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된 여관에선 새로운 전시가 이어진다. ‘통의동보안여관’의 2층에서 퍼포먼스 작가 박승원의 작품 아래 최성우 대표가 앉아 있다.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80년 된 여관에선 새로운 전시가 이어진다. ‘통의동보안여관’의 2층에서 퍼포먼스 작가 박승원의 작품 아래 최성우 대표가 앉아 있다.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10여년 전, 서울 광화문 일대에 불도저 소리가 요란했다. 종로 1가 곳곳에는 공사용 가림막이 세워졌다. 600여년 역사를 간직한 ‘피맛골’도 그 뒤에서 먼지 속으로 사라졌다. 그 자리엔 현재 고층 오피스빌딩들이 올라서 있다. 종로뿐만 아니라 서울은 재개발, 재정비라는 이름으로 헌것 부수고 새것을 지어 올리기 바빴다.

대형 타워크레인이 종로 일대에 세워지기 시작한 2007년. 서울 종로구 통의동에서는 일제강점기에 생긴 ‘보안여관’이 다시 문을 열었다. 70년 넘게 여관의 기능을 수행하면서 문화예술가들의 아지트로, 야근에 지친 정부부처 관리들의 숙소로 수많은 기억과 사연을 품은 곳이다. 2004년 여관의 수명을 다하고 문을 닫은 낡은 적벽돌의 2층 건물은 언제 허물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태였다. 용도폐기된 채 먼지를 뒤집어쓴 ‘보안여관’의 간판을 다시 건 사람은 최성우 ‘통의동보안여관’ 대표였다. 최 대표는 보안여관에 통의동을 붙여 이름을 바꾸고 사람이 묵기 힘든 이곳을 문화가 묵는 곳, 즉 전시공간으로 만들었다. 벽이 허물어지고 골조가 드러난 여관으로 예술을 불러들였다.

도심 개발 한복판에서 살아남은 건물의 울림은 의외로 컸다. 역사와 시간이 점점 거세되고 있는 도시 안에서 오래된 것들이 어떻게 쓰이고, 어떤 역할을 하는지 묵직한 메시지와 함께 생각할 지점을 만들어주었다. 낡은 건물의 낯선 행보는 금방 화제가 됐다. 언론에 오르내리고 서촌의 핫플레이스로 떠올랐다. 그리고 얼마 후 도시개발이라는 단어 대신 ‘도시재생’이 우리 사회의 키워드로 떠올랐다. 오랜 주택 등을 복합문화공간으로 활용하는 것도 새로운 트렌드가 됐다. 그 대열의 맨 앞에서 ‘보안여관’은 과거를 현재로 소환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냈다.

2년여 전, 보안여관 옆에는 4층 높이의 닮은꼴 건물이 세워졌다. 복합문화공간 ‘보안1942’이다. 보안여관의 시작과 함께한다는 뜻이다. 보안여관의 역사에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미스터리가 있다. 보안여관 천장에서 발견된 상량문에는 ‘소화 17년(1942) 5월 3일’이라고 적혀 있지만 보안여관이 기록으로 남겨진 최초는 1936년이다. 미당 서정주의 자서전 ‘천지유정’에 “1936년 가을, 함형수와 나는 둘이 같이 통의동 보안여관이라는 데서 기거하면서 김동리, 김달진, 오장환 등과 함께 ‘시인부락’이라는 동인지를 꾸며내게 되었다”라고 적고 있다. 1938년 경성상공명부에도 등장한다. 운영주 ‘이유숙’의 이름과 함께 ‘세금 31.60원’이 적혀 있다. 상량이 올려지기 전부터 여관의 기능을 했다는 이야기지만 상량문대로 1942년을 기준으로 삼고 있다.

전통은 쓰여야 한다

신·구 보안여관은 서로 보완 역할을 하고 있다. 구관의 시간 위에 지어진 신관은 구관이 못다한 숙박의 기능을 잇기 위해 3·4층을 스테이로 만들었다. 나머지 지하 2층까지는 책방, 카페, 전시, 모임 공간이 들어가 있다. 두 건물은 2층에서 다리로 연결이 돼, 과거와 현재를 오고 갈 수 있게 했다. 신관을 지어 올리기까지 10여년이 걸렸다. 책으로 쓸 만큼 우여곡절이 많았다. 적벽돌의 두 건물은 주변 풍경에서 튀지 않으려는 듯 무표정하게 서 있다. 신관은 키 낮은 구관을 위협하지 않기 위해 3m쯤 뒤로 물러서 있다.

최성우 대표(59·동국대문화예술대학원 책임교수)와 신관 2층 보안책방에서 만났다. 통유리창 밖으로 6월 경복궁의 초록이 무성했다. 길 건너 대각선 위치에 경복궁 서문인 영추문이 보였다.

“오래된 것이 현재 쓰였을 때 새로운 것입니다. 미술관, 박물관에 모셔진 전통은 새로운 것이 없습니다. 오래된 가치로 남겨두는 것이 아니고, 유용한 현재 가치로 전환시켰을 때 컨템퍼러리 아트, 즉 동시대 예술인 거죠. 그것이 다른 지점입니다. 오래된 것이 가치가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지만 쓰임에 대한 생각은 다릅니다. 옛날 것은 불변의 가치로 모셔놔야 한다? 그건 문화재청에서 할 일이고 계속 사용해야 전통도 살아 숨 쉬죠.”

최 대표는 ‘쓰임’을 계속 강조했다. 보안여관이 가치가 있는 것은 단지 오래돼서가 아니라, 오래된 건물이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생각대로 이곳에서는 읽고 보고 먹고 자고, 모든 용도의 쓰임이 일어난다. ‘미술관·박물관은 세상의 1%에 주목하지만 우리는 나머지 세상에 주목한다’는 것이 ‘보안여관’ 쓰임의 방향이다. 그동안 이곳에서는 다양한 실험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토종쌀을 전시장으로 불러들이고, 예술가들이 만든 안주와 공연이 어우러진 프로젝트 ‘통의동 예술포차’, 수집품, 창의적 제품 등을 파는 프로젝트 숍 ‘예술을 파는 구멍가게’ 등이 열렸다. 세상의 모든 아마추어들의 벼룩시장 ‘세·모·아 프리마켓’은 도시농부, 지역주민, 아마추어 장인들의 공생 네트워크를 만들어가고 있다. 청년예술가 인큐베이팅 프로그램인 ‘두럭’은 매년 청년작가, 기획자를 선정해 연구모임을 지원했다. ‘매주 목요일 오후 4시, 누구나 환영’하는 대화 플랫폼 ‘목차’를 한동안 진행했다. ‘포트폴리오 리뷰’ 모임은 경력단절자, 인맥 없는 해외유학파 작가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토해내는 위로의 자리였다. 아이 키우며 작가의 꿈이 멀어진 한 주부는 지방에서 틈틈이 그린 작품을 들고 올라와 펑펑 눈물을 쏟아내고 갔다. 동양문화사, 서양고전음악, 가양주 담기 등을 주제로 한 스터디모임 ‘보안클럽’도 있다. 국제교류전도 자주 열린다. 구관과 신관의 전시 공간에서는 다양한 기획전이 이어진다.

이런저런 판이 벌어지지만 관통하는 메시지는 일관돼 있다. 거대담론이 아니라 ‘보안(保安)’이라는 단어 뜻대로 개인의 안녕과 평안을 위한 생활밀착 예술이다. 삶과 예술의 경계에서 새로운 담론으로 예술생태계를 만들어가는 ‘보안여관’의 작업들은 하얀 사각 벽의 갤러리에서는 보기 힘든 것들이다.

신관이 완성되고 신·구가 호흡하며 3년째, 자생이 목표지만 쉽지 않다. 특히 구관 운영은 어렵다. 창작 공간 지원금으로 1년에 2000만~3000만원을 받지만 전시 하나 만들기도 빠듯하다. 얼마 전 구관의 한쪽 벽이 뜯겨져나가 보수를 했다. 손을 대니 상태는 더 심각했다. 공사비가 예상을 훨씬 넘었단다. 구관은 냉난방도 안 되고 화장실도 없다. 애초에 예술이 올 곳이 아니었다. 최 대표는 “그래도 서울 시내에 불편한 건물이 하나쯤 있는 것도 의미 있는 일 아니냐”고 물었다. 보안여관의 내부는 헐다 만 건물처럼 벽지가 찢기고 천장이 드러나 있다. 작가들에게는 공간 자체가 작업의 일부가 된다. 이곳에 온 사람들의 반응은 두 종류라고 한다. “와~ 이런 데가 있었어?” 혹은 “언제 부술 거예요?”이다. 최 대표도 문화예술 플랫폼을 꿈꾸며 보안여관과 주변 건물 2채를 매입했을 당시엔 새 건물을 올릴 생각이었다. 평범한 벽돌과 허술한 벽, 천장 안에 정체를 숨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가 하도 새서 천장을 뜯어보니 상량문과 함께 박공지붕이 드러난 겁니다. 그전엔 목조주택인 줄도 몰랐어요. 그냥 헐어버릴 건물이 아니다 생각했죠.” 최 대표가 비 샌 흔적으로 얼룩덜룩 무늬가 만들어진 천장을 바라보며 “저것에 홀려 여기까지 왔다”고 말했다. 낡아빠진 목조주택은 대부분의 사람에겐 헐어버릴 이유겠지만, 최 대표에게는 오히려 지켜야 할 이유였다. 보안여관의 역사를 뒤지고 설계를 변경했다. 보존을 위해 보안여관을 둘러싸듯 건물을 올려야 하나 고민 끝에 최소한의 수리만 하고 있는 그대로 살렸다.

80년 넘은 2층짜리 보안여관과 3살 나이의 ‘보안1942’(위쪽)가 함께 현재를 살고 있다. 두 건물은 2층에서 다리로 연결이 돼 있다. 신관에는 ‘보안스테이’와 ‘보안클럽’ 등이 들어서 있다. 신관을 짓는 과정에서 유물이 나와 공사 기간이 오래 걸렸다. 유물은 지하 2층 ‘보안클럽’ 바닥에 유리를 통해 볼 수 있게 했다.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80년 넘은 2층짜리 보안여관과 3살 나이의 ‘보안1942’(위쪽)가 함께 현재를 살고 있다. 두 건물은 2층에서 다리로 연결이 돼 있다. 신관에는 ‘보안스테이’와 ‘보안클럽’ 등이 들어서 있다. 신관을 짓는 과정에서 유물이 나와 공사 기간이 오래 걸렸다. 유물은 지하 2층 ‘보안클럽’ 바닥에 유리를 통해 볼 수 있게 했다.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적산가옥의 기억

최 대표는 외조부의 적산가옥에서 자랐다. 그의 DNA가 오래된 시간의 냄새를 알아본 것이다. 그는 외조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외조부는 부산 섬유산업의 토대를 이룬 ‘태창기업’의 창업주 고 황래성 회장이다. 어머니는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124호 채화장 보유자인 황수로(83) 동국대 석좌교수이다. 부산 초량동에 그가 살았던 100년이 넘은 적산가옥이 있다. 등록문화재 제349호다. 최 대표는 이곳에서 초·중·고교 시절을 보냈다. 외조부는 한때 전국 납세 1위를 할 정도로 사업을 일궜다. 태창여상을 만들어 공장 직원들을 교육시키고 일맥문화재단을 세워 장학사업을 펼쳤다. 최 대표는 현재 일맥문화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다.

적산가옥은 최근 몇 년 새 몸살을 앓았다. 주변에 40층 아파트 단지와 오피스텔이 들어서면서 지반침하가 일어나고 건물이 뒤틀렸다. 건물을 해체해 복원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최 대표는 이곳을 부산의 상징 공간으로 만들 계획이다. 차, 전통술, 음식을 매개로 부산을 브랜딩하기 위한 구상을 하고 있다. 적산가옥 옆에 미술관도 세울 계획이다. 보안여관을 운영하면서 쌓은 노하우와 시행착오의 경험들이 도움이 되고 있다. 부산의 적산가옥은 일맥문화재단의 이름으로, 보안여관은 그가 개인적으로 운영한다. 서울과 부산의 적산가옥이 평생 그의 과제가 된 셈이다. 최 대표는 “전 세대로부터 받은 것이 많으니 사회에 갚아야 할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유럽에서는 수백 년 된 건물을 그대로 쓰는 것이 일상이니 낡은 여관 하나 보존하는 것이 대수로운 일이냐고 할 수 있지만, 씁쓸하게도 우리나라에서는 대수로운 일이다. 최 대표는 프랑스에서 유학을 했다. 파리1대학에서 미술사 박사준비과정을 마치고 프랑스 문화성 연구단원으로 2년을 보냈다. 학문보다 ‘실행’을 공부하고 싶어 대학마다 노크를 하다 운 좋게 연결이 됐다. 전 세계 인재들을 뽑아 유럽 전역의 문화를 경험할 수 있게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었다. 일반인은 만나기 힘든 퐁피두센터 관장을 만날 수도 있고, 박물관 수장고며 시스템도 구경할 수 있었다. 12명이 같은 기수로 각국의 문화계에서 굵직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때 유럽의 문화를 속속들이 공부했다.

1993년 한국에 들어와 교수는 싫고 문화경영 쪽으로 할 일이 있겠다 싶어 문화단체, 기관을 두드렸지만 그가 갈 곳이 아니었다. 민방위과장을 하던 사람이 문화회관 관장을 맡던 시절이었다. 때맞춰 집안사정으로 사업을 떠맡게 됐다. 몸에 맞지 않는 양복을 입고 10여년을 보냈다. 그가 한참을 돌아 자신의 자리를 찾은 것이 보안여관이다. 1년 반 동안 서울의 전 지역을 걸어다닌 끝에 멈춘 곳이다. 인맥 중심의 미술판과 제도권 밖에서 생활 속 문화예술로 대중과 소통할 곳을 찾고 싶었다. 그가 생각하는 예술은 벽에 걸린 것이 아니다. 벽에서 떨어져나와 식탁 위에, 생활 속에 있는 것이다. 보안스테이에 작가들의 가구, 다기를 놓고 쓰게 하고, 전시장 앞마당에 장이 서는 것이 모두 하나의 맥락이다.

‘보안여관’은 도시재생을 이야기할 때 자주 오르내린다. 최 대표에게 도시재생에 대해 물으니 “싫어하는 단어 중 하나”라고 말했다. “우리나라 도시재생의 가장 큰 문제는 속도”라고 했다. “지자체장들이 도시재생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습니다. 재생은 버려졌던 것을 다시 쓰는 것인데 80년 된 보안여관의 역사를 1~2년에 재생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도시재생을 1~2년 만에 뚝딱 하라고 하니 수십억, 수백억원씩 써서 건물만 짓고 결국 껍데기만 남는 거죠. 관 주도로 성과 내기 식 도시재생은 돈폭탄 떨어트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도시재생을 문화 도시재생으로 오해하고 있어요. 주민밀착형으로 지속가능하게 삶에 녹아들어야 합니다. 그걸 어떻게 수치로 측정하고 평가하겠습니까.”

최 대표는 전문가의 부재도 지적했다. 그는 “시간과 마음과 정성을 들여 그 지역에 있으면서 지역을 살리는 것이 전문가”라고 말했다. 끊임없는 수행 자체가 모델이 돼야 한다는 말도 했다. ‘도시재생’이 유행처럼 또 다른 ‘삽질’을 하고 있는 가운데, 낡고 불편한 보안여관은 그래서 중요하다. 최 대표는 100년 후에도 보안여관이 잘 쓰이고 살아 남기를 바란다. 그는 새것보다 오래된 것이 더 새로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장소는 기억을 담는 그릇이라고 했다. 보통 사람들의 문화예술 야영지를 자처한 보안여관의 숙박계엔 계속 새로운 기억들이 더해질 것이다.

황은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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