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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회/르포
[2560호] 2019.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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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기획 | 나는 체인지메이커다]실리콘밸리의 한인 기업 에누마 인류 문맹퇴치 해결사 되다

photo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1000만달러(120억원) 상금의 주인공은 누가 될 것인가? 인류의 문맹 퇴치를 과제로 내건 ‘글로벌 러닝 엑스프라이즈’의 최종 우승자가 지난 5월 16일(한국시각) 미국 LA 플레이야비스타에서 가려졌다. 학교도 선생님도 없는 환경에서 태블릿만 가지고 아이들이 스스로 글을 읽고 셈을 할 수 있는 솔루션을 찾아라! 이 미션을 내건 글로벌 러닝 엑스프라이즈는 장장 5년에 걸친 대장정이었다. 전 세계에서 198개 팀이 도전해 최종 결선에 오른 것은 5개 팀. 2017년 12월부터 지난 15개월간 아프리카 탄자니아 남쪽 음투와라 지역에서 필드 테스트가 진행됐다. 비슷한 교육 환경인 170개 마을의 7~10세 아이들을 다섯 그룹으로 나누고, 5개 팀의 학습 소프트웨어를 사용하게 한 후 가장 뛰어난 학습성취를 이끌어낸 팀이 우승을 차지하는 방식이었다. 총 상금 1500만달러(본선 진출팀에 각각 100만달러씩)에다 필드 테스트 진행비까지 포함하면 수백억원이 투입된 엄청난 프로젝트였다.
   
   이날 시상은 이번 프로젝트를 위해 상금 1500만달러를 내놓은 테슬라모터스의 CEO 일론 머스크가 맡았다. 일론 머스크가 봉투를 열 때까지 최종 성적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조마조마하게 발표를 기다리던 5개 팀에는 한국인 팀도 포함돼 있었다. 이수인·이건호 부부가 실리콘밸리에서 만든 교육 스타트업 ‘에누마’였다. 게임 방식을 적용한 학습 애플리케이션 ‘킷킷스쿨(KitKit School)’로 도전한 ‘에누마’는 강력한 우승 후보였다. 봉투를 연 일론 머스크의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아, 두 팀이 성적이 같습니다. 우승자가 둘입니다.”
   
   공동 수상자는 ‘에누마’와 영국의 비영리단체인 ‘원빌리언’이었다. 시상식이 끝나고 한국에 막 들어온 이수인(42) 대표를 지난 5월 21일 에누마 한국 사무소가 있는 서울 성수동 헤이그라운드에서 만났다.
   
   “우승 자신이 있었지만 원빌리언의 필드 성적이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안심할 수 없었어요. 그런데 우승 트로피가 보란 듯이 한 개가 놓여 있었어요. 공동우승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우승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학습 패러다임을 뒤집다
   
   에누마의 ‘킷킷스쿨’은 기존의 학습 패러다임을 뒤집었다. 대부분의 학습 프로그램이 평균적인 아이가 기준이라면 ‘킷킷스쿨’은 ‘공부 못하는 아이’가 기준이다. 예를 들면 ‘정답을 맞힌 경우 다음 단계는?’이 일반적으로 애플리케이션을 설계할 때 던지는 핵심질문이라면, 에누마는 ‘정답을 틀렸을 경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를 핵심 질문으로 삼는다. 접근 자체가 달랐다. 학습장애가 있거나 배움이 느린 아이들은? 학습 속도를 줄여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지만 ‘킷킷스쿨’은 속도를 줄이면 흥미를 잃고 배움에 대한 저항감만 커진다고 생각했다. 대신 다른 방식으로 도전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학습 환경에 한 번도 노출된 적이 없는 아이나 학습장애, 자폐, 시각장애 등 다양한 문제를 가진 아이들의 관점에서 장애가 되는 요인들을 하나씩 제거해나가면서 더 많이 배우는 것보다 아이들이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데 중점을 두었다. “‘세계 최고’라는 자신이 있었지만 에누마의 ‘킷킷스쿨’은 지금까지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은 방식이었습니다. 에누마의 학습철학이 과연 현장에서 수치로 확인받을 수 있을지 필드 테스트가 진행되는 내내 조마조마했습니다.”
   
   결선은 시작 전 성적과 끝난 후 성적을 비교해 가장 학업성취도가 높은 팀이 우승을 차지하는 방식이었다. 경쟁자인 원빌리언의 제품은 기존의 학습원리대로 교사가 설명하면서 가르치는 프로그램이다. ‘아이의 정서와 자기주도에 초점을 맞춘 게임기반 학습’인 킷킷스쿨의 새로운 방식이 오직 성적만 가지고 우열을 겨루는 경쟁에서 어떤 결과를 낼지 알 수 없었다.
   
   에누마의 ‘킷킷스쿨’을 비롯한 모든 결선 진출작들은 ‘오픈소스’로 공개된다. ‘글로벌 러닝 엑스프라이즈’가 처음부터 내건 조건이었다. 다양한 언어로 전 세계 2억5000만명의 문맹 아이들에게 널리 확산되게 하기 위해서다. 이미 4~5개 나라의 개발팀들이 이 소프트웨어들을 자국어로 바꾸는 일을 진행하고 있고 NGO들도 나서고 있다. 이 대표는 “NGO들로부터 에누마와 함께 소프트웨어를 활용할 방법을 논의해보자는 제안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엑스프라이즈(XPRIZE)’ 재단이 인간, 그것도 어린이를 대상으로 내건 프로젝트는 ‘글로벌 러닝 엑스프라이즈’가 처음이다. ‘엑스프라이즈’는 인류가 직면한 문제들을 혁신적인 기술로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만들어진 세계 최대 비영리 재단이다. 1995년 실리콘밸리에서 미래학자 피터 디아만티스가 창립했다. 민간 우주선 개발을 내건 ‘안사리 엑스프라이즈’ ‘물 부족 해결을 위한 엑스프라이즈’ 등이 대표 프로젝트였다. 세계적 석학들이 머리를 맞대고 인류가 풀어야 할 긴급한 문제들을 논의한 후, 대회의 이름을 정하고 펀딩을 받는다. 기술의 난이도에 따라 상금은 달라진다.
   
   
▲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 지난 5월 16일 ‘글로벌 러닝 엑스프라이즈’에서 에누마가 공동우승을 차지한 후 이수인 대표가 남편인 이건호 공동창립자(왼쪽 두 번째), 시상자인 일론 머스크 테슬라모터스 CEO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글로벌 러닝 엑스프라이즈’ 결선인 아프리카 탄자니아 필드 테스트에서 아이들이 태블릿으로 학습을 하고 있다. ‘엑스프라이즈’ 측에서 학습용 태블릿을 충전하기 위해 마을마다 태양광을 설치하고 있다. photo 에누마

   아프리카 오지서도 혼자 공부할 수 있게
   
   ‘글로벌 러닝 엑스프라이즈’의 결선 과정인 필드 테스트는 흥미로웠다. 유네스코와 WFP(세계식량계획)의 지원을 받아 탄자니아 마을을 선정한 후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아이들을 5개 그룹으로 나눠 5개 프로그램 중 하나가 들어간 태블릿을 던져놓고 15개월 동안 자유롭게 사용하도록 했다. 아이들은 93%가 한 단어도 읽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마을에 태양광 충전 시설을 만들고 주민을 관리자로 두었다. 충전소까지 걸어서 40분씩 와야 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학습을 위해 먼 길을 걸어올 의지가 있는지도 엑스프라이즈 실험의 일부였다. 진행요원만 600여명이 투입됐다고 한다. 그동안 참가사들은 현장에 접근할 수 없었다. 2주에 한 번씩 USB에 담긴 아이들의 학습 기록을 받아 사용 패턴을 짐작할 뿐이었다. 업데이트 기회는 단 2번이 주어졌다. 현지 문화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생각지도 못한 문제들이 발생했다. 태블릿이라고는 처음 보는 아이들이 화면만 쳐다보고 사용을 안 했다. 어려서부터 물건에 손을 대서는 안 된다는 말을 듣고 자란 탓이었다. 그래서 ‘마음껏 놀아봐’라고 말해주는 화면을 넣어야 했다. 기계가 무서워 우는 아이들도 있었고 “병이 걸린다” “주술이다”면서 프로그램 참가를 거부한 부모들도 있었다고 한다.
   
   프로그램에 넣을 소재 선택도 시행착오가 있었다. 아프리카 아이들이 사자나 기린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사과가 뭔지도 몰랐다. TV, 책은 본 적이 없으니 마을에서 볼 수 있는 소재들을 선택해야 했다. 팀원들을 아프리카로 투입해 현지 문화를 배우고 콘텐츠에 반영했다. 킷킷스쿨에는 읽기, 쓰기, 수학, 그림그리기 등이 다 들어있다. 태블릿 안에 학교가 들어있는 것이다. 그러나 프로그램 속에 선생님은 없다. 아이가 스스로 속도를 정하고 수업을 주도해나간다. 엑스프라이즈 측은 이 실험에 참가한 아이들이 평균적으로 하루에 1시간씩 태블릿을 사용하고 학교를 1년 다닌 것과 같은 효과를 거뒀다고 발표했다. ‘킷킷스쿨’을 한 아이들은 이보다 더 오랜 시간 학습하고 더 높은 성적을 냈다.
   
   “현장 사진들을 보면 아이들이 학교에 가는 것처럼 같이 모여 플레이를 하고 학생이 됐다고 자랑스러워했습니다. 테스트가 시작되기 전 꿈을 묻는 질문에 농부, 운전수라고 답했던 아이들이 테스트가 끝난 후에는 교사, 의사, 아티스트라고 답했습니다. 그만큼 세계가 넓어진 겁니다. 제가 이루고 싶은 것은 단순합니다. 학습을 할 때 너무 괴로워서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는 사람들,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을 기술이 도와줄 수 있습니다.”
   
   아프리카 오지에 학교를 세우고 운영하려면 교사가 필요하다. 교사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곳에서 문맹퇴치를 위해 디지털을 활용하는 실험을 위해 유네스코 등에서 지난 몇십 년 동안 숱하게 했지만 지금까지 성공한 적이 없었다. 에누마가 그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엑스프라이즈 결선 진출 때 심사위원 중 한 명은 ‘킷킷스쿨’에 대해 “이 분야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제품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아픈 아이의 문제를 세상의 문제로 확대하다
   
   에누마는 이수인 대표의 개인적인 문제에서 출발했다. 서울대 조소과를 졸업한 이 대표는 엔씨소프트에서 게임 디자이너로 활약했다. 남편인 이건호씨도 엔씨소프트 출신으로 우리나라 최고의 서버 프로그래머로 꼽힌다. 고등학생 때 세계 정보올림피아드에서 금메달을 수상한 수재다. 이건호씨가 미국 버클리대학에서 컴퓨터공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을 때 첫아이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 수업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지루하게 견뎌야 할 시간이었다.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에 절망하고 있을 때 주치의의 한마디가 이 대표를 깨웠다. “어떤 일을 하느냐 묻기에 비디오게임을 만든다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의사가 그러는 겁니다. 우와, 멋지다. 여기 있는 아이들에게 진짜 필요한 기술인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이 대표는 뭘 해야 할지 깨달았다. 게임 개발에는 돈과 기술을 엄청나게 쏟아부으면서 학습장애아들을 위한 교육 분야는 돈이 안되니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이 대표는 게임을 활용해 ‘장애아를 위한 학습 앱’을 만들었다. 어느 날 실리콘밸리의 유명한 VC(벤처캐피털) 마누 쿠마르가 앱을 보고 연락을 했다. “창업을 하면 내가 첫 번째 수표를 써주겠다”는 것이었다. 박사를 마친 남편도 스카우트 제의들을 뒤로하고 공동창업자로 나섰다. 에누마는 ‘에누머레이트(Enumerate)’에서 따온 것으로 ‘한 명 한 명 아이의 이름을 불러 센다’는 뜻이다. 모든 아이들을 위한 모바일 교육 솔루션을 만들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에누마의 첫 번째 작품은 2014년 출시한 ‘토도수학’이다. 유치원부터 초등학교 2학년 수준으로 게임하듯 셈을 익히면서 레벨을 높여간다. ‘수포자(수학포기자)’였던 이 대표의 경험도 녹아 있다. 토도수학에 대한 반응은 뜨거웠다. 10개 언어 21개국에서 애플 앱스토어 특수교육 카테고리 1위를 차지하면서 ‘세계 최고’로 인정받았다. 미국 1400개 교실에서도 교재로 사용하고 있다. 소프트뱅크벤처스, 한국 VC들로부터 누적 투자액 100억원을 유치하면서 화제를 불렀다.
   
   ‘글로벌 러닝 엑스프라이즈’ 공고를 보는 순간 이 대표는 ‘이건 바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사실 해야 하는 이유보다 안 해야 할 이유들이 훨씬 많았다. “투자를 받았으니 수익을 내야 하는데 5년짜리 경쟁에 나갈 정신이 어디 있냐, 토도수학도 만들기 힘든데 제품을 또 하나 만들 힘이 어디 있냐, 영리 회사에서 IP(지적재산권)가 자산인데 오픈소스가 조건인 대회라니, 경쟁에 실패하면 회사가 위험해질 텐데. 그런데도 하고 싶었어요.” 팀원들한테 “미안한데 하고 싶다”고 했더니 “그러려고 만든 회사잖아”라는 답이 돌아왔다. “정말 무섭고 두려웠습니다. 제 자신에게도 옳은 방향인지 수없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회사의 미래, 직원과 투자자에 대한 책임의 무게보다 사명감이 이 대표를 움직였다.
   
   
   영리기업과 소셜 영역 사이에서
   
   킷킷스쿨에는 교육학 석사, 특수교육 교사 등 최고의 전문가들이 붙었다. 엔씨소프트의 리니지 게임 첫 기획자인 김형진 상무도 2017년 합류했다. 이수인·이건호 부부와 김형진 상무는 모두 서울대 동기로 게임동아리 친구 사이다. 엑스프라이즈 결선이 시작되면서 이 대표의 SOS를 받은 김형진 상무는 딱 하루 고민하고 20여년 다닌 엔씨소프트를 떠나 에누마에 합류했다. 그의 이직은 당시 게임업계의 화제였다.
   
   엑스프라이즈가 진행되는 5년 동안 숱한 고비가 있었고, 그걸 이겨낼 만큼 힘을 주는 일도 생겼다. 그중 가장 큰 힘은 2017년 세계 혁신가들을 지원하는 ‘아쇼카 펠로’로 선정된 것이다. 비영리 혁신가들을 지원하는 아쇼카가 영리회사의 이수인 대표를 펠로로 선정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사회적 임팩트를 추구하는 이 대표의 진정성을 인정한 것이었다. 한국아쇼카(대표 이혜영)는 “경쟁력 없고 낡은 제품에 머물러 있던 특수교육 시장을 최고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아이들 한 명 한 명이 소외되지 않도록 기초교육의 패러다임을 아동 중심으로 바꾸었다”고 평했다.
   
   펠로로 선정되고 아쇼카 측에서 3년간 생활비가 지원된 덕분에 부부는 두 아이의 육아 걱정 없이 엑스프라이즈에 전력할 수 있었다. 그동안 부부는 한 명분의 월급만 겨우 받고 ‘토도수학’에서 번 돈을 ‘킷킷스쿨’에 쏟아부었다. 현재 에누마 직원은 실리콘밸리에 11명, 한국에 30여명이 있다. 코이카(KOICA·한국국제협력단)의 도움도 컸다. 코이카의 CTS(혁신적 기술 프로그램) 파트너로 선정돼 엑스프라이즈 경쟁 지역 밖에 있는 아프리카의 다른 지역에서 테스트를 한 덕분에 킷킷스쿨을 업그레이드할 수 있었다.
   
   이 대표는 엑스프라이즈 수상의 의미를 이렇게 말했다. “성공한 조각가의 아래에는 부서진 돌들의 산이 있다. 내가 정상에 서 있을 수 있고 돌무더기가 될 수 있지만 그 하나하나가 의미가 있다.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산에 일조하고 싶다.”
   
   이 대표는 영리기업과 소셜 영역 사이에서 에누마가 걸어가고 있는 길에 좀 더 많은 사람과 새로운 기술이 함께하길 바란다. 성공한 기업이 나와야 시장이 커진다. 에누마가 그 성공모델이 되고 싶다는 것이 이 대표의 욕심이다. 그 욕심이 지금도 수많은 아이들의 미래를 바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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