부는 삼림조성 사업, 타미플루 등 의약품과 의료장비 및 영유아용 영양제 등도 북한에 무상으로 지원할 계획이다. 북한 정권은 한국 정부의 이런 경협이나 지원을 당연시하면서 일종의 조공(朝貢)으로 여기고 있는 것 같다.

문재인 정부가 북한으로부터 아무런 대가를 받아내지 못하고 일방적인 경협과 지원을 추진한다면 결국 김정은 정권의 체제 유지에 도움만 주는 셈이 된다. 때문에 문재인 정부도 서독 정부처럼 ‘한국판 프라이카우프(K-Freikauf)’를 추진할 필요가 있다. K-프라이카우프를 추진할 경우 무엇보다 이산가족 상봉 상설화, 국군포로와 납북자 개인 및 가족들의 송환을 우선적으로 실시해야 한다. 특히 문재인 정부는 북한 정권에 정치범수용소의 해체 등 인권문제를 개선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는 지금까지 북한 정권과 대화하면서 인권문제를 한 번도 제기한 적이 없다. 국제인권단체인 휴먼라이츠워치의 필 로버트슨 아시아담당 부국장은 “문재인 대통령과 한국 정부는 북한 인권문제에 손을 뗀 것 같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워싱턴포스트(WP)도 문재인 정부가 남북 대화와 경제협력에만 매달리느라 북한 주민들의 인권에 눈감고 있다고 지적했다. 아무튼 북한이 김정은의 말대로 ‘정상국가(normal state)’가 되는 길은 정치범수용소 해제 등 주민들의 인권을 개선하는 것이 가장 실효성 있는 방법일 것이다.

키워드

#북한
이장훈 국제문제애널리스트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