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전주시 상산고등학교 정문에 ‘전북의 자부심, 상산고를 지켜 주세요’라는 내용의 현수막이 걸려 있다. ⓒphoto 뉴시스
전라북도 전주시 상산고등학교 정문에 ‘전북의 자부심, 상산고를 지켜 주세요’라는 내용의 현수막이 걸려 있다. ⓒphoto 뉴시스

전라북도 교육청의 전주 상산고등학교 자율형사립고등학교(자사고) 재지정 취소 결정을 두고 반발이 크다. 평가기준이 형평성, 공정성 등에 어긋난다는 이유에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요구되는 ‘절차적 정의’가 사라졌다는 평가도 나오는데, 최근 이런 비판에 직면한 정부 조치가 적지 않다. 여기서 절차적 정의는 민주주의 주요 요소 중 하나로 ‘의사결정 과정에서의 합당성 실현’을 의미한다. 일각에선 정부가 절차적 정의를 무시할 경우 정책의 일관성 결여, 신뢰성 하락 등을 불러올 수 있다고 우려한다.

지난 6월 20일 전북교육청은 ‘전라북도 자율학교 등 지정·운영위원회’에서 상산고에 대한 자사고 재지정 취소 결정을 내렸다고 밝혔다. 도교육청 자체평가단은 지난 4~5월 상산고에 대한 서면평가와 현장평가, 학교 만족도 온라인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상산고는 자사고 재지정 기준점수인 80점에서 0.39점 모자란 79.61점을 기록했다. 관련 법령에 따라 전북교육청은 7월 청문회와 교육부 장관 동의를 거쳐 자사고 취소를 확정할 방침이다.

자사고 지정 평가는 5년 주기로 실시되며, 점수에 미달한 학교는 일반고로 전환해야 한다. 각 시도교육청은 교육부가 제시한 자사고 평가지표 표준안을 참고해 이를 주관하지만, 교육감 재량이 크다.

형평성 어긋난 평가기준

상산고 자사고 지정 취소에 대한 반발 여론은 거세지는 분위기다. 평가기준이 형평성 등에 어긋난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전북교육청은 11개 시도교육청 중 자사고 재지정 기준점수를 유일하게 80점으로 뒀다. 지난해 교육부가 기준점수를 기존 60점에서 70점으로 상향한 조치에서 10점을 더 올린 셈이다. 80점을 넘기기 위해선 모든 평가지표에서 평균 우수(A) 등급을 받아야 한다. 여타 교육청들은 70점을 기준점수로 삼고 있다.

일부 평가항목이 적법하지 못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사회통합전형 대상자 선발’ 평가지표의 경우 정원의 10%를 기초생활수급권자나 차상위계층 등의 학생으로 선발해야만 4점 만점을 받을 수 있다. 상산고는 선발 비율이 3%에 그쳐 이 지표에서 1.6점을 기록했다. 문제는 상산고가 2003년 자립형사립고로 설립됐다가 자율형사립고(자사고)로 전환해 법적으로 사회통합전형 대상자를 선발할 의무가 없는데도 전북교육청이 이를 평가항목에 임의로 포함시켰다는 점이다. 반발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감사 등 지적 및 규정 위반 사례로 인한 감점’ 지표도 문제로 거론된다. 교육청이 기존까지 이 지표에서 깎을 수 있는 점수는 최대 5점이었지만, 이번 평가에서부턴 교육부 표준안에 따라 최대 12점까지 감점할 수 있게 됐다. 상산고는 여기서 5점이 감점됐다. 비슷한 시점에 경기도교육청이 이미 재지정 취소 결정을 내린 안산 동산고의 경우 이 항목에서 12점이 깎이면서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이 필요하다”고 반박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법인전입금 전출계획 이행여부’ ‘교비회계 운영의 적정성’ 등에 대한 평가 방식을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상황이다.

정성평가 항목은 이전보다 더 늘어 평가위원 역할이 더 중요해졌지만, 교육청은 이들 평가위원에 대한 정보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교육부 평가지표 표준안 기준으로 정량평가 항목은 15개, 정성평가는 10개, 정량평가와 정성평가가 섞인 항목은 7개다. 배점으로 따지면 정성평가, 정량평가와 정성평가가 섞인 항목은 100점 만점에서 총 57점에 달한다.

국중학 상산고 교감은 “5년간 아무 말 없다가 학교 존폐를 가르는 평가지표나 기준이 평가가 임박한 시점인 지난해 말에 급작스레 공개됐다. 상식적 차원에선 이해할 수 없다. 미리 그 방향성을 제시하고 각 학교들이 준비, 변화할 수 있는 기간을 줬어야 했다”며 “일부 평가 항목들은 사회적 기대 수준이나 법령에 근거하지 않았다. 일정 절차를 따른 평가 수단으로 보기 힘들다”고 말했다.

지난 6월 20일 상산고 학부모들이 전북도교육청 앞에서 상복집회를 진행하던 중 ‘전북 교육은 죽었다’는 의미로 절을 하고 있다. ⓒphoto 김영근 영상미디어 기자
지난 6월 20일 상산고 학부모들이 전북도교육청 앞에서 상복집회를 진행하던 중 ‘전북 교육은 죽었다’는 의미로 절을 하고 있다. ⓒphoto 김영근 영상미디어 기자

실체적 정의 vs 절차적 정의

전문가들은 이번 자사고 지정 취소의 본질적인 문제가 민주주의 훼손에 있다고 비판한다. 민주주의적 관점에서도 적절치 못한 조치였다는 것이다. 학계에 따르면 민주주의 사회일수록 ‘절차적 정의’의 확립을 통해 ‘실체적 정의’를 실현해야 하는데, 이번 자사고 지정 취소 과정에서는 절차적 정의가 사라졌다는 지적이다. 절차적 정의는 과정의 공정성과 합당성 실현을 의미하며, 실체적 정의는 분쟁 혹은 특정 사안의 옳고 그름, 방향성 등 내용적 측면을 말한다.

이호선 국민대 법과대학 교수는 “분쟁에선 두 정의가 충돌하기도 하지만, 민주주의에선 의견을 결집하는 일환인 절차적 정의가 중요하다. 합당한 절차와 과정을 거쳤을 때 비로소 정당성을 갖추고 실체적 정의에 다다를 수 있다”며 “결과가 좋아도 절차를 인정받지 못하면 그 결과 또한 존중받을 수 없다”고 설명했다. 절차적 정의가 실체적 정의를 구현하는 최소한의 수단인 셈이다.

이번 사안을 두고 보면 실체적 정의는 자사고 지정 취소 여부이며, 절차적 정의는 이를 결정하는 평가기준 확립의 합당성이라 할 수 있다. 자사고 존폐를 가르는 결정적 기준은 ‘커트라인’인 재지정 기준점수다. 지난해 말 교육부는 평가의 공정성 강화를 위해 기준점수를 60점에서 70점으로 높였고, 점수 미달 학교에 2년 유예 기간을 주고 재평가하는 방침은 금지할 것을 권고했다. 하지만 당시에도 왜 이렇게 기준이 변화했는지에 대한 별다른 설명은 없었다.

전북교육청의 경우 여기에 10점을 더 높여 80점을 기준점수로 삼았는데, 그 과정에서 전문가 토론회나 공청회조차 없었다. 점수 상향 근거로 들고 있는 ‘일반고 대상 비교·평가 결과’는 설득력을 얻지 못하는 상황이다. 일부 지표의 경우 일반고와 자사고 모두에 동일하게 적용,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학생과 학부모, 학교 측 의견 수렴도 이뤄지지 않았으며 평가위원 구성, 평가지표 개발 과정에서의 공론화 시도도 없었다. 김승환 전북교육청 교육감이 생각하는 실체적 정의만이 우선시된 셈이다.

최원목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더 큰 틀에서의 실체적 정의는 두 개로 나뉠 수 있다. 우수한 학생을 지원해 이들의 성공 가능성을 키워주는 교육이 옳다는 것과, 부족한 학생과 우수 학생 모두 동등한 권리에서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옳다는 정의다. 둘 모두 틀린 정의는 아니다. 다만 이번 조치는 절차적 정의에 대한 고려 없이 후자의 정의를 먼저 택해 행정적으로 밀어붙인 것이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절차적 정의는 상대방이 예측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구현해야 한다. 사회 구성원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변화된 기준을 따를 수 있는 시간도 충분히 부여해야 한다. 하지만 교육부, 전북교육청 모두 이 원칙에 충실하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상산고 학부모들은 자사고 지정 취소 결과가 발표된 지난 6월 20일 도교육청 앞에서 상복을 입고 항의집회를 열었다.

상산고 비상대책위원회는 이번 조치가 ‘민주주의 자체를 거스른 행정조치’라고 주장한다. 임태형 비상대책위 위원장은 “공적 이익을 크게 반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개인의 선택권을 확대해가는 것이 민주주의 발전사”라며 “근데 이번 조치는 자사고 폐지가 공적 이익에 얼마만큼 기여할지 등에 대한 논의 없이 단순히 개인의 선택권만을 억압한 비민주적 행태”라고 비판했다.

절차 무시한 정부 조치들

이런 ‘절차적 정의의 사라짐’은 최근 정부의 여타 의사 결정에서도 적지 않게 드러나고 있다. 지난 2월 환경부는 4대강 사업 일환으로 세운 금강·영산강의 5개 보 중 3개 보를 해체해야 한다는 제안을 내놓았다. 환경부는 보의 안전성과 경제성 등을 분석해 해체를 권고한 것이라 했지만, 객관적 자료 수집이나 분석이 졸속으로 추진됐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지역민 등의 다양한 의견 수렴이 부족했다는 비판도 나왔다. 이에 조명래 환경부 장관은 뒤늦게 절차적 정당성 확보에 나서겠다는 입장을 밝혀야만 했다.

최근 국토부와 부산·울산·경남 3개 시도지사가 ‘김해신공항’ 검증 논의를 국무총리실로 이관하기로 합의하며, 10년 넘게 이어진 동남권신공항 합의를 사실상 백지화한 조치도 마찬가지다. 동남권신공항 건설은 지난 2006년 노무현 정부 때부터 추진됐던 사안이다. 이명박 정부는 2011년 경남 밀양과 부산 가덕도가 신공항 건설에 부적합하다는 이유로 이를 무산시켰지만, 박근혜 정부는 신공항 건설을 공약으로 내걸며 재추진했다. 2016년 정부는 외국 전문기관에 타당성 연구까지 요청하며 결국 김해공항을 확장하는 방안으로 결론을 내렸는데, 현 정부가 이를 다시 뒤엎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박상병 정치평론가는 “부처가 예산까지 편성해 집행 중이었던 사안을 또다시 재검토하겠다는 것은 지난 절차를 존중하지 않는 것이거니와 정부가 힘으로 좌지우지하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절차적 정의의 부재는 정부 신뢰를 떨어뜨릴 수 있다고 지적한다. 최경진 가천대 법학과 교수는 “절차적 정의를 한번 깨기 시작하면 절차와 과정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구성원들은 추후 그 어떤 절차가 확립되든 이를 따르지 않게 된다. 더군다나 이미 용인한 권리 등을 부정할 때에는 초기 권리를 부여할 때보다 더 엄격한 절차적 정의를 확립해야 한다. 그래야 사회 혼란을 줄일 수 있다”며 “절차적 정의를 제대로 세워야 행정의 일관성이 형성되고, 잘못된 실체적 정의를 바로잡을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고 강조했다.

한편 교육부는 8월 안으로 자사고 재지정 평가를 끝낼 것으로 보인다. 자사고를 포함한 후기고는 8월 말까지 입학 전형 공고를 마무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올해 상산고를 포함해 재지정 평가 대상 자사고는 전국적으로 총 24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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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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