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주민욱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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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은 딸만 다섯 있는 집안의 둘째였습니다. 신사임당이 살던 16세기 조선은 딸들에게도 재산을 공평하게 나눠줬습니다. 신사임당은 재산이 많으니 자유롭게 미술도 하고 책을 읽고 시도 쓸 수 있었던 것이죠. 만약 신사임당이 200년 후 조선 후기에 태어났다면 그렇게 유명해지지 못했을 겁니다.”

미국인 교수는 한국인 기자에게 한국 역사에 대해 강의하듯 설명했다. 마크 피터슨(73) 미국 브리검영대 명예교수는 1965년 선교를 위해 한국을 처음 방문한 이후 한국의 매력에 빠졌다. 그 이후 54년 동안 미국과 한국을 꾸준히 오가며 약 15년의 세월을 한국에서 보냈다. 피터슨 교수는 1973년 하버드대 대학원에서 동양사·한국사 전공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4년부터 브리검영대학 아시아학부에서 한국 역사를 가르쳤고 작년 7월 퇴임했다. 퇴임한 이후에는 한국 역사 교육을 개선하겠다는 목적으로 꾸준히 강연활동을 하고 있다. 최근 2019년 들어 처음 한국을 방문했다.

피터슨 교수는 한국 역사를 공부하며 ‘남성 중심의 부계사회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라는 의문을 품었다. 한국인들은 막연히 ‘조선시대’라고 생각하지만, 피터슨 교수의 답은 구체적이었다. “조선시대 17세기 후반부터 부계사회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그 이전에는 비교적 남녀가 평등한 대우를 받았다. 조선 초기에는 족보를 기록할 때도 남성 중심이 아니라 남-여-남-여 식으로 출생 순에 따랐다. 그런데 조선 후기로 넘어가며 출생 순에 상관없이 남성만 위에 기록하고 여성은 그 밑에 따로 적었다. 또 15~17세기 당시 재산 상속을 기록한 문서인 ‘분재기’를 보면 상속이 아들·딸, 첫째·막내 구별 없이 공평하게 나눠졌다.” 그러면서 그는 “이런 정확한 사실관계가 교과서에 실려야 하는데, 여전히 한국인들은 ‘조선시대는 유교사회’ ‘유교사회는 전부 남존여비’라고 인식하다 보니 유교에 대해 안 좋게만 생각한다. 그러나 조선 초기의 유교사상은 분명 자유와 평등이 있었다”라고 지적했다.

피터슨 교수에 따르면 조선 초기에는 여성이 남편과 이혼한 후 재혼하는 것도 자유로운 편이었다고 한다. 흔히 조선시대 여성들을 ‘열녀’라고 여겨왔던 것과는 대비되는 주장이다. 피터슨 교수는 족보 자료를 한 장 보여주며 “여기에 ‘후부’라는 표현이 나온다”며 이런 설명을 했다. “후부는 두 번째 남편이라는 뜻이다. 이 여성과 관련한 족보를 다 찾아봤는데 첫 번째 남편이 죽은 것도 아니었다. 남편과 이혼하고 재혼한 것이다. 놀랍겠지만 족보를 들여다보면 이런 ‘후부’가 자주 등장한다. 조선시대 여성들이 남편과 이혼할 수도 없고, 남편이 죽어도 재혼하지 못했다는 것은 후기의 이야기다.”

남녀가 평등했던 조선의 유교문화가 후기로 넘어가면서 부계사회로 변하게 된 이유로 피터슨 교수는 3가지를 꼽았다. “첫째로는 인구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도 인구가 늘면 상속을 평등하게 하지 못한다. 조선 초기는 흉년이 들어도 사람이 잘 안 죽었는데, 조선 후기에는 흉년 때 사람이 많이 죽었다. 둘째로는 유교사상이 초반과 달리 변화했다는 것이다. 책에 적혀 있는 유학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셋째로는 명나라가 망하고 오랑캐라고 여겼던 청나라가 들어섰는데 그 시점에 조선은 정통 유교를 유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는 한국 고전문학에 대해서도 흥미로운 해석을 내놨다. 피터슨 교수는 “흔히 흥부놀부에 대해 어긋난 형제애를 다룬 이야기라고 하는데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흥부전’은 장남에게 모든 걸 상속하는 조선시대 문화에 저항한 문학이다”라고 했다. ‘흥미로운 해석이다’라고 하자 피터슨 교수는 “‘심청전’ 역시 저항문학이다. 심청이는 아주 효녀인데 여자여서 인정을 못 받는 현실을 비판한 작품”이라고 분석했다.

“당하고만 살았다”는 인식 버려라

‘조선’에 대해 ‘폐쇄적이고 부패했으며 무능하기만 했다’고 생각하는 한국인들이 많다. 그러나 피터슨 교수는 “조선은 충분히 자신감을 가질 만한 역사를 지녔다”고 지적했다. “500년 이상 지속된 왕조가 전 세계적으로 거의 없다. 그런 면에서 조선은 융통성과 안정성을 지녔다. 또 조선을 ‘침략만 당해온 역사’라고 평가절하하는 사람이 있다. 예전에 만났던 고등학교 역사 교사는 조선이 9000번 넘게 침략을 당했다고 주장하더라. 그러나 나는 조선이 당했던 침략은 딱 두 번이었다고 본다. 몽골 침략(몽골 침략은 1200년대로 고려 후기의 일이다)과 임진왜란이다. 국경지대에서의 전투나 해적이 쌀 한 가마, 돼지 한 마리 약탈해간 것까지 ‘침략’이라고 할 수는 없다. 병자호란은 조선을 우방으로 만들기 위해 쳐들어왔던 것이고, 정묘호란 역시 왕의 항복을 받고 돌아갔을 뿐이다. ‘당하고만 살았다’는 인식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피터슨 교수는 최근 ‘우물 밖의 개구리’라는 연구소 설립을 준비 중이다. 한국이라는 ‘우물’에서 벗어나 좀 더 객관적인 역사인식을 갖자는 뜻에서 지은 이름이다. 피터슨 교수는 “한국인들은 여전히 스스로를 ‘고래 싸움에 등 터져온 새우’라고 생각하는 피해의식이 있다. 과거에는 그럴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다”면서 “현재의 자랑스러운 역사에 좀 더 집중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피터슨 교수는 외국인으로서 50년 넘게 한국을 지켜본 한국 근현대사의 산증인이기도 하다. 그는 “문재인 대통령이 왜 대통령을 하고 싶어했는지 모르겠다. 예전에 ‘한국 사회는 대통령을 먹는 식인종 사회’라는 논문을 쓴 적이 있다. 한국에서는 행복하게 퇴임한 대통령이 거의 없고 대부분 죽거나 감옥에 갔기 때문”이라면서도 “그래도 한국 민주주의는 수준이 매우 높은 편이다. 대통령을 탄핵하는 과정에서도 유혈사태 한 번 없지 않았나. 미국이 배워야 할 부분”이라고 말했다.

유타주 프로보에 살고 있는 피터슨 교수는 브리검영대학교에서 만난 탈북자 부부를 집에 들여 1년째 함께 지내고 있다. 그는 탈북자 부부가 낳은 아이의 할아버지가 되기로 했다고 한다. 그는 “3월 29일이 손주 돌잔치인데, 나는 한국에 있어야 해서 가지 못한다”고 아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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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승한 수습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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