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주간조선 로고

상단주메뉴

  • [8·15 특집] 히로히토의 결단 뒤집어보기
  • kakao 플러스친구facebooktwiteryoutube
  • 검색
  1. 사회/르포
[2570호] 2019.08.12
관련 연재물

[8·15 특집]히로히토의 결단 뒤집어보기

▲ 1945년 9월 2일 일본 외무대신 시게미쓰 마모루가 USS미주리호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하고 있다.(왼쪽) 패전 후 연합군 최고사령부(GHQ) 총사령관 맥아더를 방문한 히로히토.
“남북 간의 경제 협력으로 평화경제가 실현된다면 우리는 단숨에 일본의 우위를 따라잡을 수 있습니다.”
   
   지난 8월 5일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밝힌 생각이다. 일본이 화이트리스트 제외 조치를 단행한 당일, 대일·대국민 메시지를 발표한 지 3일 만에 꺼내든 대통령의 카드다. 대통령이 휴가까지 반납한 채 장고의 대응책에 나선다는 보도가 흘러나온 터라 어떤 메시지를 일본에, 아니 5200만 한국인에게 던질지 궁금했었다. 그런데 결론은 ‘남북협력 평화경제’였다. 발언에 대한 반응이나 평가는 이미 모두에게 잘 알려져 있을 듯하다. 밖은 어떨까. 일본의 경우 돈에 가장 민감한 경제전문지 닛케이(日本經濟新聞)가 단 한 줄 기사로 처리했다. 다른 신문 대부분도 해외토픽 뉴스처럼 단신으로 다뤘다. ‘문 대통령, 남북공투(共闘)’라는 제목이 인상 깊다. 미국은 중국과의 경제 마찰과 홍콩 반정부 시위가 가장 큰 이슈일 뿐, 한국에 대해 무심하다. 북한은 어떨까. 마치 남북협력 메시지를 축하라도 하듯 다음 날 미사일 두 발로 답했다.
   
   ‘성단(聖斷)’.
   
   유튜브 동영상을 통해 문 대통령의 발언을 직접 확인하던 중 떠오른 단어다. 일본 천황(天皇)이 직접 내린 국가적 차원의 결단이란 말이다. 희망·행복보다 고통·시련 속에서 단행된 ‘고뇌의 결단’이라는 의미로 통한다. 상징적 존재지만 일본에서 천황은 문자 그대로 하늘로 이어진 존재다. 그래서 중요한 뭔가를 결정한다는 말(斷)에다 성(聖)이란 단어를 붙였다. 그냥 일왕(日王)으로 부를 경우 성립될 수 없는 의미를 일본인들이 부여하는 셈이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사례가 있었지만 일본인 모두가 기억하는 ‘성단’이 하나 있다. 정확히 말해 74년 전 8월 10일부터 14일까지 이뤄진 히로히토(裕仁) 천황의 결단이다. 포츠담선언 수락, 다시 말해 연합군에 대한 무조건 항복 결정이다. 1945년 8월 15일 정오,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천황의 항복 발표는 5일간에 걸친 성단의 결과물이다. 일본인은 물론 아시아인 모두가 기억하는 기묘한 목소리, 일본인들의 표현으로는 옥음(玉音) 방송을 통한 항복 메시지다. 신과 동일시되던 천황의 목소리가 세상에 처음으로 알려진 날이다.
   
   그해 8월 6일 히로시마(広島), 9일 나가사키(長崎)에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이미 전쟁의 승패는 난 상태였다.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못 박은 포츠담선언(1945년 7월 26일)이 일본에 전달된 것은 원폭 투하 10여일 전인 7월 27일. 당시 일본 전쟁지도부는 크게 둘로 갈렸다. 외무대신을 포함한 민간인 출신 각료들은 당장 포츠담선언을 수락하자고 했다. 태평양전쟁 당시 민과 군을 합친 일본인 사망자는 약 220만명 정도다. 특히 피해가 집중된 시기는 1945년 7월 이후였다. 하루에 10만 이상이 죽기도 했다. 원자폭탄 도쿄(東京) 투하도 초읽기에 들어선 시기였다.
   
   
   ‘1억 배수진’ 뚫고 내려진 종전 결정
   
   반면 군부는 완고했다. 포츠담선언을 일축하고 본토결전(本土決戰)에 매달렸다. 옥(玉)이 부서질 때 퍼져나오는 아름다운 소리, 즉 옥쇄(玉砕)로 일본인 7000만, 조선·대만인 3000만, 모두 1억명이 배수진을 치자고 주장했다. 군부는 종전 논의는 본토결전 사망자가 2000만명에 이르는 시점에 하자고 주장했다. 당시 군부 지도부들은 패전을 기정사실로 인식했지만 청년장교들의 전원옥쇄 분위기가 부상하면서 즉각 항복을 주저하게 된다. 종전 결정에 동의할 경우 배신자, 비겁자로 찍혀 곧바로 암살될 수도 있는 분위기였다. 전쟁지도부는 구체적인 결론도 내지 못한 채 마냥 시간을 흘려보냈다.
   
   8월 9일 소련군의 만주 침공이 시작됐다. 홋카이도(北海道)도 풍전등화 상태가 됐다. 모두가 허둥지둥하는 상황에서 긴급회의가 지하벙커에서 개최된다. 히로히토 천황이 ‘충분한 대화(十分に懇談)’를 하라고 지시한 데 따른 회의다. 이어 8월 10일 오전 0시3분, 천황이 참석한 심야 어전회의가 열린다. 2시간에 걸친 토론이 벌어지지만 결론은 ‘수락 3, 항전 3’이다. 급기야 총리 스즈키 간타로(鈴木貫太郞)가 천황에게 다가가 성단을 요청한다. 전쟁지도부가 판단을 못 하겠다는 의미였다.
   
   일본 역사를 보면 피할 수 있을 때까지 피하자는 것이 성단이다. 책임을 천황에게만 물릴 수 있기 때문이다. 아래서 전부 결정한 뒤 추인하는 것이 본래 천황의 일상적인 역할이다. 스즈키의 성단 요청에 대해 당시 히로히토는 무언으로 일관하거나, 좀 더 시간을 갖고 회의를 한 뒤 결론을 내라고 지시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히로히토는 침묵을 깨고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힌다. “내 의견을 말하자면, 외무대신의 (포츠담회담안 수락) 의견에 찬성한다.” 일본 역사가들이 천황의 성단으로 표기하는 일성(一聲)이다.
   
   천황의 포츠담회담 수락과 태평양전쟁 종결 의사는 8월 14일 미국 측에 전달된다. 주목할 부분은 ‘무조건 항복’이란 행간 속에 숨겨진 의미다. 패전 후 천황 자신의 운명조차 어찌될지, 미래에 대한 보장이 전혀 없다. 전범으로 처형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내려진 결정이다. 미국 시각으로 8월 14일 아침, 트루먼 대통령이 일본의 포츠담선언 수락 사실을 국민에게 알린다. 사실상 종전으로, 워싱턴 백악관 앞에서는 전쟁승리 축하퍼레이드가 벌어진다. 옥음 방송은 미국에서 이미 종전선언이 끝난 다음 날 이뤄진다.
   
   8·15 광복절 74주년을 앞두고 히로히토의 결정을 새삼 떠올려본 것은 중요한 국가적 결정에 임하는 지도자의 자세, 즉 ‘국가적 위기를 어떤 자세로 극복하는가’ 하는 점 때문이다. 크게 볼 때 ‘문제없다(No Problem)’는 식의 낙관론에 젖어 임전무퇴만 외치는 이념형과, 비정한 현실론에 입각한 타협형으로 나눌 수 있다. 국정 방향, 어떤 미래를 국민들에게 제시하느냐는 것은 리더십의 기본이다. 맞닥뜨린 상황이 진짜 문제가 없는 것인지, 최악의 순간까지 상정해야 할 차가운 현실인지를 판단하는 것도 지도자의 안목이다. 8월 5일 보여준 한국 정부의 대응자세에 대해 이론을 제기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입장을 바꿔 생각하면 다른 의문이 떠오른다. 만약 한국이 패전에 내몰린 일본처럼 자신의 운명조차도 가늠하기 어려운 시련에 직면할 경우 고해성사에 가까운 결단을 지도층이 ‘과연’ 내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다. 상상하기 싫지만 최악의 순간이 닥칠 경우 문 대통령이 직접 나서 라디오나 TV를 통해 실패를 고백하고 십자가를 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한국의 지도층은 그동안 승자의 목소리에만 주목해왔다. 1945년 8월 히로히토가 내린 ‘패배 인정’, 그 괴롭고 힘든 고백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승자의 입장, 승(勝)의 발언은 낙관적이고 장밋빛이라는 점에서 좋다. 이기고 이겨야만 한다. 모두가 이미 승자가 된 기분으로 박수를 치고 따라갈 수 있다. 반면 패배를 인정하는 것은 비관적이고도 어둡다. 배척되고 비난의 대상이 되기 십상이다. 승의 발언은 한국 지도층의 특징 중 하나다. 전진, 미래, 성공, 대박이 핵심 키워드다. 잘못을 인정하고, 패배를 자임하는 지도자는 찾아보기 쉽지 않다. ‘현실이 어둡다. 모두 나의 잘못이다. 앞으로 더 큰 화가 미칠 것이다. 어렵더라도 모두 함께 손을 잡고 나가자’는 식의 고백이 드물다. 간혹 어려운 현실을 얘기할 때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예외 없이 등장하는 것이 ‘네 탓’이다. 너 때문에 졌다, 비겁자들 때문에 엉망이 됐다와 같은 논조다. 모든 문제는 ‘친일파와 적폐세력’에 있다는 식이다. 자기 반성이 결여된 지도자의 현실인식은 한국 역사를 보면 수시로 등장하는 ‘일상적 캐릭터’다. 한말 고종 황제가 좋은 예다.
   
   
▲ 일본 시사잡지 ‘사진화보가’ 1905년 12월 8일자에 실린 삽화. 일본 강압에 의한 을사조약 체결 당시를 묘사한 것으로 오른쪽 커튼 뒤에 숨은 인물이 고종이다.

   일본의 ‘사진화보가’ 묘사한 망국 당시 고종
   
   최근 일본 박문관(博文館)이 발행한 1905년 12월 8일자 잡지를 하나 구입했다. 사진화보가(寫眞画報家)란 이름의 시사교양지로, 한반도·만주·중국·러시아에 관한 당시의 정세 분석이 주된 내용이다. 상황을 아주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잡지의 특집은 1905년 11월 17일 이뤄진 을사조약(乙巳條約), 즉 제2차 한·일 협약을 다뤘다. 한국 외교권이 박탈되고 통감정치를 강요당한 협약이다. 일본인 중심으로 기록된 것이기에 왜곡이나 과장이 많다. 그러나 당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특히 조선 왕실과 지도자들이 보여준 태도의 윤곽은 유추해볼 수 있다. 전부 살펴보자면 길어지지만, 필자가 가장 관심 있게 본 부분은 ‘패의 결단’에 관한 부분이다. 구체적으로는 나라를 잃을 때 보여준 고종의 자세다.
   
   당시 특별대사로 조선에 온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1905년 11월 15일 고종 알현에 이어, 17일 저녁 8시 다시 알현을 요청한다. 하루 종일 계속된 각료회의에도 불구하고 외교권 박탈을 둘러싼 일본 측 요구가 관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참정대신 한규설은 을사조약 반대의 최선봉에 선 인물이다. 을사조약 찬성에 앞장선 학부대신 이완용 집에 대한 방화사건도 17일 발생한다. 유학자 수백 명의 반대탄원도 성 밖에서 진행됐다. 모든 상황을 감안한 결과, 이토는 고종을 협박해 결론을 내려 했다. 상시 대기 중인 일본 군대 1000여명이 언제라도 밀고 들어올 상황이었다. 그런데 고종은 몸이 안 좋다면서 이토를 피한다. 결국 대신 8명이 모여 신협약안에 대한 재토의에 들어간다. 결론은 5 대 3으로 을사조약 찬성이다. 1905년 11월 18일 새벽 2시의 역사다. 독립주권이 상실되고, 친일파의 원조가 된 을사오적이 탄생한 순간이기도 하다.
   
   1905년 을사조약 최종무대에 고종은 없다. 진짜 몸이 불편했을 수도 있고, 이토의 협박이 두려워 나오지 않았다고도 볼 수 있다. 어떤 이유에서든, 분명한 것은 고종 부재하에 맞이한 망국이다. 박문관 잡지에 그려진 삽화를 보면 고종은 커튼 뒤에 숨어 있는 듯, 어두운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나쁘게 말하자면, 가장 중요한 최종 단계에 병을 이유로 대신들에게 책임을 물린 것이다. 외부대신 박제순은 을사오적 중 한 명으로 통한다. 원래 박제순은 을사조약에 반대한 인물이다. 그러나 고종이 자리를 피하는 것을 보고 “(반대지만) 만약 폐하가 수락하는 것이라면 받아들이겠다”고 발을 뺀다. 이토가 고종 부재를 을사조약 승낙으로 해석하면서 대신들을 몰아세웠기 때문이다. 상황을 모르고 박제순이 급변했을까. 당시 상황을 보자면 고종이 내세울 승의 카드가 거의 없다. 그러나 만약 고종이 마지막 회의에 직접 참가해 ‘패의 성단’을 발표했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났을까. 나라를 뺏기지만 힘을 키워 언젠가 문명대국에 나서자는 식의 발언을 던졌다면 이후 어떤 역사가 펼쳐졌을까.
   
   IMF 극복은 ‘패의 결단’을 통해 ‘승의 역사’가 창조된 대표적 본보기라고 생각한다. 역사가들 중 일부는 김영삼 대통령을 IMF를 불러일으킨 무능한 인물이라 평가한다.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고 말한 우물 안 민족주의가 IMF사태로 이어졌다고 보는 사람들도 많다. 필자는 IMF 원인에 대한 얘기보다 이후의 대응 자세에 대해 언급하고 싶다. 1997년 11월 22일 김 대통령의 대국민담화가 생방송으로 나왔다. “IMF의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 용서를 구한다. 국민 모두 힘을 합쳐 이겨낼 수 있다고 믿는다.” 담화의 핵심이다. 한국이 짧은 시간 안에 IMF를 탈출한, 승의 역사를 곧바로 창조해낸 데는 패의 결단을 가감 없이 국민에게 전한 지도자의 고해성사가 배경에 있었다고 믿는다.
   
   지난 8월 1일 일본의 제199회 임시국회가 열렸다. 한국에서는 무관심하게 대했지만, 이번 임시국회는 나루히토(德仁) 천황의 일본 국회 데뷔식이었다. 레이와(令和)시대 이후 맞이한 최초의 국회 공식일정이다. 연미복 차림의 나루히토는 새로 선출된 참의원을 상대로 “국가 최고기관으로서 사명을 다하고 국민의 신탁에 응할 것을 희망한다”고 말했다. 천황의 담화가 행해진 바로 다음 날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가 이뤄졌다. 나루히토는 태평양전쟁과 무관한 1960년생이다. 한국에 대해 ‘No’라고 말하기 시작한 아베의 비수(匕首)가 전후세대 천황의 국회 데뷔와 함께 던져진 셈이다.
   
   
   고백과 결단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지도층
   
   일본인들 중 일부는 1945년 8월 15일을 ‘일본 역사상 가장 길었던 날(日本のいちばん長い日)’로 표현한다. 패전의 고통이라는 점도 있지만, 성단 직후 일어난 청년장교들의 반란이 가장 큰 이유다. 미리 녹음된 옥음 방송 테이프를 탈취하기 위해 NHK 방송국 점령에 들어간다. 천황이 납치될 수도 있는 아찔한 순간이 8월 14일 심야에 벌어졌다. 천황을 앞세운 청년장교들이 1억 전원옥쇄를 끝까지 부르짖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민족주의·국가주의에 불타는 비이성적 목소리는 당장에 듣기 좋고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비친다. 반면 현실을 직시하는 이성적 판단은 항상 소수이고 배척당하기 쉽다.
   
   한·일 역사상 ‘가장 긴 여름’이 이미 시작된 듯하다. 모든 것이 그러하듯 문제의 근본은 스스로에게 있다. “모든 것이 나의 책임이다. 모두 함께 문제를 헤쳐나가자”는 고백과 결단을 지도층이 부끄러워하지 않는 한 위기가 곧 기회다. 상대에 대한 칼보다 고해성사와 자기반성을 앞세우는 8·15 광복절을 기대해본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