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9일 박겸수 강북구청장이 국립4·19민주묘지에 있는 김주열 열사 묘 옆에 서서 설명하고 있다. ⓒ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지난 4월 9일 박겸수 강북구청장이 국립4·19민주묘지에 있는 김주열 열사 묘 옆에 서서 설명하고 있다. ⓒ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서울 강북구 수유동에 있는 국립4·19민주묘지에는 4·19혁명 당시 사망한 수송초등학교 6학년 전한승 군의 묘가 안장되어 있다. 전 군은 세종로 시위 현장에서 경찰의 총에 맞아 숨졌다. 묘비에 새겨져 있는 사진 속 그의 얼굴은 젖살이 빠지지 않은 앳된 얼굴이었다. 운동장에서 공 차고 골목길을 뛰어다녀야 할 얼굴이었다. 그는 이곳 4·19묘지에 안장되어 있는 이들 중 가장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오빠와 언니들은 책가방을 안고서/ 왜 총에 맞았나요/ 도둑질을 했나요/ 강도질을 했나요/ 무슨 나쁜 짓을 했기에/ 점심도 안 먹고/ 저녁도 안 먹고/ 말 없이 쓰러졌나요/ 자꾸만/ 자꾸만 눈물이 납니다’.

‘학교 오빠’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당시 수송초 4학년 강명희 양은 ‘오빠와 언니는 왜 총에 맞았나요’라는 추모시를 지었다. 수송초 학생들도 ‘우리의 부모형제에게 총을 겨누지 말라’며 현수막을 만들어 거리로 나섰다.

1묘역에서 출발해 4묘역까지 확장

지난 4월 9일 박겸수 강북구청장과 함께 국립4·19민주묘지를 찾았다. 박 구청장은 전 군의 묘역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박 구청장은 전 군의 비석을 만지며 “이 어린 학생 눈에도 세상이 잘못 돌아가고 있는 게 훤히 보였던 거다. 돌아가실 당시에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지만 지금은 역사의 대선배님이다. 이분 덕에 우리가 지금처럼 살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일 년에도 수십 번 이 묘지를 찾지만, 이들의 사연은 올 때마다 가슴을 찌르르하게 만든다”고 덧붙였다.

3선의 박 구청장은 ‘4·19 전도사’라고 불릴 만큼 2010년 취임 직후부터 4·19혁명을 알리기 위해 뛰어다녔다. 그는 4·19혁명을 기념하고 알리는 것은 국립4·19민주묘지가 있는 강북구에서 꼭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4·19민주묘지는 1963년 처음 만들어질 당시만 해도 지금의 1묘역이 전부였던 ‘공원묘지’ 정도의 규모였다.

이후 김영삼 정부가 출범한 1993년 성역화 사업을 시작했고 1997년에야 ‘국립4·19민주묘지’로 제정되면서 위상이 올라갔다. 지금은 총 4묘역까지 확장됐다. 박 구청장은 “‘묘지’라는 이름도 ‘현충원’으로 바꿀 계획”이라고 말했다. 박 구청장은 4·19민주묘지를 북한산 자락이 감싸고 있어 “풍수지리 학자들도 최적의 터라고 극찬한 곳”이라고 덧붙였다.

국립4·19민주묘지에는 4·19혁명의 상징처럼 돼버린 김주열 열사의 묘역도 있다. 그의 시신은 창원시에 있는 국립3·15민주묘지에 있지만 4·19혁명 기폭점이 된 그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국립4·19민주묘지에도 비석을 세웠다. 현재 국립4·19민주묘지에는 총 426기의 묘가 안장되어 있다. 4·19혁명 당시 사망자부터 4·19유공건국포장 수상자까지가 모두 안장 대상이다. 4·19혁명 당시 사망자는 186명, 부상자는 7000여명에 달한다. 국립4·19민주묘지에 들어갈 요건을 갖춘 안장 예정 대상자는 현재 483명이다.

4·19혁명은 올해 59주년을 맞는다. 강북구에서는 2013년부터 4·19를 기념하기 위한 ‘4·19혁명 국민문화제’를 매년 열고 있다. 올해 7회째인 ‘4·19혁명 국민문화제’는 4월 13일 시작해 19일 막을 내린다. 환갑을 앞둔 ‘4·19’의 역사에 비춰보면 이 행사의 역사는 짧은 감이 든다. 60주년을 맞는 내년 4·19혁명 기념행사는 정부 주최로 열린다.

4·19혁명 당시 수송초 6학년 전한승 군이 경찰의 총에 맞아 숨지자 수송초 학생들이 거리로 나와 시위에 동참했다.
4·19혁명 당시 수송초 6학년 전한승 군이 경찰의 총에 맞아 숨지자 수송초 학생들이 거리로 나와 시위에 동참했다.

4·19 국민문화제를 만든 이유

이 행사는 박겸수 강북구청장이 부임 후 가장 공들여 추진한 사업 중 하나다. 기자가 강북구청을 찾아갔을 때 구청 청사에는 ‘4·19혁명 국민문화제’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구청 공무원들은 이 행사 준비를 위해 분주해 보였다. 구 차원에서 1년 중 가장 공을 들이는 행사라고 구청 관계자는 설명했다.

박 구청장은 “예전에 4·19는 언론에서도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기념일이었다. 대통령이 국립묘지에 와서 참배를 하고 가도 기사가 별로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문화제라도 추진해 4·19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다시 모으고 싶었다는 것이다.

2010년 취임한 박 구청장은 2011년부터 서울시의회와 국가보훈처, 4·19관련 시민단체들을 설득해 문화제 추진에 뛰어들었다. 원래 없던 일을 새로 만들기란 힘든 과정이었다.

“헌법에서도 4·19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는데, 국민문화제 하나는 있어야 하는 게 맞지 않나 생각이 들었다. 세계사적으로도 4·19가 갖는 특별한 의미에 부합할 수 있는 행사를 마련해야 한다고 느꼈다.”

박 구청장은 행사 추진 첫해 서울시의회에 건의해 예산 3억원을 지원받고 이를 마중물로 국가보훈처를 설득했다. 박 구청장은 “4·19에 대해서만큼은 여야 정쟁이 있을 수 없었다”고 했다. 민주당 출신인 박 구청장이 과거 당에서 보좌했던 이기택 전 총재도 그를 도왔다. 이 전 총재는 4·19혁명 공로자들의 모임인 4·19사랑방회 회원이었다. 강북구청 청사에는 이기택 전 총재가 새긴 ‘4·19민주혁명국민문화위원회’ 현판이 지금도 걸려 있다.

박 구청장은 ‘세계 3대 민주화운동’으로 꼽히는 미국의 독립혁명, 영국의 명예혁명과 프랑스혁명에 이어 4·19혁명을 세계 4대 민주화운동에 포함시키는 서명운동도 벌이고 있다. 그는 4·19혁명을 국가기념일을 넘어 공휴일로 지정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그는 “헌법정신에 나와 있는 3·1운동과 함께 4·19혁명도 공휴일로 지정해야 한다. 그러면 세계에서도 4·19혁명에 대한 관심을 더 많이 갖게 될 것”이라고 했다.

올해 4·19혁명 국민문화제 행사는 뮤직페스티벌을 비롯해 대학생 토론대회, 엄홍길 대장과의 순례길 트레킹 등 여러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어 있다. 올해 뮤직페스티벌에는 청하, 비와이, 러블리즈 같은 젊은 가수들을 섭외했다. ‘4·19혁명이라는 역사와 가수들이 잘 안 어울리는 것 같다’는 질문에 박 구청장은 “청년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다. 앞으로 이 나라를 끌어갈 청년들이 먼저 4·19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 아닌가”라고 했다.

페스티벌 당일에는 강북구청 교차로부터 광산사거리까지 600m 구간의 차량을 통제하고 이곳에 무대와 광장을 만든다. 지난해에는 5만여명의 시민들이 모였다. 4월 18일 전야제 행사에는 시민들이 직접 참여해 1960년대 거리를 재현하는 퍼레이드도 열린다.

4·19혁명 국민문화제에서는 1960년대 거리를 재현한 퍼레이드를 진행한다. 사진은 2018년 행사 모습.
4·19혁명 국민문화제에서는 1960년대 거리를 재현한 퍼레이드를 진행한다. 사진은 2018년 행사 모습.

‘세계 4대 민주화운동으로!’ 서명운동도

올해 눈에 띄는 행사는 제3회를 맞는 ‘4·19혁명 국제학술회의’다. 4·19혁명의 세계사적 의의와 가치를 학술적 측면에서 조명하고자 시작한 행사다. 박 구청장은 “1960년대 당시 한국은 GDP 100달러 안팎의 최빈국 중 하나였고 불과 15년 전까지는 식민지 국가였다. 그럼에도 국민들이 부정한 정치에 맞서싸우며 피를 흘렸다. 흔히 ‘배고픔이 먼저 해결되어야 민주주의도 발전한다’는 통념을 뛰어넘은 것이다”라며 4·19가 갖는 특별한 의미를 역설했다. 그러면서 그는 “민주혁명 하면 한국 사람들도 미국의 독립혁명, 영국의 명예혁명, 프랑스대혁명을 먼저 떠올리는데 사실 4·19혁명은 그 혁명들과 견주어봤을 때도 충분한 역사적 가치를 가진다”며 그 이유를 “현재 제3세계 국가들의 민주화에 본보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하는 것도 4·19가 갖는 이런 역사성과 의미를 제대로 알리기 위해서라고 한다. 박 구청장은 “4·19혁명과 관련한 해외 논문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고 이를 개선하고 싶었다”는 말도 했다. 해외 석학들을 초청해 4·19혁명 관련 논문을 발표하며 ‘4·19의 세계화’를 이뤄내는 것이 학술회의의 가장 큰 목표라는 것이다.

예컨대 마리오란주 리베라산 파리 디드로대학 동아시아 언어·문화학부 부교수는 지난해 학술회의에서 ‘세계적 맥락에서의 4·19혁명의 정신과 한반도의 미래에 대한 재고찰’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이 논문에서 이런 주장을 폈다. “필자는 4·19혁명과 프랑스 5월혁명(68혁명) 모두 직접적인 정치 차원을 넘어선 장기적인 ‘사회·문화적 혁명’이라 칭하고자 한다. 두 혁명은 모두 각 사회의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전해내려온 관념의 집요함을 잘 알고 있다. 역사적 사건들의 기념일은 이러한 사회·문화적 혁명의 본질과 결과를 재조명함과 동시에 사건에 대한 집단 기억을 변화시킬 수도 있는 좋은 기회다.”

전한승 군과 김주열 열사처럼 아직 부모의 품에서 자라야 할 어린 학생들이 ‘민주주의’를 외치며 피를 흘렸다. 그동안 4·19학술회의에서 발표된 대다수 논문들은 어린 학생들의 정신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올해 학술회의에서 ‘한반도 평화 구축의 도전 과제: 4·19혁명 정신의 계승’이라는 논문을 발표한 미국 하와이대학 에드워드 슐츠 교수는 이런 평가를 했다. “학생들은 그 나라의 ‘양심’이라는 말이 있다. 1960년 한국 학생들이 분연히 일어났을 때 이들은 분명 정실주의, 부패, 권위주의로 피폐해진 조국을 위해 목소리를 냈다. 비록 이들이 추구한 목표가 바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이들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과업의 첫 삽을 뜬 것이다.”

곽승한 수습기자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