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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회/르포
[2572호] 2019.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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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국사학도’ 기자가 이영훈 교수에게 묻다

이선민  조선일보 선임기자 

한참을 망설이다가 이 글을 씁니다. 지난 7월 초 주익종 박사님에게서 이 교수님을 비롯한 이승만학당의 연구자들이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을 내신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한편으로는 반갑고, 다른 한편으로는 걱정도 됐습니다. 저도 문재인 정부가 몰아치는 관제(官製) 민족주의의 종족주의적 성격이 시대착오적이라고 생각해서 많이 걱정해온 터였기에 누구보다도 이 주제에 정통하신 이 교수님께서 한국 사회와 국가를 쇠퇴의 길로 밀어넣고 있는 ‘종족적 민족주의’를 몰아내는 데 깃발을 들고 나오신 데 박수를 보내고 싶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종족주의를 부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는 나머지 우리 사회와 국민이 받아들이기 힘든 주장을 하시지는 않을까 우려도 됐습니다. 평소 이 교수님이 쓰신 책과 글을 즐겨 읽고 인터뷰 등을 통해 대화도 여러 차례 나누어서 이 교수님의 지론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일 종족주의’를 받아서 읽으며 ‘역시~’라는 감탄이 나왔습니다. 사실 확인과 논리 전개가 거친 일부 필자의 글 두어 편이 거슬렸지만 책의 핵심 주장들과는 거리가 있기에 그 부분에는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습니다. 다른 필자들의 글 대부분은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둔 합리적인 주장을 펼치고 있어서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그동안 역사 교과서나 교양서가 가르쳐온 상식이나 통념과 어긋나는 서술들에 당황한 독자도 많았겠지만 저는 꾸준히 관련되는 글을 읽고 기사로도 소개해온 터라서 낯설지 않았습니다. 이 교수님께서 그동안 펴내신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이번 책을 통해서도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몇몇 글의 어떤 부분에서는 불편함을 느꼈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입니다. ‘이런 주장은 지나친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책 전체를 관류하는 사실의 힘을 높이 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더구나 ‘종족적 민족주의’를 선동해온 좌파 인사들과 일부 언론이 이 책에 대한 공격에 나서 필자들이 곤욕을 치르는 상황에서 같은 편 내에서의 이견(異見) 제시는 피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지난 7월 말 조선일보에 실린 ‘종족적 민족주의를 넘어 시민적 민족주의로’라는 칼럼을 통해 이 책에 대한 제 생각의 일단을 짧게 밝히는 데 그쳤습니다.
   
   
   서술되지 않은 내용 때문에 불편했던 독도 관련 글
   
   그러나 그 뒤로 ‘반일 종족주의’를 읽은 우파 인사들이 여러 명 잇달아 당혹감을 나타내는 것을 보고 그들의 ‘두통(頭痛)’이 어디서 비롯됐으며 해결책은 무엇인지를 누군가 지식인이 나서서 설명해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우파 내의 지적 혼란은 계속되고 계속해서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책이 특정 주제를 다룬 학술서가 아니고 광범위한 문제들을 여러 필자가 나눠서 집필한 대중서이기에 어느 한 분야를 전공하는 학자보다는 관련 주제들을 두루 다뤄온 언론인이 그 책무를 지기에 적합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면 지난 수십 년 동안 학술 담당 기자로서 이 책에서 다룬 대부분의 주제를 접했고 약간의 지식을 갖고 있는 저도 그 후보가 될 수 있습니다.
   
   다행히도 저는 이 교수님을 비롯해서 이 책의 주요 필자들과 친분이 있어서 건설적이고 발전적인 토론이 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이제부터 제가 제기하는 문제들은 이 교수님뿐만 아니라 다른 필자들과도 관련이 있지만 편의상 대표집필자인 이 교수님께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먼저 제가 쓰는 글은 ‘세계인’ ‘자유인’을 지향하는 학자에게 ‘시민적 민족주의’를 주창하는 언론인이 드리는 질문이라는 점을 밝히고 싶습니다. 말하자면 ‘우파 세계주의자’에게 ‘우파 민족주의자’가 던지는 질문인 것이죠. 제가 그동안 써온 글이나 해온 말로 볼 때 사상적으로 우파라는 사실에 의문을 가지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지금부터 서술하는 내용이 ‘반일 종족주의’가 주된 공격 대상으로 삼고 있는 좌파 민족주의가 아니라 우파 민족주의의 입장에서 제기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는 게 독자나 국민의 이해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글을 쓰기로 한 뒤에 먼저 저의 불편함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원인의 하나는 ‘반일 종족주의’에 서술된 내용 자체보다 반드시 서술해야 하는 내용이 빠졌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이 책에서 제가 가장 불편함을 느낀 ‘독도, 반일 종족주의의 최고 상징’이란 글이었습니다.
   
   이 교수님께서 쓰신 이 글은 그동안 신라시대 이래 독도의 옛 이름으로 간주되던 ‘우산도(于山島)’가 실재하지 않는 환상의 섬이었다는 것을 고증하며 독도가 한국의 고유영토라는 주장을 부인합니다.
   
   그래서 사실상 무주지(無主地)였던 독도를 1905년 일본이 먼저 영토로 편입했고, 한국은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뒤인 1952년 1월 평화선 발표로 독도를 영토에 편입했다는 것입니다. “한국 정부가 독도가 역사적으로 고유한 영토임을 증명하기 위해 국제사회에 제시할 증거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은 실정” “그로 인해 한국 정부가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로 가져가자는 일본 정부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는 처지”라고 주장합니다.
   
   ‘우산도’를 둘러싼 논란이나 17세기에 한국의 독도 영유권 확인에 크게 공헌한 안용복의 활동 산물인 ‘울릉도 쟁계(爭界)’, 일본 막부가 발행한 ‘도해면허(渡海免許)’의 성격 등에 대한 해석 차이는 전문가들 사이에 심층 토론이 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독도가 한국 영토였다는 주장의 핵심 근거라고 할 수 있는 ‘태정관문서(太政官文書)’에 대한 언급이 이 책에 전혀 없는 것은 납득할 수 없습니다. 1868년 메이지 정부가 들어선 뒤 국가최고기관인 태정관은 죽도(竹島·울릉도)와 송도(松島·독도)가 일본 영토가 아니라는 사실을 거듭해서 확인했고 이를 훈령 문서로 작성했습니다.
   
   또 17세기 이후 만들어진 많은 일본의 고문서와 지도들이 송도(독도)를 조선 영토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1990년대 이후 이들 자료를 이용한 일본과 한국 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메이지시대 일본 정부가 독도는 울릉도의 부속도서로 조선 영토이고 일본 영토가 아님을 인정했다는 사실이 논증됐습니다.
   
   
▲ 1877년 일본 태정관이 ‘죽도(竹島·울릉도)와 그 외 일도(一島·독도)는 일본과 관계없는 곳’이라는 결정을 내무성에 내려보낸 문서와 두 섬을 그린 부속지도.

   대한제국도 독도 침탈에 항의문서 작성했었다
   
   ‘반일 종족주의’는 독도를 둘러싼 한·일 간 영토 분쟁의 ‘결정적 시점(critical point)’이 1905년 일본의 독도 편입이었다고 주장합니다. 국제법에서 말하는 ‘결정적 기일(critical date)’은 국가 간의 영토 분쟁에서 판정 기준이 되는 날로 그 이후에 발생한 사실은 증거로 채택되지 않습니다. 일본이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한 뒤 이를 알게 된 대한제국이 일본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제법적으로 독도는 일본 영토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역사적 사실은 이와 상당히 다릅니다. 1906년 3월 울도군수와 강원도관찰사로부터 일본의 독도 침탈을 보고받은 대한제국 정부는 즉각 항의문서를 작성했습니다. 하지만 을사조약으로 1906년 1월부터 일제 통감부가 한국 정부의 외교권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외교문서로 발송되지 못했습니다.
   
   대한제국 정부의 항의문서는 규장각에 보관돼 있고 대한제국의 항의 사실은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등 주요 신문에 보도됐습니다. 일본의 조선 침략이 본격화하는 과정에서 첫 번째 제물(祭物)이 된 일본의 독도 편입에 대해 시대적 상황에 대한 설명이 없이 겉으로 드러난 것만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저는 독도 문제에 관한 ‘결정적 기일’은 1905년 일본의 독도 편입이 아니라 1870년대 메이지시대 일본 정부의 최고당국자가 작성한 ‘태정관문서’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일본 정부와 직접 연결되는 메이지 정부가 확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본 정부는 태정관문서의 존재를 숨기거나 의미를 깎아내리지만 한·일 양국의 연구자들에 의해 밝혀진 역사적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미국 판단 흐리게 한 패전 후 일본의 독도 팸플릿
   
   또 이는 국제법적으로 보아 1950년 연합국들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사전 준비를 위해 작성한 ‘구(舊) 일본 영토 처리에 관한 합의서’에 일본 영토의 기준 일자를 ‘1894년 1월 1일’로 한 것과도 부합합니다. 연합국이 이렇게 정한 이유는 일본이 외부 식민지 확보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한 청일전쟁 이후에 점령 또는 편입한 영토는 일본 영토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1905년 일본이 영토 편입을 선언한 독도는 당연히 일본 영토에서 제외됩니다.
   
   ‘반일 종족주의’에는 제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인 연합국과 패전국인 일본 사이의 강화조약인 샌프란시스코조약의 체결을 한 달 앞둔 1951년 8월 미 국무부가 독도 영유권과 관련하여 한국 정부에 보내온 회신이 소개돼 있습니다. “독도와 관련해서 우리 정보에 따르면 한국의 일부로 취급된 적이 없으며, 1905년 이래 일본 시마네현 오기섬 관할하에 놓여 있었다. 한국은 이전에 결코 이 섬에 관한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다”는 내용입니다. 이 회신에 대해 이 교수님께서는 “읽으면 등골이 서늘할 정도로 정확한 대답”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과 다른 이런 회신이 나오게 된 배경은 독도 연구자인 정병준 이화여대 교수가 지은 ‘독도 1947’(2010·돌베개)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일본 외무성은 1947년 6월 ‘일본 본토에 인접한 소도서(小島嶼)(Minor Islands Adjacent to Japan Proper)’라는 팸플릿을 간행했습니다. 일본어 제목이 ‘일본의 부속소도(付屬小島)’라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이 팸플릿은 연합국들과의 강화조약에 대비하여 일본의 영토 범위를 선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일본은 독도와 울릉도를 일본의 부속도서에 포함시켰습니다. 특히 “‘리앙쿠르암(독도)’은 한국 명칭이 없으며 한국에서 제작된 지도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팸플릿은 도쿄의 연합군최고사령부와 워싱턴의 미 국무부에 대대적으로 홍보됐고 독도에 대한 미국의 판단을 한동안 흐리게 했다고 정 교수는 설명합니다.
   
   하지만 영국·호주·뉴질랜드 등 다른 연합국들은 일본의 선전에 넘어가지 않았고 미국 내에서도 독도는 한국 영토라는 지적이 잇달아 나오는 바람에 결국 미국은 중립적 입장으로 돌아섰습니다.
   
   당시 일본이 대미(對美) 선전전에 적극 나선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도쿄에 진주한 연합국최고사령부는 1946년 1월 29일 연합국최고사령관지령(SCAPIN) 제677호를 발포하여 일본과 한국의 행정 관할 구역을 정하면서 제주도·울릉도·독도를 한국에 포함시켰습니다. 1950년 연합국들이 강화조약의 사전 준비로 작성한 ‘구(舊) 일본 영토 처리에 관한 합의서’는 대한민국에 이양하는 섬에 제주도·거문도·울릉도·독도를 포함시키기로 했습니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1951년 유엔군과 미국 공군은 ‘한국방공식별구역(KADIZ)’을 설정하면서 독도를 포함시켰습니다. 이처럼 독도를 점차 국제사회가 한국 영토로 인정하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이를 뒤집고 독도를 일본 영토로 승인받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던 것입니다.
   
   이 같은 시대적 배경에 대한 설명은 전혀 없이 특정 시기에 나온 미 국무부의 문건 하나가 역사적 진실을 담고 있는 것처럼 서술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 1946년 1월 도쿄의 연합군최고사령관이 일본과 한국의 관할 구역을 나눈 연합국최고사령관지령(SCAPIN) 제677호의 부속지도. 독도를 ‘TAKE’로 표시하고 명료하게 한국 관할에 포함시켰다.

   독립 뒤 비약적 경제성장이 의미하는 것
   
   다음으로 검토해보고 싶은 글은 김낙년 교수님께서 쓰신 ‘일본의 식민지 지배방식’입니다. 저는 엄밀한 학문적 성과에 입각해서 객관적으로 서술된 이 글의 내용에 아무런 이의가 없습니다. 우리의 통념이나 상식과 다르더라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글 역시 서술되지 않았거나 충분히 설명되지 않은 부분이 있고 그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느낍니다.
   
   “해방 전의 조선 경제는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통합 체제에 편입되어 있었고, 그로 인해 역내(域內) 무역이 활성화되고 산업구조도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이 과정은 당초 자본과 기술에서 앞선 일본인이 주도하고 있었지만 조선인이 배제된 것은 아니고 조선인의 공장과 회사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는 김 교수님의 강의를 들은 학생들은 “그동안 교과서로 배웠던 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일제를 어떻게 비판해야 할지 모르겠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해 버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든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김 교수님은 ‘일본인을 포함한 세계인이 수긍할 수 있는 상식과 역사적 사실에 입각해서 일제를 비판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지 못하는 민족주의 역사교육’을 비판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나라의 내일을 만들어갈 젊은 세대들의 그런 당혹감을 풀어주고 일제 통치에 대한 올바른 비판 능력을 길러주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우리 기성세대의 지식인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단초가 김 교수님의 글에 이미 들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일제 시기는) 해방 후와 비교할 때 일본인과 조선인 간, 또는 조선인 내부에서는 지주와 소작인 간의 불평등이 매우 높은 사회였고, 경제성장률 또한 해방 후보다 2분의 1 속도로 느렸기 때문에 그 성장의 효과가 저변에까지 두루 미치지는 못했다.” 여기에 식민지 조선의 경제는 일본 경제권의 한 부분이어서 근대국가다운 자기 완결적 구조를 갖지 못한 기형적 형태였다는 사실이 추가될 수 있겠지요.
   
   ‘반일 종족주의’ 62쪽에는 지난 100년간 한반도 주민의 ‘1인당 소득’ 장기추이 그래프가 표시돼 있습니다. 이 그래프의 광복 전과 후를 비교해 보면 왜 우리 민족이 독립운동을 했는지가 경제적 측면에서도 설명이 됩니다.
   
   일제시기 한반도 주민의 소득은 연평균 2.2%씩 증가했습니다. 평균적으로 한국인보다 부유했던 한반도의 일본인을 포함한 것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광복 후에는 연평균 4.9%씩 증가했습니다. 결국 일제시기에는 한국이 독립했을 때 달성할 수 있었던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일제가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런 사실을 분명하게 지적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 민족이 독립운동을 한 더 중요한 이유는 정치·사회적인 데 있었습니다. 김 교수님의 글은 이 부분도 언급합니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는 동화주의를 추구했다.… 정치 면에서 보면 조선인의 정치적 권리가 인정되지 않았고, 조선인에 대한 억압과 차별이 지속되었기 때문에 이런 동화주의는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하려는 구호에 불과했다.” 일제시기 우리 조상의 대부분은 설사 경제적 풍요가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정치적·사회적 권리를 빼앗긴 상태에서 살기를 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다 더 강조해야 합니다.
   
   이 부분은 경제사 연구자들이 담당할 몫이 아니라고 하실지 모르지만 누구의 책임인가를 따지기 이전에 모든 지식인들이 감당해야 할 책무입니다. 이렇게 이 책이 충분히 서술하지 않은 부분을 보완할 경우 일제시기의 사회경제적 변화라는 역사적 사실은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일제를 올바로 비판할 수 있는 능력을 얼마든지 길러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짚고 넘어가야 할 주제가 ‘식민지 근대화론’입니다. ‘반일 종족주의’는 이 문제를 정면에서 심층적으로 다루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책을 비난하는 일부 인사나 언론이 꼭 ‘식민지 근대화론’을 거론하고, 이 책의 기저에 그와 관련된 쟁점들이 깔려 있기에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교수님께서는 지난 8월 17일자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해 “그것은 남들이 붙인 것이다. 일제의 억압과 지배의 역사로만 보는 게 아니라 억압과 지배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근대인으로 만든 한국인의 역사를 봐야 한다는 게 제 입장”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근대 수용’ 앞장선 한말 애국계몽 세력에 주목해야
   
   이에 앞서 8월 16일 이승만TV에 올린 영상에서는 “일본 식민지 지배의 수탈성을 부정하거나 정당성을 주장하지 않았다”며 “수탈의 체제적 원리와 구조적 양상을 총체로 보자는 취지였다”고 해명하셨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식민지 근대화론’이 일제시기에 이루어진 경제성장과 근대적인 법, 제도의 확립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즉 “식민지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의 힘으로) 근대화가 이루어졌다”가 아니라 “식민지가 됐기 때문에 (일제에 의해) 근대화가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죠. 그리고 이런 주장은 이미 일제시기 이래 일본 학자들이 줄기차게 펴왔고 지금도 일본 우익 인사들의 단골 레퍼토리입니다.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이런 ‘오해’를 더욱 가중시키는 것은 일제시기 직전의 우리 역사에 대한 이 교수님 등의 설명입니다. 즉 고종이 이끌던 대한제국은 경제적으로 거의 파탄할 상황이었고, 정치적·외교적으로도 무능하여 망국(亡國)을 자초했다는 것이죠. 저도 역사학계 일각에서 내세우는 ‘고종 계몽군주론’은 상당히 무리한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반일 종족주의’에서 김용삼 기자가 ‘망국의 암주(暗主)가 개명군주로 둔갑하다’라는 글에서 설파했듯이 조선 왕조가 망한 주요 원인은 고종을 비롯한 집권세력의 잘못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러나 저는 대한제국 시기의 우리 역사를 ‘고종이냐, 아니냐’라는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평면적이고 단선적인 이해는 우선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습니다. 또 그럴 경우 고종을 암주(暗主)로 보는 시각은 일제의 한국 강점을 합리화할 뿐 아니라 자주적 근대화의 가능성을 부인함으로써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연결될 우려가 있습니다.
   
   대한제국 시기의 우리 역사는 ‘자주적 근대화’의 주도권을 놓고 고종 등 집권세력과 애국계몽운동을 벌인 민간 근대문명 세력이 경쟁을 벌인 시기로 이해해야 합니다. 고종이 1897년 대한제국을 수립하면서 ‘전제군주국’을 선포하고 독립협회 세력을 탄압함으로써 민간 근대문명 세력은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지만 그들이 신민회 등 각종 애국계몽단체에 집결해 펼친 교육·언론·산업 등 자주적 근대화의 노력은 나라가 망한 뒤에도 사상과 인물을 통해 대한민국임시정부로 이어져 광복 후 대한민국이 비약적인 근대화를 이루는 원천이 됐습니다.
   
   일제시기 국내에서 식민지라는 엄혹한 상황을 이겨내며 역시 교육·언론·산업 등을 통해 근대화에 힘쓴 민족주의자들의 역사적·정신적 뿌리도 한말에 자주적 근대화를 추진했던 민간 근대문명 세력이었습니다.
   
   이 교수님께서는 2016년 말 필생의 역저인 ‘한국경제사’(전2권·일조각)를 내셨을 때 제가 인터뷰에서 제2권의 부제 ‘근대의 이식과 전통의 탈바꿈’을 “‘근대의 수용’이라고 할 수는 없느냐”고 물었을 때 “애국계몽운동기에 우리 근대문명 세력의 활동이 있었지만 나라를 빼앗겼고 그 이후 근대가 본격 이식됐다”고 답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19세기 후반 이래의 우리 역사는 ‘자주적 근대화’를 추구했던 민간 근대문명 세력-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파 민족주의 세력’이 되겠습니다-의 고난에 찬 ‘근대 수용’ 과정으로 이해해야 일관성 있는 설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근대에 접어든 뒤에 우리 민족이 걸었던 고난의 역사와 대한민국 수립 이후 찬란한 성공의 역사가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다음번 글에서는 ‘반일 종족주의’가 다룬 주제 가운데 가장 뜨거운 쟁점이 되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강제징용 문제를 짚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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