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장성군 장성읍의 장성역. 오는 9월 16일부터 KTX가 정차한다. ⓒphoto 이동훈 기자
전남 장성군 장성읍의 장성역. 오는 9월 16일부터 KTX가 정차한다. ⓒphoto 이동훈 기자

지나치게 많은 정차역으로 ‘코리아택시’란 비아냥을 듣던 KTX가 오는 9월 16일부터 군(郡) 지역에도 정차하게 됐다. KTX를 운영하는 코레일(한국철도공사)이 오는 9월 16일부터 서대전역을 경유하는 호남선 KTX를 전남 장성군(郡)에 있는 장성역에 세우기로 하면서다. 장성역이 있는 장성군의 인구는 4만6000여명이다. 현재 호남선 KTX 일부 열차는 서대전, 계룡, 논산역을 통과하는 옛 호남선(재래선)을 이용한 뒤 익산역에서 다시 고속선에 합류한다. 이 열차를 계속 재래선을 이용해 김제역, 장성역, 광주송정역을 거쳐 목포역까지 보내기로 한 것이다.

장성역은 호남고속선(신선)이 아닌 옛 호남선(재래선)상에 있는 역이다. 일제강점기 때인 1914년 호남선 개통과 함께 생긴 역으로 지금 역사는 1987년 호남선 복선 완공과 함께 들어섰다. 장성역에는 원래 호남선 KTX가 정차하다가 2015년 4월 호남고속철 개통 후부터는 KTX가 정차하지 않는다. 고속선(신선) 완공과 함께 폐지됐던 장성역 KTX가 4년여 만에 부활한 것이다. 코레일에 따르면, 추석 연휴가 끝나는 9월 16일부터 호남선 KTX는 하루 4회씩(상행 2편, 하행 2편) 장성역에 정차한다. 지난 8월 28일 장성역에서 멀지 않은 장성군청에는 ‘9월 16일 KTX 장성역 운행재개 환영’이란 큼직한 현수막도 내걸려 있었다.

하지만 KTX 장성역 정차는 고속철 개통 초 ‘1시(市)1역(驛)’ 원칙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터라 상당한 논란을 불러올 것으로 보인다. 인구 5만명이 채 안 돼 기존의 ITX-새마을이나 무궁화, 누리로(무궁화의 후신) 열차로도 충분히 여객수요를 감당할 수 있는 군 지역에도 KTX를 정차시키는 이유가 뭐냐는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다. 장성역과 함께 KTX가 정차할 김제역 역시 인구 8만5000명에 불과하지만 그나마 ‘김제시(市)’에 속한다. 최고시속 300㎞의 고속 전용선로를 부설한 경부선과 호남선상의 군 지역 정차는 장성역이 유일하다. 코레일 측은 ‘이용객 편의 제고’를 KTX 장성역 정차의 이유로 밝혔다.

새마을보다 느린 장성역 KTX

장성역에 정차하는 KTX는 어차피 재래선을 달리는 터라 기존에 정차하던 ITX-새마을, 무궁화, 누리로 열차와 속도 면에서 큰 차이가 없다. ITX-새마을과 KTX의 속도가 역전되는 현상마저 벌어진다. KTX 장성역 정차를 앞두고 코레일이 배포한 열차시간표에 따르면, 장성역에서 익산역으로 향하는 KTX(572편)의 경우 44분이 걸리는 데 반해, 바로 뒤에 편성된 ITX-새마을(1112편)의 경우 43분이 걸린다. 익산역은 호남선과 전라선 모든 열차가 정차하는 거점역이다. 하행열차 역시 마찬가지다. 익산역에서 장성역으로 향하는 KTX(575편)의 경우 46분이 걸리는 데 반해, 앞선 ITX-새마을(1111편)의 경우 같은 구간을 45분 만에 주파한다.

반면 해당구간을 달리는 KTX는 다른 열차와 별 시간 차가 없는 데도 불구하고 운임이 8400원(일반실 기준)에 달한다. ITX-새마을(7300원)에 비해 1100원 비싸다. 상행선인 광주송정역에서 장성역까지 구간 역시 KTX와 ITX-새마을이 정차역 수도 같고 약 12분의 비슷한 시간대로 주파함에도 불구하고 운임은 KTX가 8400원으로 ITX-새마을(4800원)에 비해 2배 가까이 비싸다. 역시 이 구간을 12~13분의 비슷한 시간대로 달리는 무궁화호(2600원)에 비해 3배 이상 비싸다. 코레일 측은 “KTX 운임은 운임체계에 따라 결정된다”고 했다.

KTX 장성역 정차는 여객수요 면에서도 의문을 낳는다. 코레일의 최신 역별 철도수송통계를 보면 대략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다.(지난 5월 기준) 호남고속철이 경부고속철에서 분기되는 오송역(충북 청주시)의 월별 철도승하차객은 51만여명, 호남선과 전라선(여수 방면)이 갈라지는 익산역은 월 48만여명, 호남고속철 신선이 끝나는 광주송정역은 월 43만여명이다.

현재 ITX-새마을과 무궁화, 누리로 열차만 정차하는 장성역의 월별 철도승하차객은 약 2만여명 정도다. KTX 정차가 결정된 김제역은 3만8000여명가량이다. 코레일 측은 “예상 여객수요는 영업상 비밀이라 공개할 수 없다”고 밝혔다.

오는 9월부터 KTX가 장성역에 정차해 설사 이용객이 폭발적으로 증가한다고 해도 KTX 고속철을 세울 가치가 있을 만큼 여객수요가 나올지는 미지수다. 한데 코레일은 이 구간에 무려 980여명을 태울 수 있는 20량 편성 KTX를 투입한다.

KTX 수도권 구간의 경우 주말 등 주요 시간대는 좌석 전쟁이 치열하다. 만성적인 좌석난으로 지난 2017년에는 불법개조 논란에도 불구하고 KTX의 기존 특실을 뜯어 일반실로 개조하는 식으로 좌석을 늘리기도 했다. 결국 20량 KTX가 장성역에 투입되는 등 재래선에 발이 묶이면서 다른 지역 열차이용객들이 피해를 보는 구조다.

이낙연 총리, 이개호 장관 지역구

KTX 장성역 재정차에는 앞뒤로 장성군 지역구 의원을 지낸 이낙연 국무총리와 이개호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의 힘이 주효했다. 장성군은 인구수 부족으로 인근 함평군, 영광군, 담양군과 함께 한 선거구로 묶여 있다. 18·19대 국회 때는 이낙연 총리가 지역구 의원을 지냈다. 현역 의원이자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인 이개호 장관은 19대 국회 때 이낙연 총리가 전남지사 선거에 뛰어들면서 지역구를 물려받았다. 이후 재보궐 선거에 당선된 후 지난 20대 총선에서 재선됐다. 이개호 장관은 현역 의원으로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을 겸해왔다.

이개호 장관은 코레일이 KTX를 장성역에 세우기로 결정한 직후인 지난 8월 14일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장성군민의 위대한 저력이 만든 소중한 결실입니다”라며 “대정부 질문과 예결위 회의를 통해 재정차를 촉구해왔고, 코레일 사장과 국토부 장관은 물론 상무대 장병 정차편의를 위해 국방부 장관까지 수차례 만나서 장성군민들의 의지를 전달했다”고 밝혔다. 또 “이 과정에서 이낙연 총리님의 격려가 큰 힘이 됐다”고 했다.

전남도 행정부지사를 지낸 이 장관은 초선 의원 시절인 2015년 4월 호남고속철 완공과 함께 KTX가 장성역에 서지 않자 KTX 재정차를 위해 발벗고 뛰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7월 3일 옛 건설교통부(현 국토교통부) 공무원 출신인 유두석 장성군수가 이낙연 총리를 만나 ‘KTX 장성역 정차’를 건의하는 데도 함께 배석했다. 결과적으로 이개호 장관은 자신의 지역구(장성군)에 KTX를 다시 정차시킨 덕분에 철도효율성 논란과 별개로 내년 총선에서 상당한 도움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이개호 장관은 지난 개각 발표 직후부터는 본격적으로 지역구 표밭을 갈고 있다.

열차회전율 떨어져 승객 피해

하지만 KTX 장성역 정차로 총사업비 8조원을 투입해 부설한 호남고속철의 ‘투자무용론’이 또다시 불거지게 됐다. 경제성 부족 탓에 “재래선(옛 호남선) 개량이 더 합리적”이란 의견을 물리치고, 지역균형개발 논리로 막대한 세금을 투입해 오송역에서 광주송정역까지 이어지는 고속전용선(1단계)을 부설했음에도 재래선을 이용한 KTX를 그대로 유지하면서다. 프랑스의 고속철 TGV가 모태인 KTX는 재래선과 호환가능한 점이 최대 장점이나, 선형이 불량한 재래선에서는 열차간격, 안전상의 이유 등으로 제 속도를 낼 수 없다.

2015년 호남고속철 개통 때 옛 호남선(재래선)을 달리던 KTX를 20%가량 남기기로 했을 때도 국토부와 코레일은 이 같은 비난에 직면했다. 하지만 비난 여론에 여객수요가 많은 서대전역에서 익산역까지 이어지는 일부 구간에만 재래선을 이용한 KTX를 남기기로 했다. 손병석 현 코레일 사장은 당시 국토부 철도국장으로 이 같은 결정을 내리는 데 관여했다. KTX 장성역 정차 결정으로 옛 호남선(재래선) 위를 달리는 KTX는 호남고속철이 개통한 지 이미 4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다시 부활한 셈이 됐다.

2010년 완전 개통한 경부고속철 역시 옛 경부선(재래선)을 이용하는 구간이 일부 있지만 서울~대전 간, 동대구~부산 간에 불과하다. 이마저 이 구간은 인구 120만명이 넘는 경기도청 소재지 수원시(수원역)와 인구 340만명의 부산 서부권(구포역)의 여객수요를 감당하기 위한 선택이다. 수원역과 구포역의 월별 승하차객은 105만명과 26만명에 달한다. 경부고속철에는 적어도 인구 5만명 이하 군 지역에 고속열차를 세우는 정차역은 없다.

유력 정치인의 지역구 민원에 굴복해 군 지역 KTX 정차를 결정한 코레일의 결정도 도마 위에 오를 것으로 보인다. 고속선을 달리는 KTX와 재래선을 달리는 ITX-새마을, 무궁화, 누리로 열차의 환승 편의를 개선해 양자 간에 효율적인 역할분담을 도모하기보다 KTX를 재래선에 무리하게 투입하면서 군 지역까지 정차시키는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고속선 위를 달려야 할 KTX를 재래선에 투입하면 그만큼 열차회전율이 떨어진다. 더 많은 열차이용객이 좌석을 구하지 못하는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고속철은 노태우 정부 때 인구 100만명(광역시 승격 기준) 이상 대도시 간 고속교통서비스를 위해 도입됐다. 이를 통해 나온 것이 서울~부산 간 2시간 내 주파 목표였다. 하지만 현실론에 밀려 ‘1시1역’으로 완화된 이후 이번에 또다시 후퇴한 것이다. 현재는 인구 100만명 이상 광역시가 아닌 곳에서도 ‘1시1역’은커녕, ‘1시2역(여천역, 여수엑스포역)’ ‘1시3역(창원중앙역, 창원역, 마산역)’을 흔히 볼 수 있다. 한국철도시설공단(KR)이 밝힌 고속철 적정 역간거리 57㎞, 최소 역간거리 42.7㎞는 이미 사문화된 지 오래다.

지난 7월 3일 이낙연 총리에게 KTX 장성역 정차를 건의하는 이개호 장관(왼쪽 두 번째)과 유두석 장성군수(오른쪽 두 번째). ⓒphoto 장성군
지난 7월 3일 이낙연 총리에게 KTX 장성역 정차를 건의하는 이개호 장관(왼쪽 두 번째)과 유두석 장성군수(오른쪽 두 번째). ⓒphoto 장성군

판도라 열린 KTX 정차 유치전

KTX 장성역 정차 결정으로 전국 각지에서 KTX 정차요구도 봇물 터지듯 쏟아질 것으로 보인다. 당장 볼멘소리가 나오는 곳은 구미역이다. 경북 구미시에 있는 구미역의 경우 2007년부터 2010년까지 KTX가 정차했다. 하지만 경부고속철 2단계 구간(동대구~부산)이 개통된 2010년에 인근 김천시에 ‘김천(구미)역’이 중간역으로 추가된 다음부터는 KTX가 정차하지 않는다. 하지만 삼성, LG 등 수출기업들이 입주한 국가산단이 있는 구미에서는 상공계를 중심으로 ‘해외바이어 이동편의’ 등을 위해 KTX를 재정차시켜 달라는 요구를 계속해왔다.

하지만 국토부와 코레일은 경부고속철 전체 운영효율을 위해 KTX 구미역 정차요구를 억눌러왔다. 이제는 인구 4만6000명의 장성군에까지 KTX를 정차시켜준 마당에 그 10배에 달하는 인구 42만명의 구미시의 정차 요구를 외면하지는 못할 것으로 보인다. 구미역은 현재 KTX가 정차하지 않음에도 월 승하차객이 39만명(지난 5월 기준)에 달한다. 과거 KTX가 정차한 터라 KTX 정차를 위한 20량 규모의 플랫폼도 이미 마련돼 있는 등 장성역과 비슷한 상황이다.

KTX 광주역 정차 요구도 되살아날 것으로 보인다. 광주광역시 북구에 있는 광주역에는 2015년 호남고속철 완공 후 KTX가 정차하지 않는다. 재래선인 광주선상에 있는 종착역인 광주역에 KTX를 투입하면 고속선을 활용한 열차 운영 효율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2015년 4월 호남고속철 개통과 함께 광주역 KTX는 광주송정역으로 일원화했다. 호남고속선상에 있는 광주송정역은 호남선 종착역인 목포역과도 연계되고, 광주지하철 1호선과도 잘 연결된다.

대신 광주역의 KTX 수요는 광주역과 광주송정역 사이에 셔틀열차를 운영해 커버하고 있다. 이 셔틀열차를 이용할 경우 KTX 환승할인도 해주고 있다. 하지만 광주역이 있는 광주 북구 등에서는 상권활성화 등을 이유로 KTX를 광주역에 재정차시켜 달라는 요구가 끊이지 않는다.

호남고속철 세종역 신설 주장을 막을 명분도 없어졌다. 국군장병 이동편의를 명분으로 인구 4만6000명에 불과한 장성군에도 KTX 정차를 허용하는 마당에 지난해 인구 30만명을 돌파한 사실상 행정수도 세종특별자치시의 KTX 정차역 신설 요구를 막을 명분이 희박하기 때문이다. 세종역 신설 시 대전 유성구(인구 34만명) 등 서대전역 영향권 안에 있는 여객수요를 상당부분 흡수해 호남선 KTX 운영을 고속선 중심으로 효율화할 수 있는 측면도 있다. 일부 호남선 KTX가 정차하는 서대전역의 월 철도이용객은 33만명에 달한다.

그간 오송역(충북 청주시)과 공주역(충남 공주시)에서는 세종역 신설을 극구 반대해왔다. 세종역 예정지로 거론되는 곳에서 오송역과 공주역은 역간 거리가 각각 22㎞에 불과해 기존 역의 승객이 감소한다는 논리를 펴왔다. 광주송정역과 장성역의 역간 거리도 21.9㎞로 이와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세종역 신설은 세종시 지역구 의원이자 더불어민주당 대표인 이해찬 의원(7선)의 공약이기도 하다.

이 밖에 충남 논산시에서도 “KTX 논산훈련소역을 신설해달라”는 요구를 내놓고 있다. “계룡대가 있는 계룡역, 상무대가 있는 장성역에도 KTX를 세우는데, 논산훈련소는 왜 안 되냐”는 논리다. 논산시의 인구는 12만명으로 장성군보다 3배가량 많다. 촌철살인으로 유명했던 고(故) 노회찬 의원은 이곳저곳에서 KTX를 유치하겠다는 주장에 “KTX가 코리아택시의 약자냐”고 풍자한 적이 있다. 그렇게 KTX는 점점 ‘코리아택시’로 전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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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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