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4일 일산 위시티 2단지에서 장기수선 공사에 반대하는 주민 200여명이 플래카드와 촛불을 들고 집회를 열었다. ⓒphoto 위시티 주민
지난 8월 4일 일산 위시티 2단지에서 장기수선 공사에 반대하는 주민 200여명이 플래카드와 촛불을 들고 집회를 열었다. ⓒphoto 위시티 주민

일산의 대표적인 대규모 아파트 단지 중 하나로 꼽히는 고양시 식사동 ‘위시티 2단지’에 들어서면 나무와 풀숲으로 둘러싸여 마치 조용한 리조트에 와 있는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밖에서 보이는 평화로운 외양과 달리 최근 이 아파트는 주민들 간의 극심한 대립과 갈등으로 홍역을 앓고 있다. 지난 8월 13일 찾아간 위시티 2단지 내부 곳곳에는 빨간색 글씨의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이 현수막에는 ‘입주민의 동의 없는 불법 장기수선 공사 절대적으로 반대합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이런 현수막이 걸린 까닭은 아파트 ‘장기수선충당금’을 두고 입주자대표회의와 주민들 사이에 갈등이 빚어졌기 때문이다. 장기수선충당금이란 소유한 공동주택 ㎡당 약 100원 안팎으로 모든 소유주가 매달 납부해야 하는 비용이다. 이 돈은 매달 아파트관리비를 통해 걷어 모아둔 뒤 낡고 헐어 있는 곳을 재공사할 때 쓰인다.

아파트관리비와 공사비를 둘러싸고 입주자대표회의와 입주민들 간의 갈등은 종종 있어왔지만, 위시티 2단지의 경우 주민들 간에 10여건의 고소·고발까지 난무하는 심각한 상황이다. 심지어는 공사에 반대하는 주민들이 단지 내에서 촛불집회까지 여는 지경에 이르렀다. 공사에 반대하는 주민들은 시공업체 차량의 진입을 막기 위해 매일 아침 아파트 정문에서 ‘보초’까지 서고 있다. 아파트 인근 상인들과 부동산 중개업자들도 “요즘 그 문제 때문에 아파트 전체 분위기가 뒤숭숭하다”고 우려했다.

위시티 2단지 아파트의 주민들은 현재 입주자대표회의가 추진하고 있는 ‘장기수선계획 및 하자보수’ 공사비용 45억원이 지나치게 큰 액수라고 주장하고 있다. “30억원 안팎이면 할 수 있는 공사인데, 입주자대표회의의 독단적 결정으로 무려 45억원가량의 공사를 계약했다”며 “입주자대표회의 회장은 45억원이라는 공사비용이 어떻게 나오는지 주민들에게 한번도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해당 공사를 준비·추진한 입주자대표회의 회장은 “업체 선정부터 입찰 공고까지 모두 적법한 과정을 통해 이뤄졌다”며 “입주자대표회의가 시공업체와 결탁해 의도적으로 ‘비싼’ 공사를 밀어붙이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일부 주민들의 의혹 제기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고 맞서고 있다. 입주자대표회장인 강명석씨는 오히려 “변호사 비용까지 모아가며 공사 백지화를 주장하는 이들의 의도 역시 순수하다고만 볼 수 없다”며 “이들의 주장대로 입주자대표회의가 어떤 이권을 얻으려 했다면, 지난 4월부터 지금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공사를 진행했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위시티 2단지는 총 18개동에 1975가구, 약 8000여명이 살고 있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다. 2010년 9월 준공된 이 아파트는 올해 지어진 지 9년째를 맞아 그동안 모아둔 충당금으로 장기수선을 진행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본격적으로 문제가 불거진 것은 올해 4월경. 지난 4월 5일 입주자대표회의가 ‘공사기간 2019년 4월부터 8월까지 시공업체 A와 부가세 포함 45억6000만원으로 낙찰·결정됐다’는 공고를 알린 직후부터다. 이 공고문을 본 아파트 주민 김모씨가 “우리 아파트가 아무리 대단지라고 하더라도 45억원이라는 금액은 도저히 말이 안 된다”고 처음 문제 제기를 하고 나선 것이다. 자신을 ‘아파트 재도장 업계에서 30년 이상 일한 전문가’라고 소개한 김씨는 “예를 들어 현재 내가 맡아서 작업하고 있는 한 신축 아파트의 경우, 2700가구 정도인데도 불구하고 시공비가 40억원에 불과하다”며 “우리 아파트의 장기수선 공사비가 45억여원으로 잡혔다는 공고를 보자마자 ‘이건 해도 너무한다’고 느꼈다”고 했다.

공고가 난 직후 김씨는 즉각 현 입주자대표회장 강씨에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따지며 ‘공사 금액이 과하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이에 강씨는 “이미 작년 12월부터 장기수선에 관한 계획을 발표하고 주민동의까지 받았는데 이제 와서 ‘공사 금액이 과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다”며 “적법한 절차를 밟아 진행된 사안”이라고 반박했다. 그러자 김씨는 해당 공사에 대한 공사금지가처분소송을 신청했다.

장기수선 공사에 반대하는 주민들은 기존 입주자대표회의 임원들을 해임하고 시공업체와의 계약을 무효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photo 위시티 주민
장기수선 공사에 반대하는 주민들은 기존 입주자대표회의 임원들을 해임하고 시공업체와의 계약을 무효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photo 위시티 주민

‘공사 금액 과하다’는 반발로 갈등 시작

이후 김씨는 이 문제를 입주민 카페를 통해 본격적으로 알리기 시작했다. 김씨는 “동종업체 여러 군데에 이 정도 아파트 규모의 장기수선 공사 견적을 문의해본 결과, 공사비용은 20억원대 후반에서 30억원대 초반이라는 답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반면 강씨는 “30억원 초반이면 공사가 된다는 세부 내용은 공개하지 않고 그냥 ‘30억원대이면 된다’는 식으로만 주장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공사에 반대하는 주민들은 과한 공사 금액뿐 아니라 애초에 입찰 과정에서 업체들 간의 담합이 있었다는 의혹까지 제기하고 있다. 또 최종 선정된 업체가 이전에 다른 아파트 공사 입찰을 받는 과정에서 담합을 했다는 사유로 행정처분을 받았는데, 이 내용을 입찰 과정에서 사전에 알리지 않았으므로 무효라는 주장도 펴고 있다. 반면 입주자대표회장 강씨는 “해당 행정처분은 업체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개 업종의 면허 가운데 하나의 면허에만 받은 것”이라며 “행정처분을 받은 업종의 면허는 우리 아파트 공사와는 무관하기 때문에 그것 자체로 결격사유라고 할 수 없다”고 반박하고 있다.

김씨가 입주민들이 사용하는 인터넷 카페를 통해 공사비가 과다하다는 문제를 제기하자 이에 동조한 주민들이 늘면서 ‘2단지 정상화 추진위원회(가칭 정추위)’까지 결성됐다. 이 위원회는 기존 입주자대표회의의 장기수선 공사를 저지하겠다고 나선 상태다. 이런 과정에서 입주자대표회의는 시공업체에 계약금 9억원을 송금했다. 강씨는 “일부 반발로 인해 일방적으로 공사가 지연되고 있는 상황이라 해도 계약금 지불은 절차상 정해진 일”이라는 입장이다. 반면 반대 측 주민들은 “입주민들이 제기한 이의에 소명조차 없이 일방적으로 계약금을 송금한 건 명백한 위법 행위”라며 입주자대표회장을 형사 고발했다.

‘정추위’를 결성하는 데 앞장선 한 입주민은 강씨와 인터넷 카페상에서 험담을 주고받다 폭행 시비까지 붙기도 했다. 또 일부 주민들이 아파트 정문에서 공사를 진행하려는 시공업체의 차량을 몸으로 막는 과정에서 시공업체 관계자와 몸싸움까지 벌어졌다. 공사 금액이 적정한가를 두고 불거진 문제가 결국 입주민들 사이의 감정싸움으로까지 번진 것이다. 정추위의 주장에 찬성하는 주민 약 200여명은 8월 들어 주말마다 아파트 단지 내에서 촛불집회를 열고 있다.

급기야 현재 이 아파트의 입주자대표회장을 비롯해 입주자대표회의를 구성하는 각 동대표들에 대한 해임건의안까지 상정된 상황이다. 정추위는 기존의 회장과 동대표들을 해임하고 입주자대표회의를 새롭게 구성해 기존의 공사 계약에 대한 무효 소송까지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재 기존 입주자대표회의는 직무정지 상태다.

‘눈먼 돈’ 취급받는 아파트관리비

장기수선충당금을 비롯해 아파트관리비를 두고 일어나는 주민들 간의 갈등은 그동안 꾸준히 있어왔다. 비교적 잘 알려진 사건이 배우 김부선씨의 아파트 난방비 관련 소송이다. 김씨는 자신이 살고 있던 서울 옥수동 아파트의 일부 주민들은 아예 난방비를 내지 않았고 여기에 아파트 관리소장과 전 동대표 등이 관여했다는 의혹을 제기해 주목받았다. 이 과정에서 김씨는 ‘난방열사’라는 별칭까지 얻었다. 결과적으로 이 사건은 300가구 이상 공동주택은 매년 1회 회계감사를 받아야 한다는 이른바 ‘김부선법’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 법이 현장에서 실제로 잘 지켜지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지난 3월 경기도는 2018년 10월 29일부터 11월 30일까지 도내 의무관리대상 공동주택 4201개 단지 가운데 5000만원 이상 공사계약을 맺거나 분쟁이 발생한 49개 단지를 대상으로 감사를 실시한 결과 47개 단지에서 총 282건의 부적정 공사비 집행을 적발했다. 이에 이재명 경기도지사까지 나서 “아파트관리비 부정부패를 뿌리뽑겠다”며 팔을 걷어붙였다. 이 지사는 5000만원 이상 보수공사 발주 시 설계(견적)·감리 의무화, 특허공법이 포함된 부분과 포함되지 않은 부분 분리 발주, 주관적 적격심사평가 기준 개선, 주택관리업자 및 사업자 선정 관련 입찰서류 최소 5년 이상 의무 보관, 미보관 시 과태료 부과 등 아파트 관리비 관련 비리 예방을 위한 5가지 방안을 제안하기도 했다.

국민 10명 중 6명이 아파트에 살고 있어 ‘아파트공화국’이라는 이름까지 생긴 한국 사회 현실에서 매달 꼬박꼬박 빠져나가는 아파트관리비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적다는 평가가 나온다. 주택산업연구원에 따르면, 한 해 걷히는 아파트관리비 시장 규모는 약 12조원에 달한다. 하지만 아파트관리비는 ‘어디에 얼마가 어떻게 쓰이는지’ 알기 어려운 ‘눈먼 돈’ 취급을 받아왔다. 또 상당수 아파트 입주민들이 고지서에 적힌 대로 납부만 할 뿐, 세부적인 사용 내역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는 현실이 문제를 키운다는 지적도 있다.

서울시립대 세무학과 김우철 교수는 “보통 아파트 주민들은 집값에는 예민하게 반응하는 반면 실질적으로 내 지갑에서 빠져나가는 아파트관리비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 경향이 있다”며 “아파트관리비에 관련한 불필요한 갈등을 없애기 위해서는 법적·제도적 보완도 필요하지만, 입주민들이 지출 과정 등을 꼼꼼히 살펴봐서 비리가 발생할 수 있는 환경 자체를 개선해야 한다”라고 했다.

곽승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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