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KBS의 상황은 엄중하다 못해 곧 파국을 맞을 것 같은 백척간두의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신뢰도, 영향력, 경쟁력 등 모든 지표가 급전직하하고 있고, 경영 성과는 날개 없는 추락을 하고 있습니다. 재난방송 주관방송사라는 독점적인 타이틀도 빼앗기고, ‘9시뉴스’의 시청률은 한 자릿수로 고착화되고 있습니다.”

지난 6월 4일 KBS 온라인 사내게시판인 KOBIS에 올라온 ‘KBS 소수이사 성명’의 일부다. 전체 11명 이사 중 서재석·천영식·황우섭 3명의 이사들이 함께 낸 성명이다. 성명을 올린 지 일주일 만인 지난 6월 11일 이 글에 공감을 표한 추천수는 355개에 달했다. 올해 KOBIS에 올라온 게시물 중에서 추천수가 가장 많다. KBS 전체 직원은 전국적으로 4500명 정도지만 대부분 사내게시판에서 특별한 활동을 하지 않는 편이다. 때문에 이 성명이 받은 추천수가 이례적이라는 말이 내부에서 나온다. 천영식 KBS 이사는 기자와 만나 “KBS 직원들이 일반적으로 사내게시판의 글에 호응을 잘 하지 않기 때문에 이 정도의 추천수는 매우 이례적으로 많은 것”이라며 “KBS 직원들의 위기의식이 추천수로 나타난 것”이라고 말했다. 사내게시판에 적힌 글은 KBS 직원들만 읽고 공감을 표할 수 있다.

KBS 소수이사들이 게시판에 성명을 올리기 하루 전인 6월 3일에는 KBS 새노조(민주노총 언론노조 KBS본부) 역시 ‘일상의 위기를 넘어 이제는 위기의 일상화’라는 제목으로 발행한 노보를 통해 올해 악화된 경영실적을 지적하고 경영진의 방만경영을 질타했다. 노보에 공개된 지표에 따르면 KBS의 올 1~4월까지 4개월간 당기손익은 680억원 적자다. 수입은 약 4102억원인데 비용은 약 4782억원이다. 광고나 콘텐츠 판매 수익이 뚝 떨어진 게 가장 큰 원인이다. 노보는 “경영 지표와 시청률 지표 외에도 이상 징후는 한두 개가 아니다”라며 “국내 언론사 최초 문재인 대통령과의 단독 인터뷰라는 빅 이벤트도 살려내지 못했고, 사내 구성원 사이의 갈등도 잦다”고 지적했다.

지난 3월에는 KBS 내 PD협회도 경영진을 질타하는 비슷한 내용의 성명을 냈는데 이 성명 역시 추천 342개를 받았다.

양승동 KBS 사장(왼쪽에서 세 번째)과 경영진. ⓒphoto 뉴시스
양승동 KBS 사장(왼쪽에서 세 번째)과 경영진. ⓒphoto 뉴시스

올 1분기 680억원 적자

경영진을 질타하는 KBS 내부의 목소리는 이념이나 정치 성향이 완전히 다른 사내 집단들 사이에서 이구동성으로 터져나오고 있다. 직원수 4500명에 달하는 KBS에는 총 3개의 노조가 있다. KBS 새노조, KBS 노동조합, KBS 공영방송노조 등이다. KBS 새노조의 조합원 수는 2017년부터 2018년까지 총파업을 거치며 2200명을 넘어섰다. KBS 노동조합과 공영방송노조의 조합원 수는 각각 1700명, 40명 정도다. 이번에 경영진을 비판하는 성명을 낸 새노조는 민주노총 소속으로 상대적으로 현 정권에 우호적인 성향이다.

반면 성명을 낸 서재석·천영식·황우섭 이사는 자유한국당 등 야권 추천으로 임명된 이사들이다. 현 정권에는 비판적이다. KBS 이사회는 총 11명으로 구성돼 있는데 7명이 여권 추천 이사고, 4명이 야권 추천(자유한국당 3명, 바른미래당 1명) 이사다. 3월에 KBS 경영진을 비판하는 성명을 낸 PD협회는 KBS 소속 PD들이 모여서 만든 조직으로 소수이사나 새노조와는 달리 이렇다 할 정치색이 없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념이나 정치 성향과 무관하게 KBS 내부에서 경영진을 향해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가 동시다발적으로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KBS의 최근 경영 상황이 심각하게 악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통상 KBS의 월 광고매출은 200억원 안팎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중에서 연초인 1월부터 3월까지는 전통적인 비수기로, 광고매출은 전반적으로 상저하고(上低下高) 형태를 띤다는 것이 KBS 이사들의 설명이다. 천영식 이사는 “4월에 보통 400억원쯤 하면서 1분기 악화된 실적을 만회하는데 올해는 4월에도 200억원 조금 넘는 정도 수준으로 광고수익이 급전직하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4월 양승동 사장 취임 후 계속되어온 경영실적 악화는 투자가 많아지거나 지출이 늘어나서 발생한 것이라기보다는 수익이 하락해서 발생했다는 게 KBS 소수이사들의 설명이다. 수년 전부터 예고된 넷플릭스 등 글로벌 OTT(Over The Top·온라인동영상제공서비스) 사업자들의 ‘습격’과 종합편성채널들의 약진으로 인한 시청자 감소가 근본 원인인데, 여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이 원인이라는 지적이다.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스트리밍)를 이용하는 국내 시청자들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KBS 메인뉴스 시청률도 꾸준히 하락하고 있다. 조사업체 닐슨코리아에 따르면 KBS의 메인뉴스인 ‘9시뉴스’ 시청률은 2016년 16.6%를 정점으로 급격히 하락해 올해 11.2%까지 떨어졌다. 주말뉴스 시청률은 8.8%로 한 자릿수다. 5월 25일 토요일에는 7.1%의 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광고매출도 하락세다. 지난 2월 광고매출은 150억원 수준으로, 140억원 수준으로 알려진 종합편성채널 JTBC의 광고매출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KBS 월 광고매출은 200억원 안팎으로 알려졌다. 일부 내부 구성원들 사이에서는 조만간 광고매출이 JTBC에 따라잡힐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천영식 이사는 “분기별로 이사들에게 경영 보고를 할 때도 있고 안 할 때도 있는데 이번에는 하지 않아서 우리도 노보를 보고 KBS의 경영상태가 심각하다는 걸 알았다”고 말했다. KBS 새노조에 따르면 KBS의 1분기 광고는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37%나 감소했다. 21%가 감소한 SBS, 28% 남짓 감소한 MBC보다도 훨씬 큰 감소폭이다. KBS 새노조 성명의 제목대로 ‘일상의 위기를 넘어 위기의 일상화’인 상황이다. 3인의 소수이사도 성명에서 “적어도 위기의식만큼은 모든 구성원에게 골고루 퍼져나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수신료 인상 가능성 있어”

새로운 흥행 예능프로그램이 수년째 가뭄인 점도 문제로 꼽힌다. KBS 예능프로그램 중 시청률 1위를 기록해온 ‘1박2일’을 제외하면 요즘 KBS 예능프로그램 중에는 히트작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KBS 예능프로그램들이 경쟁사들에 비해 젊은층으로부터 외면받아온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KBS 예능프로그램 중 부동의 시청률 1위 자리를 지키던 ‘1박2일’은 2007년 방영을 시작해 12년간 이어지다가 지난 3월 종영했다. 대부분의 방송사들의 경우 황금시간대 히트작 프로그램이 광고매출의 상당 부분을 좌우한다.

KBS가 국가 기간 방송사와 공영방송으로서 지니던 브랜드 이미지의 추락이 근본적인 문제라는 지적도 있다. ‘오늘밤 김제동’ ‘저널리즘 토크쇼 J’ 같은 정파성이 강한 프로그램이 편성·방영되면서 시청자들에게 공영방송으로서의 이미지보다 정권에 따라 논조가 바뀌는 방송이라는 이미지가 강해지면서 발생하는 문제라는 지적이다. 천영식 이사는 “공영방송 논조가 정권에 따라 바뀌면서 시청자 사이에 공영방송으로서의 브랜드 이미지가 추락하고 있다는 점이 가장 근본적인 문제”라고 말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시절의 ‘적폐청산’에 치중한 나머지 조직 전체가 과거에 붙잡혀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이 경영 악화의 한 원인이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KBS 내부에 설치된 ‘진실과 미래위원회(진미위)’는 공영방송에 만들어진 이른바 ‘적폐청산기구’에 해당한다. 지난해 6월부터 정필모 KBS 부사장이 위원장을 맡고 현직 기자와 PD 10여명이 사무처 조직을 구성해 적폐청산 작업을 벌여왔다. 황우섭 이사는 기자와 전화통화에서 “경영실적 악화를 막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녀도 모자랄 판에 경영을 제대로 할 생각은 않고 과거에만 붙잡혀 있다”고 비판했다.

진미위 활동과 관련해 양승동 사장은 최근 고용노동부로부터 단체협약 및 근로기준법 위반 혐의와 관련해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되기도 했다. KBS 측은 당시 성명을 내 “(공영노조가 제기한) 진미위 (폐지) 가처분 이의신청에 대한 항고가 진행 중이라 사건에 대한 결론이 아직 나지 않았다. 서울고법에서 진미위 운영규정이 취업 규칙인지와, 진미위 운영규정 제정 과정에서 적법하게 의견을 수렴했는지에 대한 심리가 진행 중”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결국 문제는 현 KBS 경영진의 능력으로 요약된다. 천영식 이사는 “임시직들의 일반직 전환과 신규채용 증가로 인건비는 증가하는데 광고수익은 감소하고 있다”며 “소위 ‘지상파의 위기’는 하루이틀 제기된 우려가 아닌데 이미 잘 알려진 위기에도 대응하지 않은 경영진의 무능이 근본 문제”라고 했다. 천 이사에 따르면 KBS가 지출하는 연간 비용 중 40% 정도가 인건비로 나간다고 한다. KBS 경영진들은 현재 방송통신위원회 등을 상대로 꾸준히 지상파 중간광고 도입을 주장하고 있다.

이처럼 KBS 내부는 들썩이고 있지만 이러한 내부 사정이 아직까지 외부에서는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KBS에서 벌어지는 이 같은 문제는 결국 국민들의 부담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현재 KBS 수신료는 가구당 2500원으로, 방송법에 따라 전기요금과 함께 매월 부과된다. 익명을 요구한 KBS의 한 이사는 “경영진의 심리 내면에는 경영이 어려워지면 결국 수신료를 올리면 된다는 심리가 깔려 있는 게 아닌가 한다”고 말했다.

배용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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