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3만권이 천장까지 꽂혀 있는 ‘책숲시간의숲’에서 이대건 촌장이 해리포터 흉내를 내고 있다.
책 3만권이 천장까지 꽂혀 있는 ‘책숲시간의숲’에서 이대건 촌장이 해리포터 흉내를 내고 있다.

논일 밭일로 굳은 손가락 마디에 연필을 쥔다. 비뚤배뚤 글씨가 춤을 춘다. 호미질은 프로지만 연필 쥐는 근육은 다른 모양이다. 전북 고창군 해리면 월봉마을. 독실댁, 나주댁, 백양댁, 화룡댁…. 꽃다운 나이에 신랑 얼굴도 제대로 못 보고 시집와 월봉마을을 지키면서 여든을 넘거나 바라보고 있다. 책상 앞에 앉아본 적 없던 아짐(아주머니)들이 고단한 몸을 끌고 목요일 밤이면 마을 폐교로 모여든다.

‘오늘 띠풀이 파느라고 디질 번해다 파모 하니라고 디지는 중 알았는디 다행 디지진 않았다 나는 일하는디 경화가 와서 이야기 동무 햐줘서 힘든지 모르고 했다 경화는 뒷짐 지고 섯더라 그래도 고맙다’

굵고 거친 손으로 일기와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렸다. 맞춤법도 틀리고 서툰 솜씨지만 ‘쓰잘데없던 일상’이 화사한 꽃그림으로 피어나고 생생한 글로 되살아났다. 웃고 울고 수다 떨며 풀어낸 기억들은 몇 권의 책으로 엮였다. 김선순, 나부덕, 서점수, 오삼순…. 책을 통해 잊고 살던 이름도 찾았다. 내 인생의 주인이 되고 내 삶이 기록이 되는 경험은 놀라웠다. 이제 월봉마을 아짐들은 모두 시인이고 작가다.

바닷가 마을 오래된 폐교에 오면 해리포터 시리즈에 나오는 호그와트 마법학교처럼 작가가 되는 마법을 경험할 수 있다. 마법의 학교를 만든 사람은 고창의 해리포터로 통하는 이대건(49)씨다. 도축장이 될 뻔한 폐교를 2006년 인수해 누구나 책을 만들 수 있는 ‘책마을해리’로 변신시켰다. 이곳에서 이씨는 촌장으로 통한다.

‘책마을해리’의 슬로건은 ‘누구나 책, 누구나 도서관’이다. 폐교 곳곳에는 기증받은 책 17만권이 책의 숲을 이루고 있다. 이곳에서 이뤄지는 일은 전부 ‘읽고, 하고, 쓰고, 펴내기’의 과정이다. 책을 읽고, 책의 내용을 따라서 해보고, 한 일을 써서, 책으로 펴내는 것이다. ‘책마을해리’에서는 이를 위한 다양한 마을학교가 열린다. 시인학교, 만화학교, 그림책학교, 서평학교, 생태학교, 독서캠프, 진로캠프, 매주 토요일 고창지역 초·중·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책학교’, 목공작업을 직접 해보는 건축학교, 보름달 뜨는 밤 책과 관련된 영화를 상영하는 ‘책영화학교’ 등이 끊임없이 진행된다. 월봉마을 아짐들을 위한 마을학교 이름은 ‘밭 매다 딴짓거리’이다. ‘책학교’ ‘밭 매다 딴짓거리’처럼 매주 이어지는 프로그램도 있고 당일 혹은 2~3일 캠프도 있다. 모든 프로그램은 시작할 때 책 계약서부터 쓰고 시작한다. 그만큼 진지해진다. 학교, 지자체 등과 연계, 책을 통한 다양한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계간으로 마을신문도 펴내고 있다.

마을학교를 통해 지금까지 출판된 책은 90여권, 결과 보고서 형식까지 합하면 120여종이다. 경주지진을 주제로 고등학생 12명이 함께 쓴 ‘흔들리며 흔들리지 않고’는 2017년 우수 출판 콘텐츠인 ‘세종도서’로도 선정됐다. 책마을해리는 세 개의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다. 인문학 서적을 내는 ‘도서출판 기역’, 어린이·청소년 전문 ‘나무늘보’, 그림책 전문 ‘책마을해리’이다.

책이 외면당하는 시대에, 책으로 마을공동체를 살려보겠다고 겁 없이 나선 것도 놀랍지만, 그 무모한 도전이 사람을 불러들이고 마을을 바꾸면서 성공 이상의 성공을 거둔 것은 더 놀랍다.

현재 ‘책마을해리’에는 마을학교 참가자뿐만 아니라 지자체, 도서관, 도시재생 관계자 등 ‘마법의 학교’를 벤치마킹하려는 견학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주말이면 전국 각지에서 버스를 대절한 단체가 몰려든다. 머잖아 전국 곳곳에 또 다른 책마을들이 들어설 것으로 보인다. “책을 매개로 마을 사업을 시작한 소식이 많이 들려오고 있다”는 것이 이 촌장의 말이다. 오는 5월에는 ‘2019 고창 한국지역도서전’이 책마을해리 일원에서 개최된다. 제주·수원에 이어 세 번째로 열리는 전국행사다. 지역 출판인들의 대규모 축제를 고창군이 유치한 것은 ‘책마을해리’가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꿈이 일으킨 마법이다.

책을 다 읽기 전에는 나올 수 없다는 ‘책감옥’.  박정섭 그림작가가 놀러와서 감옥 벽에 그림을 그려놓고 갔다.
책을 다 읽기 전에는 나올 수 없다는 ‘책감옥’. 박정섭 그림작가가 놀러와서 감옥 벽에 그림을 그려놓고 갔다.

세계의 체인지메이커 ‘아쇼카 펠로 2018’ 선정

이대건 촌장에게도 마법 같은 일이 생겼다. 오는 4월 4일 발표되는 우리나라 12번째 아쇼카 펠로로 선정됐다. 세계 사회적 기업가들의 구루인 빌 드레이튼이 설립한 아쇼카는 새로운 아이디어로 세계 곳곳에서 의미 있는 변화를 이끌어낸 체인지메이커들을 ‘아쇼카 펠로’로 선정해 그들의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2013년부터 한국의 펠로를 발굴해온 아쇼카한국(이혜영 대표)은 올해 이대건 촌장과 아동청소년 성착취 피해자를 돕는 십대여성인권센터 조진경씨를 선정했다. 아쇼카 펠로 선정 과정은 철저하고 까다롭다. 이 촌장도 4년 넘는 검증 기간을 거쳤다. 이혜영 대표는 선정 이유에 대해 “보통 지역재생이라고 하면 관광, 일자리 창출 등 경제적 차원의 개발에 그쳤다. 그 과정에서 지역민은 소외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책을 통해 지역공동화 문제를 해결한 것은 처음이다. 지역주민들이 문화의 생산자가 되도록 하는 접근 방식도 놀라웠다”고 말했다.

이대건 촌장이 아쇼카 펠로로 선정됐다는 소식을 듣고 ‘책마을해리’를 찾았다. 이 촌장은 영화 ‘해리포터’의 주인공과 진짜 닮았다. ‘책마을해리’는 지명을 딴 이름이지만 그의 외모 덕분에 ‘해리포터’를 상상하게 한다. 동그란 안경을 맞춰 쓰고 책마을해리 서포터스들의 이름을 ‘해리포터즈’로 명명하는 등 의도적인 노력도 숨어 있다. “책을 만들고 저자로 다시 태어나는 것은 마법 같은 일”이라는 생각에서다. “우리나라에서 발간되는 모든 책은 국립중앙도서관 수장고로 들어갑니다. 죽으면 한 사람의 삶이 사라지지만, 기억이 책 속으로 들어가 기록이 되면 공적인 아카이브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여기서 만들어진 아이들의 생각이, 마을 어르신들의 생각이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것이죠. 그것이 책마을의 완성입니다. 누구나 책의 씨앗을 가지고 있습니다.”

책마을해리 시즌2가 시작된다

고창은 그의 고향이다. 그가 사들인 폐교는 천석지기였던 증조부가 마을을 위해 만든 학교이다. 1936년 광승 간이학교로 문을 열어 1970년대 나성초등학교가 됐다. 한때 학생수가 800~900명에 달해 2부제 수업을 해야 할 정도였다. 폐교는 성산마을과 월봉마을 사이에 있다. 두 마을 합쳐 30여가구가 전부다. 70~80대가 대부분이고 60대 이장이 가장 젊다. 인근 마을에서 아이들 구경하기는 힘들다. 2001년 문을 닫은 폐교를 군에서 처분하면서 후손에게 우선권을 줬다.

그는 대학 진학하면서 서울로 올라가 졸업도 하기 전 출판사에 들어갔다. 20년 가까이 책을 만들며 잘나가는 기획자, 편집자로 살았다. 폐교를 사기 전부터 그의 마음에는 ‘책마을’ 구상이 있었다.

“2000년대 들어 전자책 광풍이 불었습니다. 출판사들이 전자책만 만들면 떼돈을 번다는 환상에 빠졌던 때입니다. 이러다 종이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책을 만지고 읽는 감각적인 경험 소비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고민을 하다 생각을 뒤집어 책 소비자를 생산자로 만들면 되겠다 생각했죠. 과거 마을 사람들이 품앗이하며 농사짓듯 책을 공동으로 생산하는 마을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폐교 매입 후 5~6년은 아내, 두 딸과 함께 주말농장처럼 다니다 2012년 아예 폐교에 내려왔다. 텃밭 가꾸고 상추 뜯으며 잠시 다녀갈 땐 몰랐지만 현실은 혹독했다. 10년 넘게 방치된 폐교의 상태는 심각했다.

“처음 시작할 때 출판계 친구 10여명이 응원차 서울서 내려왔는데 다들 아무 말도 안 하는 겁니다. 밥만 먹고 돌아갔던 친구들이 최근에 와서야 눈물 흘리며 놀라워했습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면서 얼마 못 가 포기할 줄 알았다고.” 그는 꿈에 부풀어 있었지만 친구들 눈에는 꿈에도 안 보고 싶은 곳이었다. 곳곳이 비가 새고 전기는 안 들어오고 유리창은 성한 곳이 없었다. 지금의 책마을해리가 되기까지의 고생은 책으로 내자면 대하소설 분량일 것이다.

책마을해리의 공간은 현재도 진화 중이다. 5만권의 책이 들어가는 ‘버들눈도서관’이 최근 공사를 끝냈다. 폐교의 뼈대는 최대한 살렸다. 중앙 교사 벽에는 ‘승공 없이 통일 없고 방첩 없이 평화 없다’는 빛바랜 반공구호가 남아 있고 기린, 사자 동상이 여전히 건물을 지키고 있다. 건물 안에는 눈 돌리는 곳마다 책이 쌓여 있다. MBC가 여의도에서 상암동으로 사옥이전을 하면서 기증한 책 3만권도 포함돼 있다. 책 더미 속에서 오래전 읽었던 책을 발견하는 뜻밖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교실 2개를 합쳐 만든 ‘책숲시간의숲’에는 3만여권의 책이 천장까지 빼곡히 꽂혀 있다. ‘누리책공방’에서는 누군가 그림을 그리고 책을 기획한다. 한지의 고장인 고창의 전통을 잇기 위해 만든 한지활자공방, 만화방, 건축학교가 열리는 목공방도 있다. 책마을갤러리에서는 마을학교 학생들의 그림 전시와 작가들의 특별전시가 이어진다. 건물 사이 큰 나무 아래 바람언덕에서는 작은 공연이 수시로 열린다. 특히 보름달 뜨는 금요일 밤이면 마을축제가 벌어진다. 가장 인기 있는 공간은 스스로 갇히는 ‘책감옥’이다. 읽고 싶은 책을 가지고 들어가 다 읽기 전에는 나올 수 없다. 밖에서 문을 걸어 잠그게 돼 있고 문 아래쪽에 사식 넣는 구멍까지 있다. 숙박용 스테이 건물이 몇 동 있다. 그중에는 작가들에게 제공하는 레지던시도 있다. 뒷건물 사무동 2층 한쪽이 살림집이다.

운동장 끝, ‘꿀밤나무’라고 불리는 다섯 그루의 아름드리 플라타너스가 여름이면 큰 그늘이 돼준다. 그중 한 그루에 건축학교 학생들이 참여해 ‘톰소여의 모험’에 나오는 아지트처럼 ‘트리하우스’를 만들었다. 아이들보다 정작 어른들이 더 좋아하는 곳이다. 다섯 그루에 모두 트리하우스를 짓고 연결해서 민박시설로 활용하는 것도 구상하고 있다고 그가 말했다.

지금까지는 시즌1이었다. ‘책마을해리’ 시즌2는 더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펼쳐질 것으로 기대된다. 5월 지역도서전이 그 출발점이다. ‘책마을’의 마법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는 ‘책마을해리’의 모든 영업비밀을 아낌없이 전수할 준비가 돼있다고 했다. 지자체들과 연계해 책마을 콘셉트를 공교육에 접목하는 작업도 계속 업그레이드시켜나갈 계획이다. 그 효과는 충분히 확인했다. “선생님을 바꾸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책을 내게 하는 것입니다. 책을 만들고 하나의 세계가 새로 만들어지는 경험을 하면 확 달라집니다. 선생님이 바뀌면 학교가 바뀌고 아이들이 바뀝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좋아하는 ‘트리하우스’에서 이대건·이영남 부부가 창밖을 보고 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좋아하는 ‘트리하우스’에서 이대건·이영남 부부가 창밖을 보고 있다.

책을 콘셉트로 한 대안학교 만든다

고창군 관내 학교와 함께 ‘교과서 만드는 학교’도 운영할 계획이다. 첫 도전은 사회책이다. 지역을 샅샅이 취재하고 그 내용을 바탕으로 ‘우리들만의 교과서’를 만드는 것이다. 마을 아짐들과 함께 ‘별마중, 달마중’ 브랜드로 된장, 식초를 만들어 파는 일도 더 확대할 계획이다. 온라인 책마을도 고민하고 있다. 내년에는 고교과정 기숙형 대안학교도 시동을 건다. 다른 지역 대안학교들과 MOU를 맺어 학교 이야기를 책으로 내는 것도 논의 중이다.

그에게 운영은 되느냐 물어보니 “가장 아픈 질문이다”고 답했다. 공간을 바꾸느라 계속 돈을 쏟아부어야 했다. 다행히 교사들 사이에 소문이 나고 학교 단위 참여가 늘면서 프로그램 참가비로 겨우 유지는 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책마을해리는 부부와 5~6명의 스태프가 이끌어가고 있다.

가족은 일당백 지원군이자 스승이다. 특히 큰딸, 우현이를 보면서 많이 배운다. 우현이는 고등학교 진학 대신 이곳에서 작가가 됐다. 독학으로 배운 카툰 실력이 상당해 책마을갤러리에서 전시도 하고 책도 여러 권 내면서 마을학교를 돕고 있다. 요즘엔 음악에 빠져 작곡 공부를 하면서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중이다. 중학생 둘째 딸은 ‘책마을해리’에 관심이 많아 행사가 있을 때면 도우미를 자처한다. 무엇보다 책마을해리의 중심을 잡아주는 사람은 부인 이영남 버들눈 도서관장이다. 기자 출신인 부인과는 책 만들다 만났다. ‘책마을해리’의 실질적인 살림을 도맡아하고 있다. 그는 일을 벌이고 뒷감당은 이 관장 몫이다. 그가 새로운 꿈을 꿀 때마다 이 관장의 한숨은 깊어진다. 책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그는 소년처럼 눈을 반짝였다. 책으로 마을을 살린 그의 마법은 바닷가 폐교를 넘어 세상으로 확산 중이다. 아쇼카 펠로 선정으로 세계의 혁신가 네트워크에 들어갔으니 그가 외치는 마법의 주문은 점점 강력해질 것이다. 밤마다 천장까지 가득찬 책장 사이에서 빗자루 탄 해리포터가 또 다른 마법을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황은순 기자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