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수서역의 저상 플랫폼에 정차한 SRT 고속열차. 계단을 밟고 열차를 타고 내리는 구조다.
서울 수서역의 저상 플랫폼에 정차한 SRT 고속열차. 계단을 밟고 열차를 타고 내리는 구조다.

국내 최초 100% 지하 고속철역인 경기도 화성시 동탄신도시의 동탄역에 가면 높낮이가 다른 플랫폼이 보인다. 낮은 플랫폼은 서울 수서역과 부산역까지 가는 SRT 고속철을 탈 수 있는 플랫폼이고, 높은 플랫폼은 향후 수서역, 삼성역을 거쳐 파주 운정신도시까지 운행될 수도권광역급행철도 GTX-A(동탄~운정)를 위해 미리 마련한 플랫폼이다.

동탄역을 기종착으로 운행하는 GTX-A는 동탄에서 수서까지 SRT와 선로를 공유하지만, 정작 같은 플랫폼에서 타고 내릴 수는 없다. 열차를 타고 내릴 수 있는 플랫폼의 높이가 SRT는 500㎜, GTX는 1135㎜로 각기 달라서다. SRT는 낮은 플랫폼에서 계단을 밟고 열차에 오르내리는 저상폼인 데 반해, GTX-A는 지하철과 같이 높은 플랫폼에서 수평으로 열차를 타고 내리는 방식이다.

100% 지하에 지어진다는 점에서 동탄역은 서울시가 추진하는 ‘강남권 광역복합환승센터’(가칭)의 모델이기도 하다. 당초 서울시는 강남구 영동대로 삼성역(2호선)~봉은사역(9호선) 구간에 동탄역과 같이 지하 6층의 광역복합환승센터를 조성하고, 수도권광역급행철도 GTX-A와 GTX-C를 비롯해 고속철(SRT), 위례신사선 경전철, 노선버스, 택시 등을 모두 집어넣으려고 했다.

동탄에서 삼성역까지 올라오는 GTX-A는 SRT와 수서까지 동일한 선로를 공유한다. 부산과 목포에서 올라오는 SRT를 이왕에 뚫어낸 GTX-A 노선을 따라 수서역에서 삼성역까지 조금 더 올려보낸다고 해도 기술적으로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이 노선을 삼성역에서 합류하는 GTX-C(수원~양주 덕정)와 연결시키면 고속철을 의정부까지도 올려보낼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지난 6월 10일, 국토교통부와 서울시가 ‘광역복합환승센터’ 지정을 최종 승인발표하면서 고속철을 빼 논란이 되고 있다. 논란이 일자 국토부와 서울시 측은 “고속철을 최종적으로 뺀 것은 아니다”라는 입장이다.

다만 이번에 고속철 투입계획의 발목을 잡은 결정적 요인 중 하나는 SRT와 GTX의 플랫폼 높이 문제였다. SRT는 높이 500㎜ 저상폼을 쓰고, GTX는 높이 1135㎜의 고상폼을 사용하기 때문에 열차를 탈 수 있는 각각의 플랫폼을 별도로 조성해야 한다. 이 경우 더 넓거나 긴 부지 확보가 필수적이고, 추가 플랫폼 조성에 따른 공사비 증가와 공기지연이 불가피하다.

서울시 동남권사업과의 한 관계자는 “SRT와 GTX의 플랫폼 높이가 다르다 보니 플랫폼을 같이 사용할 수 없다”며 “국토부에서 고속철(SRT) 플랫폼을 뺀 설계안을 별도로 만들어달라고 요청했다”고 말했다. 게다가 현재 한국철도기술연구원에서 저상폼과 고상폼에 동시에 투입할 수 있는 고속철 개발을 거의 완료한 것으로 알려지는데, 신형 열차가 투입되면 별도의 플랫폼이 자칫 무용지물로 변해 예산낭비가 될 수 있다는 것도 국토부의 고민이다.

이는 플랫폼 상호 호환이 안 돼 역사(驛舍) 규모를 필요 이상으로 키운 동탄역의 경우에서 보듯 어느 정도 예견됐던 문제다. 사실 동탄역 정도의 지방 철도역이면 대피선 2선과 통과선 2선으로 구성된 ‘2면 4선’ 정도만 지어도 여객수요를 충분히 흡수하고도 남는다. 하지만 동탄역은 SRT와 GTX의 플랫폼 높이가 서로 다른 관계로, 각각의 플랫폼 마련을 위해 고상폼 2선을 추가해 ‘2면 6선’으로 지어졌다.

플랫폼 문제로 SRT와 GTX-A는 동탄~수서 구간 선로를 공유함에도 대부분 중간역에서 상호 환승이 안 된다. 고상폼과 저상폼을 모두 설치한 SRT의 기종착역인 수서역과 GTX의 기종착역인 동탄역에서만 환승할 수 있다. 중간역인 성남역과 용인역에서는 GTX만 탈 수 있고, SRT는 그냥 보내야 한다. 성남시와 용인시 모두 인구 100만명 내외로 동탄신도시를 포함한 화성시(76만명)보다 커 충분히 고속철을 교대로 정차시킬 만한 곳들이다.

고상폼과 저상폼 혼재로 인한 철도 운영의 비효율은 철도당국의 오래된 골칫거리다. 고속철과 광역철이 겹치는 구간이 점차 늘면서 플랫폼 높이 차이는 각종 낭비를 유발하고 있다. 과거 공항철도에 KTX를 투입했을 때도 똑같은 문제가 터졌다. 공항철도는 지하철과 같은 고상폼을 쓰는데, KTX는 저상폼을 써서 선로를 공유함에도 불구하고 정차할 수 없었다.

결국 공항철도와 KTX가 동시에 정차하는 인천국제공항역(현 인천공항 1터미널역)과 인천 검암역에는 기존의 고상폼을 깎아서 저상폼으로 높이를 낮추는 작업을 한 이후에야 비로소 KTX를 정차시킬 수 있었다. 이마저 지난해 평창동계올림픽 이후 인천공항 KTX 투입을 중단하면서 만들어둔 저상폼은 무용지물로 변해버렸다.

고상폼으로 전환 필요성 대두

자료 : 국토교통부·뉴시스
자료 : 국토교통부·뉴시스

한국철도기술연구원 등에서는 가변형 발판, 가변형 플랫폼 등의 기술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무궁화호의 후신인 ‘누리로’에는 고상폼과 저상폼에 동시에 쓸 수 있는 가변형 발판이 마련돼 있지만 서울~신창(장항선) 구간 운행에 그친다. KTX나 SRT는 원천기술이 프랑스에 있고, 철도 안전문제를 우려해 섣불리 개조할 엄두를 못 내왔다.

장기적으로는 현행 고속철 및 간선철도에 쓰이는 저상폼을 고상폼으로 전면 교체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저상폼은 협소한 계단을 통해 열차에 오르내려야 해 장애인과 노약자, 영유아들의 선로 추락위험이 높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은 승무원의 도움이 없으면 열차에 오르내리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장애인 이동권을 심각하게 제약하는 셈이다. 하이힐을 신은 여성들도 무거운 캐리어를 휴대한 채 타고 내릴 때 위태한 경우가 많다.

저상폼은 승객들이 열차에 타고 내리는 소요시간도 고상폼에 비해 오래 걸려 열차 전체의 속도를 떨어뜨린다. 한국교통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저상폼의 승하차 시간은 고상폼에 비해 일반승객은 1.79초, 짐을 휴대한 승객은 3.28초가 더 소요된다. 현재 고속철 중간역에서는 대개 역당 1~2분가량 정차하는데, 고상폼으로 변경 시 최대 20초 정도를 절감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문재인 정부가 역점을 두고 추진 중인 남북한 철도 연결을 통해 KTX 고속철을 북한을 통과해 중국까지 보낸다 해도 플랫폼 높낮이가 달라 중국 철도역에서는 내릴 수 없다. 중국은 한국보다 뒤늦게 고속철을 도입하면서 기존의 저상폼을 일제히 고상폼으로 교체했다. 일본 역시 신칸센 고속철의 경우 고상폼을 채택하고 있다. 한·중·일 고속철의 경우 궤도폭은 표준궤(1435㎜)로 같지만, 저상폼을 그대로 두고서는 철도 연결은 요원하다.

과거 이명박 정부 때인 2012년 국토부는 ‘승강장 형식 변경을 통한 철도이용객의 편리성 증대방안 연구’란 보고서에서 “저상폼에서 고상폼으로 전환 시 연간 38억~152억원의 편익이 발생한다”는 결과를 내놓은 적이 있다.

한국 철도에서도 저상폼에서 고상폼으로의 전면 전환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되고 있다.

이동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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