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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회/르포
[2567호] 2019.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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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장]내 친구 정두언을 보내며

함영준  마음건강 길 대표·조선뉴스프레스 고문 jmedia21@chosun.com

▲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정두언 전 의원의 빈소에 조문객들이 조문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그는 음악을 좋아했다. 특히 1960~1970년대 팝송 부르기를 좋아했다. 그는 자신이 프로페셔널 가수 정도로 노래를 잘한다고 생각했는지 한국가수협회 회원으로 가입도 하고 CD 음반도 냈다. 비지스의 ‘Don’t forget to remember’, C.C.R의 ‘Who’ll stop the rain’, 토니 올랜도&다운의 ‘Tie a yellow ribbon round the old oak tree’….
   
   내 18번이기도 한 ‘Tie a yellow ribbon…’를 들으면서 나는 그 노래는 내가 정두언보다 더 잘 부른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박정희 정권하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가난하고 정치적으로 억압되긴 했지만 희망이 있었고 나라 전체가 ‘증산·수출·건설’로 바삐 돌아가던 시절, 우리는 서울 도심 한복판 언덕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각기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는 전라도 광주에서 자라다 일가족이 서울로 올라와 어렵게 살았다. 내가 들은 바로는 아버지가 어떤 부잣집 운전기사로 취직해 일가족이 그 집 문간방에서 지냈다. 그러나 천성이 활달하고 머리가 좋은 그는 당시 최고의 명문 ‘경기고’에 들어갔고 서울대 무역학과에 다녔다. 이후 어려운 행정고시를 패스해 엘리트 관료로서의 길을 걸어갔다.
   
   지금 생각하면 꿈 같은 시절이었다. 당시만 해도 척박한 상황이긴 했지만 노력하면 뭐든지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우린 가졌었다. 아마 정두언이 그때 그 시절 팝송을 특히 좋아했던 것은 정치인 정두언으로서뿐 아니라 6070세대의 낭만과 정서를 대변하는 사람으로 자리매김받고 싶었던 이유도 포함됐을 것이다.
   
   우리가 본격적으로 만나 어울린 것은 2000년대 초, 나는 신문기자로 활동하고, 그는 이명박 서울시장의 측근(부시장)인 예비정치인 시절이었다. 같은 학년, 같은 동네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덕에 겹치는 친구도 많았고 정서도 비슷해 우린 금방 친해졌다.
   
   
   위선과 교활함을 싫어하던 친구
   
   내가 본 그는 정치인이 되기에는 너무 솔직하고 다정다감한 성정을 지닌 이였다. 지역 연고주의도 없었고, 누구누구의 사람이란 소리를 듣기 싫어할 정도로 파당정치를 싫어했다. 보수든 진보든 옳지 않다고 생각되면 가차 없이 비판했고 특히 힘 센 사람의 ‘위선’이나 ‘교활함’을 극도로 싫어했다. 어찌 보면 그는 정치인이라기보다 천성적으로 기자나 선비 쪽 사람이었다. 문학적 성정도 만만치 않았다.
   
   전혀 한국적 정치인답지 않은 그가 이후 여의도에 입성해 초선의원으로서 큰 활약을 하고 MB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일등공신이 되는 과정을 나는 참으로 신기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당시 그는 자신과 아무런 연고도 없는 MB를 택한 이유에 대해 “그분 같은 실용주의적 리더가 산업화·민주화 이후 시대를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정두언이 각계에 지인이 많고 폭넓은 인간관계를 맺게 된 배경에는 계산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정을 베푸는 따뜻한 성품도 큰 몫을 차지했다. 내가 2005년 다니던 신문사를 스스로 나와 오피스텔에서 책을 쓰던 시절, 개인적으로 좀 힘들 때 그는 초선의원으로 바쁜 와중에도 짬을 내 밥을 사고 술자리를 마련해주었다.
   
   내가 쓴 책이 출간되자 그는 동료 의원들과의 모임에 나를 초청해 특별강연 자리를 주선해주기도 했다. 당시 한나라당 소장파 의원들인 임태희·나경원·박재완·박진·유승민·이혜훈·진영·최경환 의원들이 참여하는 ‘푸른 모임’으로 기억되는데 양평에서 열리는 행사에 정두언은 자기 승용차를 내게 보내 ‘모시는’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현역도 아니고, 잘나가지 않는 위치의 사람에게 이런 배려를 보여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는 MB캠프에서 다시 만나 본격적으로 함께 일을 하기 시작했다. 책을 쓰며 지내던 시절 우연한 기회에 당시 대통령후보로 나서던 MB와 연이 닿아 캠프로 들어오게 됐는데 정두언은 이미 캠프에서 가장 중요한 책사로 선거 대소사를 주도하고 있었다. 연설문 작성 임무를 맡은 내게 그는 ‘대단한 존재’로 비쳐졌다.
   
   당시 시대적 요청으로 인해 MB는 530만표가 넘는, 사상 유례 없는 표차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러나 그 벅찬 행운과 좋은 관계는 MB나 정두언에게나 딱 그때까지였다. 이후로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서로 갈등하고 싸우는 스산한 인생의 장들로 바뀌게 된다.
   
   정확한 내막은 모르지만 두 사람의 갈등은 당선 직후 MB가 향후 정권을 이끌고 갈 사람들에 대한 인사(人事) 발굴과 검증 권한을 정두언에게 맡기면서 비롯됐다고 본다.
   
   평소 지역을 별로 따지지 않는 MB로선 호남 출신의 정두언을 통해 인사탕평을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MB나 정두언이나 그 어마어마한 ‘인사권’에 대해 너무 쉽게 생각했는지 모른다. 이후 MB 내부 권력세계에선 인사권을 둘러싸고 치열한 암투가 벌어졌고 결국 정두언은 한 달도 안 돼 그 자리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그 자리는 MB의 친형 이상득의 보좌관 출신인 박영준이 맡게 된다. 훗날 정두언은 “어느 날 출근하고 보니 내 자리가 없어졌고, 그 이유에 대해 어느 누구도 얘기해주지 않더라”고 말했다.
   
   
   “어느 날 출근해보니 내 자리가 없어졌다”
   
   이때부터 정두언은 MB정권과 각을 세우게 되고 그 감정의 앙금은 평생 풀리지 않게 된다. 정두언은 여의도에서 현직 대통령인 MB에 대해 대립의 칼날을 내세우며 비판하기 시작했고 야당세력은 이를 관전하며 즐겼다.
   
   정두언은 그런 와중에서도 2선, 3선 고지를 넘어서며 정치인으로서 입지를 굳게 다져나갔다. 참으로 대단한 돌파력의 사나이였다. 그러나 3선 의원으로 입성한 2012년 6월 그는 어머니 장례식을 치른 며칠 뒤 검찰로 소환된 이후 결국 저축은행 비리사건으로 구속됐다. 그는 10개월간 수감됐다가 2014년 무죄 확정판결을 받는 어려운 시절을 겪었다.
   
   구치소에서 그는 울분을 삭이지 못하고 공황장애를 겪고 결국 그것이 만성우울증으로 발전했다. 어쩌면 한국적 상황에서 정치를 하다 보면, 더구나 정상적인 성정의 소유자라면, 더더욱 그 번아웃(burnout)의 소진 상황에서 우울증을 겪지 않을 수 없다고 본다. 나 또한 청와대 3년 생활을 포함해 5년간 정치권 주변 생활을 하고 난 후 갑자기 우울증이 몰려와 한동안 고생하기도 했다.
   
   정두언은 교도소에서 출감한 이후 달라이 라마의 ‘용서’란 책을 사서 친지들에게 돌렸다. 나는 그때 정두언이 모든 갈등·미움·분노를 내려놓았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분노가 남아 있었고 그것은 현실정치에서 MB에 이어 박근혜 정권으로도 이어졌다. 영리한 정두언이 참으로 영리하지 못한 것은 살아 있는 권력, 즉 현직 대통령을 향해 단기필마로 공격에 나섰다는 점이었다. 그만큼 현실정치에 대한 비판과 실망의 강도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어디 현실정치가 도덕 교과서처럼 구현되는 세상이 올 수 있을까.
   
   
   출감 후 돌렸던 달라이 라마의 ‘용서’
   
   그에게 박수 치는 사람은 정치적으로 자기 편이 아닌 야당의원들이 더 많았고 결국 그는 박근혜 정부에서도 아웃사이더가 됐으며 설상가상 2016년 총선에서 4선 고지 획득에 실패하게 된다.
   
   이때부터 그의 우울증은 본격화된다. 가정적으로도 어려움을 겪은 그는 그러나 타고난 입담과 예리한 현실 판단으로 방송 정치평론가로서 길을 걷게 된다. 방송에서의 그의 판단은 명쾌했지만 방송 후 실생활에서 그의 모습은 그리 명쾌하지 않았다. 늘 우울과 불안, 갈등 속에서 살았다.
   
   그가 우울증으로 크게 고생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2017년 말 나는 그를 만났다. 몇 개월 전 출간한, 나의 우울증 치유기 책을 건네주었다. 며칠 뒤 그는 그 책을 잘 보고 큰 힘이 됐다는 문자를 보내왔다. “스승님 고마워.”
   
   이후 우리는 자주 만났다. 내가 신문사에서 기획하고 심리학 교수가 진행하는 ‘8주 마음챙김 명상’ 강좌에도 나왔다. 그러나 워낙 저녁 방송 일정이 많아 서너 번 나온 후 나오지 못했다. 어느날 우리는 강좌를 마친 후 광화문 빈대떡집에서 막걸리를 먹으면서 대화를 나눴다. 그때는 MB가 검찰 수사를 받으며 구속되기 직전이었다. 나는 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이제 방송에서 MB 비판 그만할 때 아냐?”
   
   그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정 의원이 MB에 대해 가지는 섭섭함 나도 충분히 알아. 하지만 그렇다고 이토록 미움의 감정을 계속 품고 공격하는 것이 인간 정두언의 모습인가? 이게 당신이 바라는 방식인가?”
   
   “… …”
   
   “자네가 구속된 걸 MB 탓으로 보나? MB가 지시했다고 보나. MB에 대한 인간적 평가는 다양할 수 있지만 적어도 그분이 자네를 감옥에 넣으라고 지시할 만큼 비정한 사람 같은가.”
   
   정두언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렇지는 않을 거야. 나도 그렇다고는 생각 안 해.”
   
   나는 말했다.
   
   “자네의 우울증도 마찬가지야. 자네는 본래 착한 성품의 소유자일세. 그런데 지금은 거칠고 많이 상해 있어. 자네 마음이 혼돈스럽고 힘든 이유는 자네의 원래 성품과 반대로 행동하기 때문일세. 남을 용서하지 않고 비판하는 모습은 자네의 참모습이 아닐세. 자네의 마음도 용납하지 않고 있지.”
   
   정두언은 진지하게 내 말을 경청했다. 그날 헤어질 때 그는 “고마워. 진짜 좋은 충고다”라고 했다.
   
   이후 그의 비판은 줄어들었던 것 같다. 그러나 시사평론이란 것이 어차피 남을 비판하고 공격하는 업(業)이라 그의 현실정치 비판은 계속 화제가 됐다.
   
   
   우울증 시달리면서도 비판의 업 못 끊어
   
   우리는 가끔 만났다. 그는 우울증 약을 계속 먹고 있다고 했다. 내가 보기에 우울증을 고치려면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그 일에서 벗어나는 것이 최선인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 같았다. 방송을 통한 수입도 그렇고, 자신의 존재감 내지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정치인 특유의 욕구를 끊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는 작년 말 마포에 일식집을 열었다. 생계수단이라고 했다. 가보니 규모가 너무 컸다. 지금과 같은 불황에 제대로 될지 걱정이 됐다. 우리 같은 월급쟁이가 가기에 만만치 않은 집이었다. 종업원 월급, 임대료를 감당하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2개월 전이었다. 마포 가든호텔인데 여전히 방송활동으로 바빴다.
   
   “지금 돌아가는 세상 어떻게 봐?”
   
   그는 우리나라 현실에 대해서 절망하고 있었다. 내 편, 네 편 어느 한편에라도 속하면 좋으련만 그는 그러지도 못했다. 오히려 양편 다로부터 비난받는 형국이 더 많았다. 세상을 바꾸려고 나왔는데 세상은 더 나빠지는 것 같고, 본인도 나이 들며 오히려 피폐해지고 있다는 자괴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며칠 전 자살 소식을 들었다. 그 순간 우리의 청소년 시절 필독서 중 하나였던 최인훈의 소설 ‘광장’이 떠올랐다. ‘주인공 이명준은 광복 후 남북한 상황에 공히 환멸을 느낀다. 무질서가 넘치는 남한은 광장(공동체)은 없고 밀실(개인)만 존재하는 곳이었다. 반면 온갖 정치적 선동이 난무하는 북한은 밀실은 폐쇄한 채 광장만 강요하는 세상이다. 6·25 때 인민군으로 참전한 명준은 포로가 된 뒤 휴전 후 제3국을 택하고 선상에서 바다에 투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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