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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회/르포
[2570호] 2019.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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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反日 불똥 튄 ‘제포왜관’

▲ 도로 공사 중 발견된 경남 창원시 진해구 제덕동의 제포왜관터(붉은 원 안). photo 부산진해경제자유구역청
‘위안부 피해 할머니 사과도 없는 일본 놈 문화재 보전이 웬 말인가’.
   
   지난 8월 6일 찾아간 경남 창원시 진해구 제덕동의 한 야산 중턱에는 이런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지나다니는 사람조차 보기 힘든 고갯마루에 반일(反日) 현수막이 내걸린 까닭은 이곳이 ‘제포왜관’의 옛 터인 까닭이다. 제덕동 괴정마을 어귀에는 ‘일제 문화재 지정 결사반대’라는 현수막도 내걸려 있었다.
   
   왜관(倭館)은 조선시대 때 왜인들이 조선 조정의 허가를 받아 모여살던 집단거류지다. 이 중 제포왜관은 조선 초 왜인들에게 개항한 ‘삼포’(제포·부산포·염포) 중 가장 규모가 큰 곳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한국 대법원의 징용공 판결 문제로 촉발된 최악의 한·일 관계에 맞물려 ‘제포왜관’ 발굴 사업에도 불똥이 튈 조짐이다. 일부 주민들이 “일본 관련 문화재”라며 문화재 지정을 반대하고 나서면서다.
   
   제포왜관터가 확인된 것은 지난 3월. 부산과 창원을 연결하는 국도 2호선에서 부산신항 배후부지로 이어지는 진입도로를 내기 위해 야산을 허물던 중, 축대와 담장 등 건물 흔적과 함께 도자기와 기와 파편 등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기왓장에는 ‘대명정덕팔년춘조(大明正德八年春造)’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1513년(명나라 정덕 8년) 봄에 만들어진 기와라는 뜻으로, 제포왜관 위치가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과거 ‘내이포(乃而浦)’ ‘제포(薺浦)’라고 불린 창원시 진해구 제덕동 일대는 오래전부터 왜관이 존재했다는 설(說)이 파다했다. 한 주민은 “예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이 일대 이름이 ‘(왜)관터’”라며 “과거 인근 바다를 토사로 매립했을 때는 흙을 쏟아붓자 거대한 수중 목책이 솟아오르기도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제포왜관은 이야기로만 전해졌을 뿐, 지금까지 정확한 위치와 규모를 파악할 길이 없었다.
   
   제포왜관터로 추정되는 곳에서 유적과 유물이 대거 출토되면서 도로 공사는 전면 중지됐다. 원형을 보존하라는 문화재청의 명령에 따라서다. 이날 제포왜관터에 올라가 보니 도로 공사로 흉하게 속살을 드러낸 야산은 공사가 중지된 상태였다. 도로 준공예정일(2020년 3월)을 맞추기 어려울 듯 보였다. 창원시는 제포왜관터를 경남도 지방문화재로 우선 지정한 뒤 국가 사적으로 격상시킨다는 계획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일부 주민들이 제포왜관터가 일본 관련 문화재라며 문화재 지정을 반대하고 나서면서 난항을 겪고 있다. 그간 이 일대 주민들은 마을을 관통하는 도로 공사로 인한 소음과 분진 피해에 시달려왔다. 주민들은 제포왜관 일대가 문화재로 지정될 경우 재산권 행사에 제약이 가해질 수 있다는 우려를 하고 있다. 여기에 최근 한·일 관계 악화가 제포왜관터 문화재 보존 및 지정 반대에 좋은 구실로 떠오른 셈이다.
   
   실제 지난 6월 말 제덕동 괴정마을회관에서 진행된 ‘문화재 지정 및 복원 주민설명회’ 때는 일부 주민들이 강하게 반발했다고 한다. 한 주민은 “일부 주민들이 ‘설명회’를 토론회 또는 협의회로 형식을 바꿔달라고 강하게 요구했다”고 말했다. 또 일부 주민들은 마을 전체를 사들인 다음에 주민들을 이주시킨 후 왜관 발굴사업을 추진할 것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진다.
   
   예기치 못한 사태 진전에 각 기관들의 입장도 조금씩 엇갈린다. 문화재청이야 제포왜관의 역사적 중요성에 비추어 원형을 보존한 후 추가 발굴 및 문화재 지정 등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조선 초 일본을 상대로 개항한 삼포 가운데 부산포와 염포(울산)는 각각 부산진시장과 현대자동차 공장이 들어서면서 원형을 찾을 수가 없는 상태다. 제포왜관터가 발굴된 곳은 그간 별다른 개발이 이뤄지지 않아 원형이 잘 보존돼 있다.
   
   실제 제포왜관터로 추정되는 곳에 올라가 보니 거대한 주춧돌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한쪽에는 문화재 추가유실을 막기 위해 설치한 듯한 파란색 방수포가 토양을 덮고 있었다. 관계 기관 위탁으로 발굴을 진행한 문화재 발굴 전문기관인 두류문화연구원 최헌섭 원장은 “400~500년 전 왜관터라 사실 별 기대를 안 했는데, 경작지를 걷어낸 뒤 보존 상태가 그 정도로 좋은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반면 도로 개설 주체인 부산진해경제자유구역청은 사실 부산신항 배후부지 진입도로 공사 현장에서 문화재가 대거 출토되자 당혹스러운 입장이었다. 공사가 중지된 도로는 국도 2호선에서 현재 부산신항 준설토 매립지 위에 36홀 골프장이 조성돼 있는 부산신항 배후부지까지 이어지는 도로였다. 이 일대에 장차 부산신항 제2신항까지 조성되면 대형 컨테이너트럭의 원활한 통행을 위한 넓고 곧은 도로가 필수적이다.
   
   이에 부산진해경제자유구역청은 이 일대 토지를 매입해 왕복 6차선의 직선도로를 개설하려고 계획해왔다. 이미 제포왜관터가 있는 야산 바로 앞까지는 왕복 6차선 도로가 닦여 있는 상태다. 부산진해경제자유구역청 경남본부 기반사업팀의 한 관계자는 “제포왜관터 아래로 터널을 뚫는다는 새로운 계획을 세운 상태”라면서도 “터널을 뚫을 경우 공사비 증액 등이 필요해 확정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 제포왜관터에 내걸린 현수막. photo 이동훈

   한·일 관계, 외교적 카드로 써야
   
   최악의 한·일 관계를 타개하기 위해 제포왜관터를 잘 활용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제포는 대마도 정벌을 단행한 조선 태종 때인 1407년 개항한 항구다. 한때 삼포(제포·부산포·염포) 중 가장 규모가 크고 번성했다고 한다. 부산대 사학과 김동철 교수에 따르면, 조선 성종 때인 1494년 제포에 거주한 왜인 가구수와 인구는 각각 347호에 2500명으로, 부산포(127호·453명), 염포(51호·152명)를 합친 것보다 많았다.
   
   삼포왜란(1510년) 때는 왜군에 의해 인근 웅천읍성이 함락될 정도였다. 삼포왜란 직후 체결한 임신약조(1512년)에는 ‘왜인의 삼포 거주를 허락하지 않고 제포만 개항한다’는 조항이 첫 번째로 삽입됐다. 하지만 사량진왜변(1544년) 이후 정미약조(1547년)를 체결한 후에는 국방상의 이유로 가덕도 서쪽에 있는 제포왜관은 공식 폐쇄되고, 부산포 단일항구 개항 체제로 변하면서 제포는 사양길을 걷는다.
   
   그래도 지금 이 일대에는 조선 세종 때인 1434년 제포왜관 내 왜인들의 움직임을 통제하기 위해 축조한 웅천읍성(경남도 기념물 15호)을 비롯해, 임진왜란 때 왜군 선봉장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구축한 웅천왜성(경남도 기념물 79호) 등이 잘 보존돼 있다.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지만 왜인들의 준동을 막기 위해 구축한 제포진성, 제덕토성 등 대일(對日) 방어시설의 흔적도 찾을 수 있다.
   
   기존 유적에 새로 발굴한 제포왜관터까지 잘 활용하면 한·일 관계 교육 및 관광자원으로도 활용할 수 있는 셈이다. 최헌섭 두류문화연구원장은 “한반도에 남아 있는 다른 일본 침략 유적과 달리 왜관은 우리가 힘의 우위에 있을 때 왜인들에게 먹고살라고 내어준 공간으로 그 성격이 다르다”며 “한·일 관계가 안 좋은 요즘 제포왜관을 외교적 카드로 잘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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