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15일 오후(현지 시각) 발생한 화재로 불타고 있는 노트르담대성당. ⓒphoto 뉴시스
지난 4월 15일 오후(현지 시각) 발생한 화재로 불타고 있는 노트르담대성당. ⓒphoto 뉴시스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미어지고 눈물이 난다. 불에 타 힘없이 쓰러지는 뾰족한 탑은 인류 모두의 심장을 찌르는 바늘 같다. 2001년 9·11 동시 테러사건 당시 뉴욕 세계무역빌딩의 최후와 너무도 닮은 악몽의 재현이다. 화재 진압용 물을 뿌리지만 불길은 한층 심해진다. 최첨단 소방기재나 AI 시대의 원격기술도 속수무책이다. 대성당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불이 꺼지기를 기도하는 것만이 유일한 대응책이다. 실황 중계에 나선 BBC방송은 파리 시민들이 그냥 길에 주저앉아 ‘흐느낄 뿐(Just weeping)’이라고 전한다.

위선의 도시 파리

‘신의 질투 때문일까?’ 불타는 파리 노트르담대성당을 TV 화면으로 보면서 순간 떠오른 생각이다. 프랑스 수도 파리는 그리스 신화 속 트로이 왕자 파리(Paris)와 연결돼 있다. 그리스 여왕 헬레나를 훔쳐 달아난, 기원전 12세기로 추정되는 트로이전쟁의 도화선이 된 인물이다. 원래 양치기로 전쟁과 무관한 인물이었지만 아킬레스 뒷발목에 화살을 쏴서 얼떨결에 영웅이 되기도 한다. 원래 켈트어 ‘파리시(Parisii)’ 부족이 어원이란 말도 있지만, 전쟁의 도화선이 된 파리라는 도시와 더 잘 어울리는 것은 왕자의 이름 파리다. 여자 하나를 위해 나라 전체를 사라지게 만든 왕자가 상징하듯, 파리라는 도시도 청춘과 사랑의 무대다.

비극의 시작은 “누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냐?”란 질문에서 시작됐다. 그리스 신화 속에서 헤라, 아테네, 비너스 세 여신이 왕자 파리에게 던진 물음이다. 헤라는 파워, 아테네는 지혜, 비너스는 미(美)를 선물로 내놓는다. 파리는 비너스를 선택한다. 성경에서 선악과로 통하는 사과가 비너스에게 건네진다. 약속대로 비너스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헤레나를 파리에게 안긴다. 그러나 헤레나는 그리스 왕의 부인, 즉 유부녀였다. 첫눈에 반한 왕자 파리는 헤레나를 납치해 트로이로 돌아간다. 불륜도 사랑의 하나일까? 상황을 지켜보던 헤라와 아테네는 트로이의 적인 그리스 편에 선다. 그리스왕 아가멤논과 무적의 용사 아킬레스를 앞세워 트로이를 공격한다. 비너스가 트로이 편에 서지만, 두 여신의 분노와 증오심 앞에는 역부족이다. ‘질투는 나의 힘’은 시 구절에 국한되지 않는다. 여신들의 편싸움 끝에 트로이는 멸망한다.

노트르담대성당 화재가 아직도 남아있는 두 여신의 질투심에서 비롯됐다고 말한다면 어떻게 들릴까? 프랑스인이라면 대로(大怒)할 한가하고도 정신나간 소리 정도로 들릴지 모른다. 그렇지만 필자가 아는 파리지앵은 한술 더 떠서 “노트르담 화재는 신이 내린 천벌”이란 해석도 내놓는다. 모로코 출신 부모를 둔, 파리 출생 진짜 파리지앵으로 필자와 동갑인 빅토르(Victor)라는 이름의 프랑스인이다. 어릴 때 센강에서 벌거벗고 수영하는 것이 상식이었다고 말하는 세대다. 프랑스에 관한 대부분의 깊은 정보는 이 친구를 통해 얻어낸 것들이다. 노트르담 화재 생방송을 보다가 전화를 걸자 곧바로 ‘샤티몽(Châtiment)’이란 대답이 들려온다. 하늘이 내린 천벌이란 의미이다. 배경과 이유를 듣는 순간 나름대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빅토르의 설명도 있지만, 파리에 관련된 필자의 ‘개인적 경험’에 기초해 볼 때도 천벌이란 발상이 전혀 황당하지 않았다.

필자는 매년 유럽 대도시를 돌며 장기체류하지만 최근 왠지 거리를 둔 도시가 파리다. 당분간 잊고 멀리하고 싶은 도시라고나 할까? 원래부터 알고 있던 파리가 아닌, 전혀 다른 얼굴의 도시로 변했기 때문이다. 호텔을 찾다가 대낮 노상에서 만난 10대 도둑, 지하철역 오페라(Opera)에서 접한 술꾼들의 난동과 치안 부재, 거리 곳곳에 자신만만하게 펼쳐진 4인가족용 난민용 침대, 샹젤리제 거리에서 6명에게 둘러싸여 아이폰을 강탈당한 필자의 미국인 친구…. 이런 어두운 경험보다 파리를 밀어낸 가장 큰 이유가 이슬람극단주의자들에게 잡지사가 공격당한 샤를리 에브도(Charlie Hebdo) 사건과 뒤이은 동시다발 테러였을 것이다. 특히 2015년 11월 벌어진 파리 동시다발 테러는 100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파리판 9·11 사건이다. 사건 후 2개월 뒤인 2016년 1월, 빅토르의 도움을 받아 피의 현장을 하나씩 더듬어봤다. 현장의 선명한 핏자국이 아직 채 가시지 않았던 때였다. 결론은 ‘위선의 도시’ 파리다.

노트르담대성당의 ‘장미의 창’과 피에타상. 이번 화제에서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photo 유민호
노트르담대성당의 ‘장미의 창’과 피에타상. 이번 화제에서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photo 유민호

샤를리 에브도 사건의 배경

당시 필자의 머리를 떠나지 않던 생각은 파리 테러 현장에서도 들리는 ‘약자를 위한다’는 정치적 슬로건이 얼마나 위선적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말하는 약자에는 여성, 이민자, 장애자, 어린이, 성적소수자, 노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대상이 존재한다. 미국식으로 말한다면 이른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ly Correct)’을 앞세운 이념이 파리 전체를 표류한다. 이상과 미래로 포장된 장밋빛 정치이념이다. 19세기 말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시대라면, 21세기는 ‘약자 우선’이 프랑스의 대세다. 약자는 누구나 관심을 가져야 할 대상이다. 그러나 문제는 누가 진짜 약자인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약자를 지탱해야 할 강자들의 의사와 권리는 철저히 무시된다. 얼떨결에 강자로 올라선 억울한 사람들도 많다. ‘강자=책임’이고 ‘약자=권리’다. 프랑스는 미국의 트럼프 같은 대통령을 만들 만한 정치적 환경과는 거리가 먼 나라다. 양당제가 아니라 다당제에 의한 연립정부, 동거정부가 일상화돼 있다.

당연하지만 양자택일이 아닌 팔방미인형 백화점식 정치가 남발한다. 파리를 공격한 ‘괴물 테러리스트’는 그 같은 환경 속에서 탄생한 것이다. 수동적이고도 위선적인 대응이 거꾸로 테러조차 용납하게 만들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친구 빅토르에 따르면, 샤를리 에브도 사건 때 경찰이 아예 출동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위선적 세계의 특징이지만 법 집행이 어려워지면서 경찰도 총쏘기를 주저한다. 책임을 피하기 위해 달콤한 립서비스만 존재한다. 한층 더 심각한 것은 100명 이상 희생된 뒤의 프랑스 분위기다. ‘테러는 용서할 수 없지만, 그들의 생각은 이해한다’는 식의 양비론이 프랑스 지식인들 사이에서 주류적 사고로 자리 잡았다. 빅토르는 ‘오죽하면 테러까지?’라는 일방적 동조론도 들었다고 한다.

약자에 무심하고 차갑다고 비난할지 모르겠다. 필자는 결코 약육강식 예찬론자가 아니다. 그렇지만 지켜지기 어려운 약속으로 채워진 ‘약자 우선’ 세계관도 큰 문제라고 본다. 매년 프랑스 여행을 통해 실감하지만, 파리 전체가 ‘약자 우선’이란 명분하에 위선의 경연장으로 변해가고 있다. 유럽 대도시 전부가 그렇지만, 파리는 특히 더 심각하다. 바로 필자가 프랑스와 파리에서 멀어진 이유다. 노트르담 화재는 그런 현실 속에서 벌어진 상징적 사건이다. 파리가 보여준 도를 넘어선 위선에 대한 경고가 대화재라는 것이 빅토르의 해석이다. 밖으로 표현을 안 할 뿐, 비슷한 생각을 가진 프랑스인이 많다고 빅토르는 단언한다. 위선적 언행을 통해 스스로조차 속이는, 파리의 무지와 오만에 대한 심판이라는 것이다.

‘장미의 창’과 아난케

노트르담대성당은 파리를 찾는 한국인이라면 거의 대부분 방문하는 곳이다. 프랑스인만이 아니라 전 세계 모두에게 많은 추억과 기억을 남겨준 공간이기도 하다. 바로 옆의 센강과 더불어, 셰익스피어 서점도 노트르담으로 이어지는 명소다. 서쪽으로 15분 정도 걸어가면 1968년 학생운동으로 유명한 소르본대학도 만날 수 있다. 필자에게 있어 노트르담 일대를 둘러보는 것은 하루 종일 걸리는 ‘육체와 명상의 여정’ 같은 것이다. 프랑스혁명 당시 숨진 사람들의 시신이 쌓였던 센강에서부터 시작해 소르본대학의 동쪽 언덕으로 이어진 ‘팡테옹(Pantheon)’까지의 가로 세로 3㎞ 공간을 샅샅이 뒤진다. 팡테옹 주변은 파리 중심지임에도 불구하고 관광객과는 무관한 젊은 파리지앵만의 해방구다. 대학생들의 주머니 사정 때문이겠지만, 싸고도 실속 있는 레스토랑이나 카페, 미술관이 곳곳에 들어서 있다. 작고도 앙증스러운, 자동차 통행도 드문 파리만의 정취를 흠뻑 느낄 수 있는 골목이다. 노트르담은 그 같은 주변 환경을 전부 살펴본 뒤 찾는 최후의 안식처다. 명상을 하면서 쉴 수도 있고, 예수 탄생 때 동방박사가 선물로 올린 몰약과 유황의 냄새도 느낄 수 있다. 파리지앵, 아니 프랑스를 찾는 모든 사람들의 휴식공간인 셈이다. 노트르담 화재는 그 모든 기억들을 희미한 과거사로 바꿔놓은 참사다.

스테인드글라스는 고딕건축물의 특징 중 하나다. 빛을 실내로 끌어들이기 위한 통로로, 창문이 거의 없는 비잔틴 정교나 로마네스크 교회와 구별된다. 큰 창문이 있다는 것은 안전과 평화가 보장된다는 말이다. 이교도의 공격에서 자유로웠다는 의미다. 노트르담의 경우 ‘장미의 창(Rosace)’이라 불리는, 현란한 색상의 직경 9.6m 초대형 스테인드글라스를 자랑한다. 그러나 길이 130m, 폭 48m, 높이 35m에 달하는 내부공간 전체를 비추기에는 역부족이다. 교회 공간 전체가 어둡고도 흐리다. 고딕건축물의 또 다른 특징이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뾰족하고 뭔가 각이 선 구조로 이뤄져 있다. 프랑스는 12세기부터 시작된 유럽 고딕건축물의 원조국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진짜 원조는 이슬람대제국이다. 이슬람 통치하의 스페인 코르도바(Cordoba)에 파견된 프랑스 수도사들의 연구를 통해 탄생된 것이, 하늘로 치솟는 초대형 고딕건축물이다.

‘아난케(Ananke)’는 필자가 갖는 노트르담 이미지의 키워드다. 그리스어로 ‘운명(Fate)’이란 의미로 통한다. 행복·희망과는 무관한, 어둡고 차가우며 불행한 운명이다. 프랑스의 문호 빅토르 위고는 노트르담을 세계적 명소로 부상시킨 1등 공신이다. 위고는 1831년 ‘파리의 노트르담(Notre-Dame de Paris)’이란 제목의 책을 냈는데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로 떠오르면서 노트르담 역시 모두의 머리에 각인된다. 이후 영화로 수없이 개작되면서 ‘노트르담의 꼽추’라는 다른 이름도 갖게 된다. ‘아난케’란 말은 빅토르 위고 소설의 도입 부분에 나오는, 전체 소설의 내용을 하나로 압축한 복선(伏線)이다. ‘아난케’는 노트르담 대성당 벽에 새겨진 단어다. 소설 속에서 악의 대명사로 등장하는 클로드 프롤로 신부가 직접 새겨넣은 말이다. 집시 여성 에스메랄다를 만난 뒤 사랑에 빠지지만, 질투심에 눈이 멀어 사람까지 죽이는 인물이다. 이후 자신이 데려온 꼽추 콰지모도에게 살해당하는, 신의 사도로서의 비극적 운명이 ‘아난케’라는 단어 하나에 압축돼 있다. 그리스인에게 ‘아난케’는 ‘거미(Spider)’라는 말로도 통한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거미는 삼라만상 운명을 결정하는 존재다. 인간은 물론 신조차도 이미 펼쳐진 운명적 거미줄(Web)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메타포(Metaphor)인 셈이다.

노트르담대성당 화재 현장 인근에서 침통해하는 파리 시민들. ⓒphoto 뉴시스
노트르담대성당 화재 현장 인근에서 침통해하는 파리 시민들. ⓒphoto 뉴시스

‘파리는 불타는가’

‘아난케’는 프롤로 신부의 일탈만이 아니라, 파리의 위선에 대한 경구일지 모르겠다. 노트르담이 불에 탔지만 프랑스인 모두가 힘을 합쳐 재건축할 수 있다는 얘기도 흘러나온다. 프랑스인의 국가적 열정을 감안하면 가까운 시일 내에 복원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성당의 재건축에 앞서 할 일도 있다. 인류의 지성이라는 프랑스의 미래를 향한 업그레이드다. ‘약자 우선’이라는 명분을 앞세운 위선이 계속되는 한, 달콤한 수사로 채워진 프랑스판 ‘정치적 올바름’이 수정되지 않는 한, 비극적 ‘아난케’는 한층 더 증폭될 수 있다. 샤를리 에브도 사건에서 보듯, 프랑스의 ‘아난케’는 이미 노트르담 화재 이전부터 연속해서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12월 초 노란조끼 시위대에 의해 파괴된 개선문과 마리안 석상에 대한 끔찍한 기억도 새롭다. 프랑스혁명 후 마리안은 자유·평등·박애의 상징물로 통해왔다. 그런 프랑스의 자랑과 역사조차 부서지고 부정되는 것이 최근의 상황이다. 선을 넘어도 한참 넘은 상태다. 노트르담에까지 화가 미친 ‘아난케’라는 경구를 새겨야 한다.

1966년 전 세계를 감동시킨 ‘파리는 불타는가(Is Paris burning?)’라는 영화가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실화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파리를 불태우라는 히틀러의 방화 명령을 받은 독일 장군 디트리히(Dietrich von Choltitz)에 관한 영화다. 총통의 명령에 반해 방화를 하지 않고, 거꾸로 프랑스 레지스탕스에게 파리를 평화적으로 넘겨준 인물이다. 1966년은 전후 21년째 되던 해다. 침략자를 증오하기보다 파리를 보존해준 독일인에 대한 감사의 메시지가 영화 속에 넘친다.

영화에서 필자가 주목한 부분은 주제가다. 유튜브에 들어가보면 아마도 한국인 대부분이 알고 있을, 4분의 3박자 왈츠형의 경쾌한 음악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불타는 파리라고 하지만 음악은 너무도 천진난만하게 느껴진다. 보통 프랑스에서는 어린이용 회전목마를 돌릴 때 배경음악으로도 활용된다. 신기한 것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하늘에서 본 파리 전경이 경쾌한 아코디언 멜로디 주제가와 함께 등장한다. 항공촬영을 한 듯한데 노트르담을 비추는 시간이 가장 길다. 불에 탄 노트르담을 염두에 둔다면, 안타깝고도 슬프고도 기묘한 영상 메타포다.

‘2019년 4월, 파리는 불타는가?’라고 묻는다면 ‘예’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는 질투 천벌로서의 ‘아난케’를 맞이한 곳이 노트르담이라고 부연해서 설명할 듯하다. 그러나 프랑스 역사가 그러했듯이 시련을 극복하고 한층 더 아름다운 역사를 창조해낼 것이라 믿는다. 아코디언 왈츠곡에서처럼, 슬픔과 고통을 넘어선 희망과 환희가 프랑스의 올곧은 운명이기 때문이다. 화재로 인해 성당 안에 새겨진 ‘아난케’란 글자도 이미 사라졌을 것이다. 최근 2년 동안 거리를 둔 탓일까?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가 화재 현장을 가슴에 보듬은 채 찬미의 입맞춤을 하고 싶은 공간, 바로 파리의 노트르담대성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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