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시내의 모금함에 돈을 넣고 있는 소녀. 지난해 기부를 한 영국인은 전체 국민의 61%로 조사됐다. ⓒphoto 뉴시스
런던 시내의 모금함에 돈을 넣고 있는 소녀. 지난해 기부를 한 영국인은 전체 국민의 61%로 조사됐다. ⓒphoto 뉴시스

인간에게는 얼마만큼의 돈이 필요할까. 이는 누구도 쉽게 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 영국인들에게는 돈이 행복의 첫째 조건은 아닌 듯 보인다. 그럼 “영국인 모두가 돈 말고 인생 행복의 해답을 가지고 있느냐”는 질문을 한다면 필자의 대답은 ‘거의 예스’이다. 영국인 개개인의 마음속에서 실제 어떤 생각과 감정이 매순간 오고가는지 속속들이 알 수는 없으나 주위의 대다수 영국인들을 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그들은 돈이 많지 않아 여유롭지는 않아도 특별히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느끼거나 돈을 갈구하면서 허덕이지 않는다. 돈의 유무와 관련 없이 모두들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아간다. ‘주어진 삶’이라는 수동적인 표현을 쓴 이유는 자신의 삶을 자기가 주도적으로 개척해 나가지 않는 듯하다는 느낌을 자주 받아서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그냥 ‘살아가는’ 듯, 심지어 ‘살아주는’ 듯한 느낌을 평소 받기에 하는 말이다. ‘인간의 삶이란 창조주가 각자에게 내려준 몫의 삶’이란 기독교적 철학이 자신도 모르게 뇌리에 깊이 박혀 있는 듯해 보인다.

그렇지 않고는 어찌 저 많은 영국인이 저렇게 ‘가난하면서도 우아하게’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이 안 나온다. 영국인의 삶은 경제적으로 참 빠듯하다. 월급 받아서 반드시 필요한 데 쓰고 나면 거의 남는 돈이 없어 보인다. 개인은 가난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영국 국가 자체나 사회가 가난하다는 뜻은 아니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던 영국은 이제 해가 좀 지긴 했지만 아직도 경제 규모로는 미국, 중국, 일본, 독일 다음이다. 앞의 4개국이 독일(인구 8200만명) 빼고는 모두 인구가 1억명이 넘는다는 걸 감안하면 영국의 경제 규모는 인구(6695만명)로 보면 대단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영국인 개개인은 의외로 가난하다.

맞벌이 안 하면 품위 유지도 어려워

통계로 한번 보자. 영국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4만3160달러(3만2946파운드)로 한국의 3만1349달러에 비하면 거의 37.6%가 많다. 그러나 악명 높은 물가를 감안하면 결코 많다고 할 수 없다. 다른 통계를 보면 영국인 평균 연봉은 2만7195파운드(4079만원)로 나온다. 생각보다 상당히 낮다. 위의 1인당 국민총소득(3만2946파운드)에도 못 미친다. 또 영국 전체 소득세 납부자 3200만명 중 80%인 2560만명이 소득세 기본세율(20%) 해당자이다. 1만1851파운드(1781만원)~4만6350파운드(6952만원) 사이의 연봉이 이 기본세율 소득에 해당한다. 대다수 영국인들이 기본세율 연봉을 받는 월급쟁이라는 말이다. 연봉 1만1851파운드 이하는 소득세 비과세 대상인데 3100만명 봉급자 중 단 78만명(2.8%)만 비과세인 셈이니 한국의 46.5%에 비하면 과세점은 상당히 높은 편이다. 동시에 저소득자가 적다는 말이기도 하다.

영국의 근로자 최저임금은 시간당 8.21파운드(1만2315원)다. 최저임금을 받는 근로자가 주 40시간을 일하면 주당 328.4파운드를 번다. 연봉으로 따지면 약 1만7134.48파운드이고 월급으로는 1427.87파운드(214만원)다. 하지만 최저임금 근로자도 소득세 면세 해당자가 아니다. 그러고 보면 영국은 전 국민이 철저하게 세금을 내는 개세제도(皆稅制度) 국가이다. 모든 국민이 혜택을 받으려면 소득이 아무리 적더라도 세금은 내야 한다는 뜻이다. 복지제도를 지향한다면 어느 나라나 지향해야 할 정책이다.

이제 영국인 평균 연봉 2만8677파운드(4301만원)를 실제 생활에 대입해보자. 소득세 3235.40파운드와 건강보험을 포함한 사회복지 관련 제세금 2405.40파운드를 제한 뒤 이를 12개월로 나누면 1919.68파운드(288만원)를 매달 손에 쥔다. 영국 소비자물가 단체 통계로 보면 영국 생활물가는 4인가족 월별 기본생활비(식품+광열비+통신비) 평균을 900파운드로 잡는다. 여기다가 주택 융자 상환금이나 월세 같은 주택 관련 경비를 기본적으로 1000파운드 이상 낸다. 이마저도 대도시가 아닌 지방을 기준으로 한 금액이다. 런던 시내는 4인가족이 지낼 아파트나 주택의 월세가 거의 2500~3000파운드에 이른다. 반면 지방 대도시는 1000~1500파운드 정도다. 이렇게 보면 부부 중 한 사람의 월급으로는 생활의 기본 3요소인 의식주(衣食住)에서 식과 주를 해결하고 나면 남는 돈이 전혀 없다는 말이 된다. 결국 나머지 경비(교육+의류+문화+휴가+자동차)는 부인의 월급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뜻이다. 실제로 영국에서는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인간다운 품위 유지를 하고 살아갈 수가 없다. 그만큼 물가에 비해 영국 평균 월급이 적다는 뜻이다.

특히 지난 40년간 영국의 주택 가격이 엄청나게 올라서 큰 사회적 문제로까지 대두했다. 지금 젊은이들의 부모 세대가 집을 사던 1980년대 영국 집값은 평균 2만2677파운드였고 연봉은 평균 5720파운드였다. 영국의 장기저리주택융자(house mortgage) 최대 금액은 3년치 연봉 수준이었다. 1980년대만 해도 신혼부부 3년 연봉을 합치면 대부분 집을 살 수 있었다. 자신들이 은퇴할 시기를 계산해 거기에 맞춰 주택구입융자를 받고 부부가 열심히 일해 평생 융자금을 갚아갔다. 월별 융자금 상환액과 함께 개인연금과 생명보험까지 들어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평생을 착실하게 일해 은퇴할 시기가 되면 주택은 융자금을 다 갚은 온전한 자기 소유가 되었다. 정부의 기초연금과 함께 개인연금도 매달 타고 직종에 따라 직장연금도 타면 금상첨화였다. 그래서인지 영국에서 가장 돈을 여유 있게 쓰던 세대는 은퇴 노인들이었다. 머리가 허연 노년 그룹이 관광지를 꽉꽉 채웠었다.

사회의 기본단위인 신혼 가정이 주택 구입을 시작으로 결혼생활을 할 수 있었고 은퇴 후 삶까지 일찍 설계할 수 있어 영국은 안정적인 사회라는 평을 들을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젊어서 일할 때는 주택융자 갚는다고 가계를 꾸리기가 빠듯하지만 열심히만 살면 영국인이 제일 좋아하고 가장 바라는 ‘예측이 가능한 삶(predictable life)’을 살 수 있어 굳이 불안해할 필요가 없었다.

영국인의 여유와 느긋함의 바닥에는 영국 사회복지제도의 4대 기본권리가 받치고 있다는 생각도 한다. 4대 기본권리는 국민이 ‘굶지 않을 권리’ ‘집을 가질 권리’ ‘아프지 않을 권리’ ‘배울 권리’이다. 결국 영국에서는 최악의 경우라도 완전히 바닥으로 떨어지는 인생 막장은 없다는 뜻이다.

“큰 집, 좋은 차 가지면 행복하냐”

필자가 영국에 처음 와서 겪은 문화충격에 가까운 경험이 있다. 한겨울인데 집에 난방시설이 고장이 났다. 지금은 한인 동포 기술자가 여러 명 있어서 급하게 부탁하면 한국인 특유의 순발력을 발휘해 한밤중이라도 뛰어와서 고쳐주지만 당시는 영국인 기술자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이런 보일러 기술자가 되려면 아주 엄격한 시험을 거쳐야 하기에 이들의 콧대는 하늘을 찔렀다. 지금도 별로 나아지진 않았지만 그때는 정말 예약하기가 힘들었다. 친지의 소개로 어렵게 연결이 되어 예약을 하자니 “일주일 뒤에나 시간이 나니 그때 오겠다”고 사무적으로 말하는데 기가 딱 막혔다. 추운 겨울에 어린아이를 어찌해야 하느냐는 사정은 우리 사정일 뿐이었다.

전기훈풍기를 급히 구해 일주일을 버틴 후 드디어 아침 일찍 기술자가 왔는데 수리가 다행히 오전에 끝났다. 기술자에게 그냥 인사말로 “이제 오늘은 몇 건이나 수리가 남았느냐”고 물었더니 “오늘 일은 끝났고 집에 가서 샤워하고 점심 뒤에 아내와 골프 치러 간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래서 “참 예약하기 어렵던데 왜 오후에 일 안 하느냐”고 물었더니 “왜 오후에 반드시 일을 해야 하느냐”고 되레 물었다. 그래서 “수리비가 상당히 높고 예약이 밀리던데 밤을 새서라도 일을 더하면 돈을 더 벌어 좋지 않느냐”고 다시 묻자 그가 “돈을 더 벌면 뭐 하는데?”라고 되물었다. 필자는 “돈을 더 벌면 집도 더 큰 데로 옮기고 차도 바꾸고 휴가도 더 좋은 데로 가고 좋지 않냐”라고 하니 이 친구는 “큰 집, 좋은 차, 휴가 더 좋은 곳으로 가면 더 행복한가”라고 또 되물었다.

갑작스러운 철학적인 질문에 말문이 막힌 필자를 쳐다보던 그의 표정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나는 지금 연립주택에 30년째 사는데 세 식구 살기에는 불만이 전혀 없고 자동차도 영국산 포드자동차라 유지비도 싸고 휴가는 프랑스 노르망디로 거의 20년째 가지만 너무 좋다. 오늘도 돈 더 벌려고 아내와 하는 골프를 포기할 생각이 없다.” 그는 그때 무척 단호하게 말했다.

당시 한국에서 막 이민 와서 일 년 내내 휴가도 제대로 못 가고 매일 야근에 일요일 반나절 출근까지 예사로 하던 무역회사 직원으로서는 그의 생활철학이 정말 ‘우주인의 철학’ 같았다. 이제는 영국인의 ‘소확행’을 이해하는 수준까지는 갔지만 영국인의 여유를 따라가려면 이 생에서는 안 될 것 같다.

필자는 영국인들이 ‘가난하나 우아하게 산다’고 표현한다. 그 말은 영국인이 옆으로 눈 돌릴 여유 없이 한 푼도 아껴가면서 빠듯하게 살지만 인간으로서 할 일은 다 하고 산다는 말이기도 하다. 거기다가 하나를 더 한다면 ‘그렇게 살면서도 초라하다고 느끼지 않고 당당하게 산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우선 주위의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 가족, 친구, 친지, 이웃, 동창, 회사 동료들까지 영국인 전체가 그렇게 살고 있음을 잘 안다. 아무리 주위 신경 안 쓰고 비교하면서 살지 않는 영국인이라고는 하지만 정말 혼자서만 그렇게 살 수는 없다. 모두 비슷하게 살기에 그들 속에 묻혀서 초연하게 살아갈 수 있다.

영국인은 ‘줄 서서 묵묵히 기다리면 언젠가는 내 차례가 온다’는 것을 거의 종교적 믿음처럼 의심하지 않는다. 런던 히드로공항의 영국인들. ⓒphoto 뉴시스
영국인은 ‘줄 서서 묵묵히 기다리면 언젠가는 내 차례가 온다’는 것을 거의 종교적 믿음처럼 의심하지 않는다. 런던 히드로공항의 영국인들. ⓒphoto 뉴시스

템스강 보트에 사는 하원의원

거기다가 자신이 그렇게 살아도 절대 피해보지 않는다는 확신도 있다. 영국인들이 가장 잘하는 일이 ‘queuing(줄서기)’이다. 한국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queuing’이란 단어는 혼자서도 반드시 지키는 행위를 뜻하는 아주 영국적인 단어이다. 영국인은 ‘줄 서서 묵묵히 기다리면 언젠가는 내 차례가 온다’는 것을 거의 종교적 믿음처럼 의심하지 않는다. 영국인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화두를 들라면 바로 이 믿음이다. 사람들이 줄을 벗어나 뭔가 다른 방법을 찾으려는 이유는 내가 줄 서서 기다리면 내 순서가 온다는 믿음이 사라졌거나 사라지고 있다고 느낄 때이다. 영국인들은 어느 경우에도 줄을 흐트리거나 새치기를 하지 않는다. 일상생활에서고 어디서고 본 적도 들은 적도 없기 때문이다. 가만히 맥을 놓고 편안하게 살면 모두 내 옆을 스쳐 지나가 나만 뒤처진다는 위기감을 느끼지 않는다.

권력이 있다고 해서 줄 중간에 끼어든다거나 줄 제일 앞에 서는 일은 영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는 친구를 잘 뒀다는 이유로 장관이 되고 공기업 사장이 되는 경우는 없다. 평생 일해야 얻을 수 있는 자리를 낙하산 타고 내려온 퇴직 공직자가 차지하는 일도 있을 수 없다. 공직에 오른다고 해서 뭔가 권력을 누릴 일도 없고 일확천금이 건져지지도 않는다. 비싼 집값 때문에 런던 교외에 살면서 기차 타고 출퇴근하는 현직 장관, 팍팍한 의정활동비로는 런던 집값을 감당할 수 없어 보트를 빌려 템스강 위에서 거주하는 고달픈 지방 출신 하원의원들을 보면 영국에서는 권력을 잡고 출세해도 별것 아니다는 ‘안심’을 한다. 그래서 영국인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잘 느끼지 않는다. 동시에 자신의 권리를 권력자나 기득권층이 부당하게 가져가지 않는다는 믿음도 갖는다. 명문 사립학교를 나온 5%의 엘리트가 앞서서 나라를 끌고 가지만 그들을 믿고 나머지 95%는 그냥 소확행으로 살아갈 뿐이다.

그래서인지 영국인의 눈에는 핏발이 잘 서 있지 않다. 굳이 더 잘살아보려고 노력하지도 않고 악쓰지도 않고 편안하게 큰 꿈 없이 하루하루 충실하게 살아가기 때문이다. 어쩌면 무력해 보이고 무지해 보이기까지 한다. 노력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 신앙에 물든 한국인의 눈으로 보면 흡사 패배자들 같다. 이길 수 없는 싸움과 맞서 자신을 상하게 하지 않고 일찍 항복해버린 후 무기력한 듯 초월한 듯 무심한 듯 포기한 채 살아가는 것이 영국인들이다.

좀 더 가혹하게 얘기하면 영국인들은 가난을 계급이라고 여긴 채 자신이 태어난 계급에 만족하며 사는 듯하다. 신분제도에 대한 태생적인 복종이 몸에 밴 결과일까. 주택임대료를 전혀 내지 않거나 적게 내는 카운슬하우징(council housing·공영주택)에 사는 최하층 서민들도 자신들의 처지에서 굳이 벗어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어려서부터 살던 곳에 가족, 친구, 친지 모두가 있어서 굳이 벗어날 이유를 찾지 못한다. 태어난 동네에서 동네사람들과 어울리고 동네 상점엘 가고 단지 내 학교를 다니고 거기서 만난 이웃 여인과 결혼해 그 안에서 산다. 할아버지 때부터 살아와서인지 그들에게는 평생 산 곳이 세상의 전부이고 시작이자 끝이다.

뿐만 아니다. 런던 외곽이나 근교에 사는 중산층마저도 “40년 동안 런던 시내에 단 3번 나가봤다”는 말을 예사로 할 정도로 모든 일에 무심하다. 굳이 비싼 차비(왕복 2만원) 들여가며 나갈 일이 없다는 식이다. 뭔가를 사지도 않을 거면서 시내 백화점을 기웃기웃할 일이 없다는 투다. 굳이 시내 나가서 영화관 가고 식당엘 가지도 않는다. 과장해서 표현하면 청빈낙도(淸貧樂道), 안분지족(安分知足)의 경지에 오른 한국의 선비 같기까지 하다.

거기에 하나 더 하자면 아무리 어렵더라도 어떻게든 세상을 도우면서 살아간다. 영국인은 사회로부터 자선을 받더라도 ‘언젠가 돌려줄 수만 있으면 내가 받은 것이 동정이 아니다’라고 믿는다. 그런 자세 때문인지 영국인은 자신이 초라하지 않다고 여긴다. 세상이나 타인을 도울 수 있으면 자신은 고귀하다고 믿는다. 2018년 영국인의 61%가 기부했다. 수시로 기부를 한다는 답이 영국인의 51%였고 매달 정기적으로 하는 경우는 25%였다. 38%의 국민이 지난 1년간 한 번 이상은 자원봉사를 했다. 영국에는 18만5000개의 등록된 자선단체가 있다. 매년 5000개 이상 늘어나고 있다. 암 관련 단체만 620개가 있다. 런던에만 노숙자를 돕는 단체가 200여개 있다.

2018년 국민 중 61%가 기부

2016년 영국 총 자선금액은 97억파운드(14조5500억원)였다. 2016년 인구(6565만명)를 기준으로 하면 영국인 1인당 22만1629원꼴이다. 2017년 8월 통계에 의하면 영국인은 평생 동안 평균 3만파운드(4500만원)를 기부한다. 평균 연봉보다 많은 금액이다. 이처럼 자선기관에 전해지는 공식적인 금액 외에 길거리에서 걸인이나 노숙자들이 내미는 구걸통에 넣은 금액만 평생 1831파운드(274만원)에 이른다는 통계도 있다. 또 자선 마라톤 같은 일회성 자선활동에 기부한 금액만도 평생 2275파운드(342만원)나 된다는 통계도 있다.

최근 영국 언론에 감동적인 기사 하나가 나왔다. 악성 혈액암을 앓는 5세 소년을 위해 줄기세포를 구하는 행사와 관련한 내용이었다. 4855명의 생면부지 사람들이 비가 오는 쌀쌀한 날에 자신이 줄기세포를 줄 수 있는지 검사하려고 아침부터 늦은 오후까지 줄을 서서 기다렸다. 기존의 비슷한 사례 최고기록이 2200명이었는데 이번에 그 두 배로 기록을 깬 셈이다.

영국인은 이렇게 스스로를 초라하지 않게, 고귀하게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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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하 재영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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