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산 이름이 적힌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작성한 국외 요시찰 대상 명단. ⓒphoto 표도르 째르치즈스키
이청산 이름이 적힌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작성한 국외 요시찰 대상 명단. ⓒphoto 표도르 째르치즈스키

김일성 전 북한 주석이 중국공산당에 입당할 당시 보증을 선 ‘이청산’의 존재가 밝혀졌다. ‘이청산’으로 추정되는 인물은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국외 요주의 인물’로 시찰해온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 안투현위원회 간부 이청산(李靑山)이다. 앞서 주간조선은 2551호(4월1일자)에서 김일성이 1941년 소련으로 월경한 직후 소련 당국으로부터 심사를 받을 때 자필로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력서를 최초 공개한 바 있다. 이 이력서에서 김일성은 “1931년 동북 펑톈성 안투현에서 중공(중국공산당) 조직에 가입했다”며 “중국공산당 청년단 활동 당해에 중공 동만당(동만주당) 안투위에 가입했고, 보증인은 이청산(李靑山)”이라고 적었다. 하지만 김일성은 공식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등에서 ‘입당 보증인’의 존재를 한 번도 공개한 적이 없어 이청산의 정체는 베일에 가려졌었다.

러시아 당국에 기밀해제를 요청해 김일성의 이력서를 최초 입수해서 주간조선에 공개한 러시아 학자 표도르 째르치즈스키(한국명 이휘성) 박사(국민대 유라시아연구소 연구원)는 최근 김일성 입당 보증인 이청산의 정체를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1934년(쇼와 9년) 작성한 ‘국외 용의 조선인 명부’에서 확인했다. 여기에는 이청산이란 이름과 함께, 주거는 ‘펑톈성 안투현’, 직위는 ‘중공당 만주성위, 안투현위 간부’라고 간략하게 적혀 있다. 이 내용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정리한 한국근현대인물 데이터베이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총독부 기록에서 찾아낸 이청산

표도르 박사는 “익명을 요구한 한 연구자의 도움으로 이청산의 존재를 확인했다”며 “김일성의 보증인 이청산과 모든 정보가 맞아서 저도 우리 아버지(콘스탄틴 째르치즈스키 모스크바국립대 중국역사학과 교수)도 조선총독부 경무국 자료의 이청산이 곧 김일성의 보증인이라고 본다”고 밝혔다.

이번에 표도르 박사가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중공 안투현위원회 간부 이청산은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와 자필 이력서에 등장하는 이청산과 여러모로 맞아떨어진다. 김일성은 1941년 작성된 자필 이력서에서 “펑톈성 안투현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고 밝혔는데 그 무렵 이청산도 중공 안투현위원회에서 간부로 일하고 있었다. ‘세기와 더불어’에 나오는 “리청산과 같이 성실하고 과묵한 로(老)혁명가”란 언급과도 부합한다. 총독부 요시찰 대상 기록에 등장하는 이청산의 나이는 1933년(쇼와 8년) 당시 33세로, 1900년생 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 1912년생인 김일성보다 12살이 많다. ‘로혁명가’는 ‘선배혁명가’ 정도의 뜻이다.

표도르 박사가 찾아낸 이청산 관련 기록은 ‘세기와 더불어’에 등장하는 ‘겨울 명월구(明月溝)회의(1931년)’ 기록과도 일치한다. 명월구회의는 중국공산당 동만(동만주)특위 위원장으로 있던 통창롱(童長榮)이 소집한 회의다. 1931년 5월과 12월 두 차례 열렸다. 통칭 1931년 5월 회의를 ‘봄 명월구회의’, 12월 회의를 ‘겨울 명월구회의’라고 불러왔다. 북한에서는 일본이 만주사변(1931년 9월 18일)을 일으켜 만주침략을 본격화한 직후 소집된 ‘겨울 명월구회의’를 “항일 빨치산 투쟁의 방향을 설정했다”며 중시해왔다. 이 회의 참석자 중 한 명인 김일성을 내세운 ‘명월구회의 기념화’ ‘명월구회의 기념우표’를 발행할 정도로 대대적으로 기념해왔다.

‘세기와 더불어’의 명월구회의 언급 부분에도 ‘이청산(리청산이라고 표기됨)’이란 이름이 수차례 나온다. 우선 이청산을 포함해 “40여명의 청년투사들이 (회의에) 참가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또 “1931년 5월 중순 옹성라자에 있는 리청산의 집에서 당 및 공청 간부회의를 열었다” “회의를 실속 있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본회의에 앞서 리청산의 집에서 예비회의를 하였다” “겨울 명월구회의 때 리청산이네 집에서 표명한 리상(이상)도 교단에 서는 것이였다” “리청산이네 집 웃방에서 목침을 베고 드러누워 밤을 새워가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등의 대목이 나온다.

‘세기와 더불어’에는 ‘옹구(甕區) 당위원회 위원’이란 이청산의 직책도 언급돼 있다. 명월구회의 개최지는 지금의 지린성 옌볜조선족자치주 안투현 명월진이었는데 한복판에는 성벽만큼이나 높은 바윗돌이 서 있다. 이를 ‘옹성라자(甕聲啦子)’라고 하는데, 라자는 만주어로 ‘바위벼랑’이란 뜻이다. 실제 현지에는 중국공산당 안투현위원회와 안투현인민정부가 2013년에 건립한 ‘명월구(옹성라자) 회의기념비’가 서 있다. 이청산이 옹구 당위원회 위원이었다는 기록과 명월구회의가 열렸던 ‘옹성라자’라는 지역이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 결국 김일성이 소련 월경 시 작성한 이력서에서 밝힌 중국공산당 입당 시점인 1931년이 ‘겨울 명월구회의’ 개최 시기(1931년)와 겹치는 것으로 봤을 때, 김일성의 중국공산당 입당은 ‘겨울 명월구회의’가 열렸을 때를 전후해 명월구에 있던 리청산의 집에서 집주인 리청산의 보증으로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겨울 명월구회의 이듬해 김일성은 자필 이력서에서 밝혔듯이 “1932년 봄 중국공산당 동만주 특별위원회 통창롱의 지시에 따라 ‘구국군(救国軍·왕더린 부대)’에 입대해 선전원으로 일했다”. 구국군은 마적 출신 만주군벌 장쭤린(張作霖)과 그 아들 장쉐량(張學良)이 이끌던 동북군이 만주에서 퇴각한 뒤 남은 잔당으로, 동북군 출신 왕더린(王德林)이 이끌었다.

주간조선 2551호
주간조선 2551호

‘세기와 더불어’에 등장하는 이청산

만주 지역의 중국공산당 간부로 활동한 이청산은 당시 소련 측과도 어느 정도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슷한 시기 만주에서 활동한 조선혁명군 총사령관을 지낸 양세봉 장군의 평전에도 이청산이란 이름이 나온다. 중국 랴오닝성 사회과학원 민족연구중심 조문기 연구원이 펴낸 양세봉 장군의 평전에 따르면, “양세봉은 1930년 전후 고려공산당과 맞서 유혈사태가 초래되었던 일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쳤다. 공산당에 대해 좀 더 알기 위해 이청산 등 5명을 소련에 파견하고 양징위(楊靖宇)와도 신중히 접촉했다”라고 돼 있다. 중국인인 양징위는 만주 일대에서 중국인과 조선인 혼성부대로 활동했던 동북항일연군 사령관으로, 김일성 역시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했다. 동북항일연군의 잔존 병력은 소련 월경 후 ‘제88보병여단’으로 편성되는데 조선인민군의 모태가 됐다. 표도르 박사는 “88여단은 소련군 유일의 외인 부대”라고 했다.

이청산의 정확한 생몰연도는 알 수 없다. 조선총독부 경무국 기록에는 이름, 나이, 주거, 직위 정도만 기록돼 있을 뿐 별명과 본적까지는 기록돼 있지 있다. 하지만 중국공산당 지역 간부로서 소련공산당과도 연결돼 있었다는 당시 기록들에 미뤄보면 김일성의 운명을 바꾸는 소련행(行)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줬을 수 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물론 이청산이 김일성이 소련으로 건너갈 때까지 살아있었다는 전제에서다. 다만 1941년 김일성을 심사한 소련 조사관들은 “이청산은 우리에게 모르는 사람이다”라고 말한 것으로 조사참고서에 기록돼 있다.

표도르 박사는 “1934년 이후 기록이 사라지는 것으로 보아 이청산이 그 이후 사망했을 가능성이 있다”며 “정확한 사망연도나 무덤의 위치 등은 아직 알려진 바가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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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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