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가 지난 7월 18일 세종시 어진동 유니클로 앞에서 ‘일본 경제보복 규탄! 불매운동 선언’ 기자회견을 열었다. ⓒphoto 뉴시스
세종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가 지난 7월 18일 세종시 어진동 유니클로 앞에서 ‘일본 경제보복 규탄! 불매운동 선언’ 기자회견을 열었다. ⓒphoto 뉴시스

‘가지 않습니다. 사지 않습니다’.

일본산 제품 불매운동을 선언하는 포스터에 적힌 문구다. 7월 초 일본이 반도체 핵심소재의 한국 수출을 규제하자 그에 대한 반발로 일본산 제품 불매운동이 시작됐다. 이와 함께 일본 여행 보이콧 운동도 시작됐다. 지난해 일본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 3119만명 중 한국인은 754만명으로, 중국인에 이어 두 번째로 많았다. 실제로 불매운동은 성과를 보이고 있다. 국내 대형마트의 일본 맥주 매출액은 16% 감소했다. 일본의 대표적인 의류 브랜드 ‘유니클로’의 매출액도 26% 줄었다. 한국중소상인자영업자총연합회는 두 차례에 걸쳐 전국 마트 및 슈퍼마켓에서 일본 제품을 팔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연합회에 따르면 불매운동에 참여하는 업체는 2만3000여곳이 넘는다.

여행업의 타격이 특히 눈에 띈다. 그간 강제징용 배상 문제나 독도 영유권 다툼, 위안부 배상 문제 등이 논란이 돼 반일 감정이 격해질 때도 일본 여행객의 수는 줄어들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이미 예약해둔 여행 일정을 취소하지는 않지만 신규 일정을 잡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하나투어의 경우 불매운동이 본격화된 지난 7월 8일부터 7일간 일본 여행상품을 예약한 인원이 하루 평균 700여명으로 평소보다 40% 가까이 줄었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한국갤럽과 리얼미터의 여론조사를 보자. 향후 일본산 제품 불매운동에 참여하겠다는 사람은 두 기관 모두 전체의 67%나 됐다. 이 중에서도 유독 참여의사가 더 강한 집단이 있다. 20~40대, 진보층, 사무직(화이트칼라) 직장인 등이다. 리얼미터의 조사 결과에서는 20대의 불매운동 참여의지가 매우 높게 나타났다. 60세 이상 집단에서 불매운동에 참여하겠다는 사람이 44.8%에 불과했던 것에 비해 20대에서는 76.1%나 됐다. 일본 문화에 익숙하고 일본 여행을 자주 가는 젊은층에서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은 다소 이례적으로 보일 수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젊은 진보’의 일본에 대한 양면적인 태도를 알아야 한다. 주간조선 2503호 기사 ‘친일과 반일 사이 선택적 反日주의의 탄생’에서 분석했듯이 ‘젊은 진보’에게 일본은 문화와 역사·정치가 분리된 곳이다. 이들은 자라면서 일본 문화를 자연스럽게 습득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어렸을 때 자주 보는 만화책과 애니메이션도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걸 바탕으로 또래집단 문화도 만들어졌다. 거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일본은 가장 접근하기 쉬운 나라였다.

열등감 없는 반일 의식

박진한 인천대 일어일문학과 교수는 일본 문화와 여행은 “하나의 취향”이라고 설명한다. “마치 미국의 햄버거처럼 일본의 ‘가츠동(돈가스덮밥)’도 취향으로 선택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역사적으로는 강제징용 문제나 위안부 배상 문제에 목소리를 높이면서 일본 여행을 가고 일본 음식을 먹는 것은 단지 ‘모순’이라고 비난할 일이 아니다. 일본 문화는 한국 사회에 뿌리내린 다양한 문화적 요소의 하나일 뿐이다.

반일 의식은 문화적 취향과는 별개로 자라난 것이다. 최근의 반일 의식은 기성세대의 것과는 차이가 있다. 일제강점기를 직·간접적으로 겪었던 기성세대의 반일 의식은 열등감과 관련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젊은 세대에게 일본은 마냥 동경해야 할 선진국이라거나 짓밟혔던 기억이 있는 강대국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2002년 한·일 월드컵 공동개최를 계기로 한국과 일본은 같은 선에서 경쟁하는 상대가 됐다. 2000년대 중반부터 본격화된 한류 붐을 타고 내내 영향을 받기만 했던 한국 대중문화가 거꾸로 일본 문화에 영향을 미치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 반일 의식은 ‘억울함’ ‘울분’ 같은 방어적인 감정에서 벗어나 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감정으로 변화하게 됐다. 지난 7월 16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있는 의류매장 ‘탑텐’에서 쇼핑을 하고 있던 김은정씨와 딸 황라연씨가 그런 경우다. 그들은 바로 옆에 있는 일본 의류브랜드 ‘유니클로’를 외면하고 한국 브랜드인 ‘탑텐’에서 옷을 고르고 있었다. 김씨는 “원래는 유니클로에 굉장히 자주 가는 편이었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4학년인 딸이 활동적이라 옷을 자주 사 입습니다. 지금부터는 유니클로 대신 다른 곳을 가려고요. 유니클로만의 뛰어난 품질이나 디자인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습관적으로 갔던 저 자신을 반성합니다. 오히려 이번 불매운동으로 인해 소비자로서 저에게 더 많은 선택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김씨는 불매운동이 자신의 ‘소비 선택권’이 넓어지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단체 카카오톡 방에서는 일본에 타격을 입히기 위해 당장 매출 감소가 눈에 띄는 맥주 같은 공산품을 사지 말고 일본 여행을 가지 말라는 얘기들이 자주 나옵니다. 일본이 이번 일을 계기로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지금 불매운동은 일본에 직접적인 타격을 입히려는 공격적인 운동이다. “우리의 의지를 보여주자”는 식의 구호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젊은 소비자들은 일본 역시 한국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일본과 한국을 경제적으로도 동등한 위치라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더 주목할 만한 점이 있다. 불매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이번 불매운동을 통해 “깨달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9월 추석 연휴에 일본 여행을 계획했다가 취소한 36살 정승연씨의 말이다.

“트위터에서 우리 주변의 일본 브랜드 수십 개가 정리된 글을 봤어요. 우리가 얼마나 일본에 종속돼 있었는지 깨달았습니다. 심지어 일본 여행도 일본 정부가 계획한 관광정책의 영향을 무척 많이 받았다는 것도 이번에 알았어요. TV 방송에서 수없이 나오던 일본 방문 프로그램이 일본 관광청의 지원하에 이뤄진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실제로도 일본 정부는 관광객을 늘리는 것을 국가적인 목표로 삼았었다. 조아라 한국문화관광연구원 부연구위원에 따르면 2012년 아베 정권이 수립되고 나서 발표된 ‘일본재흥전략’의 주요 목표 중 하나는 관광객 유치였다. 아예 ‘관광입국추진 기본계획’을 5개년 법정계획으로 세웠고 중장기 계획도 차례로 발표됐다. 특징적인 것은 단지 ‘일본’을 방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지방’을 방문하도록 유도하는 데 정책의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의 일본 관광 홍보는 이 틀에 맞게 차근차근 진행됐다. TV 프로그램이나 소셜미디어를 통해 일본의 지방 소도시들의 풍경이 자주 노출되기도 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소비자들에게 이번 불매운동은 ‘종속’에서 ‘자율’로 이어지는 일종의 사회운동의 역할을 한다.

보수와 재벌에 대한 반발도 혼재

책 ‘탈냉전기 동아시아의 민족주의 갈등과 해결’에서 밝힌 조희정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전임연구원의 분석에 따르면 반일 의식은 얼마 전부터 점차 제도권 내로 진입하는 경향을 보였다. 예전의 반일 의식은 감정적인 것에 그칠 때가 많았다. 예컨대 단발성 집회가 반복되는 현상 같은 것이다. 그러나 2010년대 들어서 반일 의식은 전 세계적인 캠페인이나 시민단체 만들기 같은 집단적이고 제도적인 경향을 보였다. 반일 의식을 실천하는 일은 일종의 사회운동이 됐다.

사회운동으로서 반일은 결코 혼자 작동하지 않는다. 여러 다른 사회운동과 결합하기 마련이다. 몇 가지 이슈가 있었다. 먼저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부터 촉발된 ‘방사능 위험’에 대한 인식이다. 잘 알려졌다시피 방사능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는 집단은 당시 정부를 불신하는 집단이기도 하다. 하정철 한국소비자원 소비자안전국 팀장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소비자들이 ‘일본 방사능 문제’와 관련해 가장 중요하고 시급하게 생각하는 것은 ‘충분하고 올바른 정보 제공’이다. 실제로는 상당한 정보가 정부 기관을 통해 공개되고 있으나 그렇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다는 얘기다.

여기에 한국사 교과서 문제가 여러 차례 논란을 일으켰다. 직접적으로는 한국 현대사를 중심으로 좌우 이념이 맞부딪쳐 일어난 논란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올바른 역사’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이 생겨났다. 여기에는 이념적 대립이 극명한 민주화 운동만 포함된 것이 아니다. 일제강점기의 수탈 역사를 제대로 아는 것이 제대로 된 시민의식을 갖추는 일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게 됐다. 대중문화도 발맞춰 나갔다. 역사 교사가 인기 있는 방송인이 되고,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앞다퉈 역사 문제를 다루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를 직접적으로 다룬 영화나 드라마도 줄을 이었고 흥행에도 성공했다.

그러니까 반일 의식은 단지 민족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여러 사회 이념과 혼합돼 다양한 양태로 드러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이번 불매운동은 그 연장선상에 있다.

불매운동이 시작되기 직전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새로 생겨난 단어 중 하나가 ‘토착왜구’다. 한국인인데 일본의 이익을 옹호하는 듯한 사람에게 붙이는 단어인데 주로 나경원 원내대표를 중심으로 한 자유한국당 의원들에게 따라붙는다는 점을 주목할 만하다. 불매운동이 시작되고 가장 직접적인 타격을 입은 곳이 롯데그룹이라는 점도 의미가 있다. 롯데그룹은 오랫동안 ‘국적’을 의심받아왔는데 이번 불매운동이 본격화된 7월 이후 시가총액이 7% 이상 감소할 정도로 큰 타격을 입었다.

불매운동에 보수 진영과 재벌기업에 대한 반발이 숨어 있다는 점을 알게 된다면 이번 불매운동이 과거에 비해 유독 더 강하게 일어나는 이유도 알 수 있다. 불매운동이 성과를 거둔다는 것은 일본 정부에 ‘본때를 보여주는 것’ 이상의 성과를 얻는 일이기 때문이다. 일본산 제품 불매운동에는 한국과 일본의 대립만 포함돼 있는 것이 아니다. 보수와 진보 진영의 힘겨루기, 문재인 정권 지지와 반문재인 진영의 대립 양상도 혼재돼 있다.

이런 사실을 두고 본다면 여러 여론조사의 수치가 이해가 된다. 리얼미터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불매운동에 참여하겠다는 사람의 비율은 문재인 대통령의 직무를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눈에 띄게 차이가 났다. 대통령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80.6%가 불매운동에 참여하겠다고 밝힌 반면 부정적인 사람은 51.1%만이 그럴 것이라고 답했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의 일본산 제품 불매운동은 결코 외교적이고 국제적인 문제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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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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