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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쟁] “위안부를 ‘선택과 의지’라고 말할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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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회/르포
[2573호] 2019.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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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위안부를 ‘선택과 의지’라고 말할 수 있나”

국사학도 기자가 이영훈 교수에게 묻다(하)

이선민  조선일보 선임기자 smlee@chosun.com

‘반일 종족주의’를 읽으면서 제가 불편함을 느낀 다른 하나의 원인은 자국사(自國史) 서술에 있어 일절 감정을 배제하고 일반화하려는 사회과학자와, 다소간 감정이입적이고 구체상을 파고들려는 국사학도의 인식 충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책에서 가장 뜨거운 쟁점이 되고 있는 일제의 강제징용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서 잘 드러납니다.
   
   일제 말기의 강제징용을 다룬 이우연 박사님의 글 세 편은 우리에게 그동안 가려져 있던 사실을 일깨워주려고 합니다. 특히 일본으로 강제징용된 조선인 노무자들의 비참한 모습이라고 널리 알려졌던 사진들이 일본 건설 현장이나 광산에서 일하던 일본인들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지적한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원통하다고 해도 엉터리 거짓 자료를 교과서에 실어서 후대를 가르치고 세계에 선전해서는 안 되겠지요.
   
   
   성급하게 일반화하려는 사회과학자의 오류
   
   이 박사님이 쓴 글에 담긴 강제징용에 대한 주장들도 귀를 기울일 만합니다.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에 임금차별은 없었고, 임금은 정상적으로 지급됐다.” “조선인과 일본인은 작업배치나 노동조건에서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조선인 탄광부의 임금은 일본의 대졸 사무직 초임의 2.2배나 됐다.” 이런 주장들은 우리가 강제징용에 대해 갖고 있는 통념과 크게 충돌하지만 구체적인 수치와 나름 근거자료를 제시하기에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태헌 고려대 교수가 쓴 ‘문답으로 읽는 20세기 한국경제사’(역사비평사·2010)에 들어 있는 ‘일제의 조선인 강제동원’이라는 글에 그려진 강제징용의 모습은 이와 전혀 다릅니다. “조선인들은 작업장에서 신체의 자유도 없는 노예노동에 혹사당했다.” “조선인들은 약속한 임금보다 훨씬 적은 임금을 받았고 그나마도 제대로 못 받거나 강제저축이 많았다.” “조선인 강제동원의 종말은 학살과 유기(遺棄)로 점철됐다. 조선인 한 명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이처럼 정면으로 대립하는 두 개의 주장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역사적 진실에 가까운지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저에게는 없습니다. 다만 이런 정반대의 설명이 나오는 것은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근대 제국’을 지향했지만 끝내 그렇게 되지 못했던 일본의 이중적인 성격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메이지유신으로 근대 국가로 탈바꿈한 일본은 해외침략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부터 근대 제국 건설을 꿈꿨고 서양 열강들로부터 그런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대만총독부 민정장관으로 타이베이 도시와 철도·항만·은행 건설을 주도했고, 이어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 초대 총재로 요동반도 일대를 개발하고 싱크탱크인 만철 조사부를 만들어 만주 침략의 발판을 다진 고토 신페이(後藤新平) 같은 관료가 대표적인 인물이지요. 하지만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이후의 일본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고 더구나 전면전에 돌입한 제국을 끌고 나가기에 충분한 경제적·사회적·정신적 역량을 구비하지 못했기에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커다란 파열음을 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준익 감독이 만든 영화 ‘동주’는 일제 말기의 그런 이중적인 모습을 잘 그렸습니다.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제 경찰에 체포된 윤동주를 고문한 일본인 형사는 작성된 진술서에 손도장을 찍으라고 강요합니다. 윤동주가 탈진 상태에서 “당신이 원하는 대로 만들어진 진술서니 당신 마음대로 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하니까 그 형사는 “우리 대일본제국은 법에 정해진 대로 처리한다”고 말합니다. 앞으로는 법치(法治)를 내세우면서 뒤로는 고문을 거리낌 없이 자행했던 일본제국의 두 얼굴은 강제징용에도 그대로 나타났을 것입니다. 일제가 만든 서류나 기록에 보이는 강제징용 노무자의 모습과 그들의 실제 생활상은 상당한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강제징용에 대해서는 앞으로 연구해서 밝혀내야 할 부분이 아직도 많은 것 같습니다. 일제가 패망 직후 관련 자료를 대거 파기했기에 연구에 어려움을 겪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 가운데 견해가 크게 엇갈리는 강제징용된 조선인 노무자들의 생활상에 대해서는 이제까지의 연구 성과를 놓고 전문가들 사이에 심층 토론이 필요할 듯합니다. 하지만 이 문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강제동원’ 여부는 이미 상당히 정리됐다고 생각됩니다.
   
   이우연 박사님은 “조선인 노무동원을 전체적으로 볼 때 기본적으로는 자발적이었고 강제적인 것이 아니었다”고 주장합니다. 조선인 노무동원은 1939년 9월 ‘모집’에 의해 시작됐고, 1942년 2월부터 ‘관(官) 알선’이 병행되다가 1944년 9월부터는 개정된 ‘국민징용령’에 따른 ‘징용’이 추가됐습니다. 이렇게 6년 동안 동원된 전체 조선인 근로자는 73만여명이었습니다. 이 가운데 징용만 법률에 근거한 것이었고, 그 숫자는 10만명 이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노무동원은 ‘전체적으로’ ‘기본적으로’ 강제동원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징용 연구자들은 ‘모집’과 ‘관 알선’도 행정적 강제성이 뒷받침된 사실상의 강제동원이었다고 주장합니다. ‘모집’은 모집지역, 고용조건, 수송방법 등이 일본 후생성·조선총독부와 그 하위기관의 계획과 통제 아래 이루어졌습니다. ‘관 알선’은 한걸음 더 나아가 도(道)·부(府)·군(郡) 등 지방 행정기관이 직접 인원 할당, 명부 작성, 노무자 공출을 주도했고 그 과정에서 경찰과도 긴밀히 연락했습니다. ‘관 알선’이 실제로는 강제동원이었다는 사실은 1944년 4월 조선총독부의 행정 책임자였던 정무총감 다나카 다케오(田中武雄)가 정례 도지사회의에서 훈시한 다음과 같은 내용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국민 동원 계획에 기(基)하여 일본 기타의 지역에 대한 산업요원 및 군(軍)요원의 송출도 또한 격증(激增)을 보이고 있어 아직도 상당한 탄력성을 가지는 반도(半島)의 인력이 아국(我國) 전력 증강에 최대의 열쇠가 되어 있다.… 관청 알선 노무공출의 실황을 검토해 보면 노무에 응할 자의 지망(志望)의 유무를 무시하고 만연히 하부 행정기관에 공출(供出) 수를 할당하여 하부 행정기관도 또한 대체로 강제공출을 하기 때문에 노동 능률 저하를 초래하고 있는 결함은 단연코 시정해야 한다.’
   -‘일제침략하 한국 36년사’ 13권 643~644쪽
   
   백보를 양보하여 설사 징용만 법에 따른 강제동원이었다고 해도 “조선인 노무동원은 강제적이 아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역사적 사건이나 현상의 성격은 단순히 양(量)만 갖고 규정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전체적으로’ ‘기본적으로’라는 표현으로 구체적 역사상을 묻어버리고 성급하게 일반화하는 사회과학자의 오류를 발견합니다. 더구나 그 일반화의 근거로 제시된 통계수치조차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당시 조선인 청년들에게 일본은 하나의 ‘로망’이었다”는 주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 청년이 일부 있었다고 해도 자기 의사에 반해서 일본으로 끌려가야 했던 다른 많은 조선인 청년까지 도매금으로 그랬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또 하나 여기서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은 자기 나라 역사를 탐구할 때 어느 정도 감정이 개입돼야 하는가라는 문제입니다. 이 박사님은 일본 주요 탄광에서 조선인 사망률이 일본인보다 두 배가량 높았던 이유에 대해 “인위적인 민족차별이 아니라 탄광의 노동수요와 조선의 노동공급이 맞아떨어진 불가피한 결과였다”고 설명합니다. 탄광에서 위험한 작업을 하던 일본인들이 징병되고 난 뒤 빈자리를 조선에서 데려온 청년들로 메웠는데 이들은 작업 숙련도가 떨어졌기 때문에 사망률이 높았다는 것입니다. 위험한 곳에서 익숙하지도 않은 작업을 해야 했던 조선인 청년들의 죽음을 ‘노동수요와 노동공급’이란 딱딱하고 무미건조한 경제학 이론으로 설명하는 것은 우리 조상들이 살았던 고통스러웠던 삶을 추적하는 국사학도에게는 아무래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입니다.
   
   이 박사님은 “조선인의 높은 재해율에 대해 일본의 책임을 묻기 위해서는 왜 전쟁을 일으켰는지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고, 나아가 그 한 세대 앞서 조선을 식민지로 삼은 그 조상들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정확히 그렇습니다. 한국은 지금 일본의 전쟁 도발 책임과 식민지 지배 책임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 책임의 배상·보상 문제를 둘러싼 광복 후 우리 앞세대들의 깊은 고민과 어려운 결정은 송두리째 무시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는 문재인 정부의 비역사적인 처리 방식에는 저도 동의하지 않지만 그와는 별개로 일제의 식민지 지배와 전쟁 도발 책임 자체는 도외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 일제 말기에 일본 내륙 지역의 탄광으로 징용됐던 김모씨가 갱내에서 동료 노무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 좁은 갱내와 단순한 작업도구들이 열악했던 작업 환경을 말해준다.

   ‘제국의 위안부’로 스스로 생각했다면 ‘스톡홀름증후군’
   
   ‘반일 종족주의’에서 가장 까다롭고 뜨거운 주제인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룬 이영훈 교수님의 글 세 편을 읽으면서도 비슷한 점을 느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공창제(公娼制)와 위안부의 역사를 추적한 앞의 글 두 편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는 시야를 넓혀주었습니다. 구체적인 내용을 그 분야 전문가가 따지면 논란거리가 없지 않겠지만 저로서는 큰 무리를 발견하기 어려웠습니다. “연구자라면 어떤 과제에 접근함에 있어서 먼저 그 역사적 배경에서부터 그 토대를 이룬 법과 제도까지를 차분히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본인의 주장에 잘 부합하는 글이었습니다. 다만 “어떤 특정 시기의 역사적 현상을 너무 거시적이고 구조적으로만 접근하면 시대적·상황적 특징은 놓치는 것이 아닌가”라는 우려가 들었습니다.
   
   그러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실’이라는 이 주제에 관한 핵심적인 글은 달랐습니다. 저는 이 글에서 강제징용을 다룬 이 박사님의 글과 마찬가지로 사회과학자가 범하기 쉬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발견했습니다. “가까운 과거사인 만큼, 다시 말해 지금도 이어지는 현실의 일부일 수 있는 만큼, 그 전체상을 파악하고 역사적 의미를 부여함에 있어서 극히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본인의 주장과도 어긋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글은 한때 많게는 20만명까지 추산되던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가 실제는 3600명이었다고 주장합니다. 일본군 위안부의 성격에 대해서 ‘성노예(sex slave)’였다는 널리 받아들여지는 규정에 반대하고 ‘군(軍)에 의해서 운영된 공창제의 부분집합’이라고 주장합니다. 저는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의 숫자나 성격 규정은 학문적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자료와 논리에 대한 엄밀한 학술적 검증을 거쳐야 하겠지만 학자로서 통설과 다른 주장을 펼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위안부들에게 선택의 자유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는 주장에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이 글은 1942년 7월 약 200명의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와 함께 부산항을 떠나서 버마와 싱가포르의 일본군 위안소에서 1944년 말까지 조바(관리인)로 일했던 박치근이란 사람이 쓴 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일기가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이숲)라는 책으로 2013년 8월 처음 소개됐을 때 국내에서 특종 보도한 기자가 저였습니다. 안병직 교수님의 연락을 받고 기사를 작성하기 위해 가제본 상태의 책을 읽으면서 말로만 들었던 일본군 위안부들의 모집, 이동 과정과 생활상이 생생하게 담겨 있는데 전율을 느꼈던 기억이 납니다.
   
   이 책에서 드러나는 일본군 위안부의 모습은 우리가 ‘일본군 위안부 소녀상’을 통해서 가지고 있는 것과 사뭇 다릅니다. 그들이 일본군 위안부가 되기 전 하던 일과 위안부가 되기까지의 사연은 다양했습니다. 위안부가 된 뒤에 열심히 돈을 벌어서 저축하거나 고향의 부모님에게 보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본인 희망에 따라 다른 일본군 위안소로 옮기기도 했고, 계약기간이 끝나면 귀국하기도 했습니다. 이를 근거로 이 교수님은 “직업으로서의 위안부는 위안소라는 장소에서 영위된 위안부 개인의 영업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일본군 위안부들의 실제 모습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 곧 이 교수님의 이런 서술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반일 종족주의’에는 1944년 8월 버마전선에서 미군이 포로가 된 20여명의 조선인 위안부를 심문한 기록이 인용돼 있습니다. “위안부제의 본질과 실태에 관해 어느 기록보다 상세하고 정확한 정보를 담고 있다”고 이 교수님께서 평가하는 이 기록은 위안부 모집 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습니다.
   
   ‘일본군의 의뢰인이 위안 서비스를 할 여인을 모집하기 위해 조선에 도착했다. 서비스의 내용은 부상병 위문이나 간호를 포함하여 일반적으로 장병을 즐겁게 해주는 일로 소개됐다. 의뢰인들은 다액의 수입, 가족 부채의 면제, 고되지 않은 노동, 신천지 싱가포르에서의 신생활을 미끼로 제공하였다. 많은 여성이 그 허위의 설명을 믿고 전차금(前借金)을 받고 응모하였다. 그들 중 몇몇은 이전부터 매춘업에 종사해왔지만 대부분은 무지하고 교육을 받지 못한 여인들이었다. 그들은 받은 전차금의 크기에 따라 6개월 또는 1년간 군의 규칙과 위안소 업주에 묶였다.’
   
   일본군이 선정한 일본군 위안부 모집책의 거짓 감언이설에 속아서 고국을 떠났고 이역만리(異域萬里)에 도착한 뒤에야 자신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비로소 알게 된 여인들을 놓고 “위안부 생활은 그들의 선택과 의지에 따른 것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가혹합니다. 이 교수님 스스로도 “때론 좋은 곳에 취직시킨다는 감언이설의 속임수가 동원되기도 했다. 딸은 울면서 또는 매를 맞으면서 끌려갔다”라고 쓰지 않았습니까. 더구나 박치근의 일기에는 동남아 현지에서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그만두었던 여성이 ‘병참의 명령’으로 다시 끌려온 경우도 보입니다. 앞서 언급한 제 특종기사에서 안병직 교수님은 “위안부들은 모집 때 그들이 할 일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고 인신매매에 가까운 수법이 이용됐다는 점에서 ‘광의의 강제동원’이라고 봐도 무방하다”고 말씀했습니다.
   
   “(조선인) 위안부 일동은 ‘우리도 일본인이다. 일본군을 위안하는 신성한 책무를 부여받은 제국의 위안부다’라는 의식을 가졌다”는 주장은 더욱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문옥주라는 한 위안부의 예화(例話)를 설명하는 부분이지만 ‘일동’이라는 표현이 자칫 전체 위안부가 그랬다는 인상을 주기 십상입니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전선에서 한 덩어리의 운명공동체라고 느낀’ 일본군 병사와 조선인 위안부가 있었을 수 있습니다. 자신이 ‘제국의 위안부’라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저에게 그런 현상은 인질이 인질범에게 동화돼 동조하는 ‘스톡홀름증후군’으로 보입니다. 전장(戰場)이라는 특수 상황에서 ‘위안부 일부’에 그런 현상이 나타났을지는 몰라도 결코 그것을 일반화시킬 수는 없을 것입니다.
   
   박유하 교수의 책 ‘제국의 위안부’가 출간됐을 때 저는 그것이 사회과학이나 역사학의 훈련을 받은 학자가 본격적인 연구를 거쳐 펴낸 학술서가 아니라 문학 전공자가 비전문가의 책과 몇몇 사람의 회상이나 소설을 읽고 자료집에 대한 자기 나름의 독해를 바탕으로 쓴 산문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가 “성(性)을 제공해주고 간호해주며 전쟁터로 떠나는 (일본인) 병사를 향해 ‘살아 돌아오라’고 말했던 동지이기도 했다”는 서술을 읽고는 그 풍부한 문학적 상상력에 할 말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당대 최고의 사회과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이 교수께서 그와 비슷한 주장을 하시다니요.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는 일본제국의 위안부였다”라는 기상천외하고 어처구니없는 주장이 ‘보편 명제’(모든 ~는 ~다)로 성립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 1944년 9월 초 버마에서 미군에 포로가 된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들의 모습. 가장 오른쪽에 있는 만삭의 박영심씨는 일본이 패전한 뒤에 고향인 평안남도로 돌아갔고 2006년 사망했다.

   ‘파사(破邪)’의 열정에 공감하며 ‘현정(顯正)’의 짐 나누어 지기를
   
   이 글의 앞부분에서도 밝혔듯이 저는 ‘반일 종족주의’를 읽고 많이 배웠습니다. 처음부터 제쳐놓은 두어 편과 이 글에서 언급한 부분들을 제외하면 대체로 공감하고 동의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보다 많은 국민이 이 책을 읽고 그동안 우리가 교과서나 교양서를 통해 무심코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였던 주장들의 상당수가 정치적 목적이나 맹목적 애국심에서 덧칠된 신화(神話)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이미 제 칼럼을 통해 밝힌 바 있습니다.
   
   하지만 ‘반일 종족주의’와 그 필자들이 바라는 것이 지금은 세상을 떠난 어느 좌파 원로학자처럼 신화와 우상(偶像)과 허상(虛像)을 허물고 그 빈자리를 또 다른 신화와 우상과 허상으로 채워넣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역사에 이성(理性)의 빛을 비추어 진실을 밝히는 고된 작업입니다. 그리고 제가 이 글에서 던진 질문들은 우리 사회와 국민이 이 책에서 다룬 주제들을 ‘세계인이 수긍할 수 있는 상식과 역사적 사실’에 입각해 이해하려고 할 때 반드시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질문들에 우리 사회와 지식인들이 함께 정직하게 대면해서 토론할 때 이 책의 가치는 더욱 빛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교수님과 이승만학당의 연구자들이 지닌 열정에 늘 감탄하면서 존경의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생각만 많고 용기와 행동력은 부족한 제가 따라가기 힘든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역사에서 자주 보듯이 열정이 반드시 최선의 결과를 보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이 책이 ‘대한민국 위기의 근원’이라고 지적하는 중대하고 복잡한 문제들을 다룰 때는 입장이 조금 다른 사람이 논의에 참여하는 것이 더욱 균형 잡히고 지혜로운 결론을 얻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반일 종족주의’의 필자들 또한 얼마 전 “이 책은 수십 년에 걸친 연구 인생 결과를 담은 것으로 진지한 학술적 논의와 비평의 대상이 돼야 함이 마땅하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쓴 이 글이 이 교수님을 비롯한 이 책의 필자들에게 ‘진지한 학술적 논의와 비평’으로 받아들여지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계기가 돼 이 책에서 다룬 문제들에 관심 있는 지식인들 사이에 활발한 토론이 전개되기를 바랍니다. 지금처럼 서로 소가 닭 보듯이 외면해서는 한국 근현대사를 놓고 벌어지는 여러 방면의 ‘역사 전쟁’은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제 글이 그 가운데 매우 중요한 한 측면에 대해 우리 사회가 지혜로운 역사인식을 마련하는 마중물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지금 대한민국 우파에는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역사인식에 관해서도 ‘파사현정(破邪顯正)’의 이중 과제가 주어져 있습니다. 한국 근현대사에 대해 좌파 민족주의가 높이 쌓아 올린 잘못된 역사인식을 무너뜨리고 균형 잡힌 안목과 건전한 이성을 지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올바른 역사관을 세우는 것입니다. 저는 이제까지 국내외 학계가 축적한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양식 있는 지식인들이 머리를 맞대고 함께 넓고 깊은 고민과 토론을 거치면 극단적인 방향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 펴낸 졸저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대한민국’(지식산업사)을 쓰면서 그 점을 확인하고 또 확신하게 됐습니다.
   
   저는 이번에 ‘반일 종족주의’가 보인 ‘파사(破邪)’의 열정에 깊이 공감하면서 ‘현정(顯正)’의 무거운 짐을 나누어 지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 글이 그 바른 길을 함께 모색하는 데 작은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여러 가지로 분망하신 와중에 번거로운 질문을 드려서 죄송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당혹감과 궁금증을 대신한 것이니만큼 진솔한 답변을 기다리겠습니다.
   

   ※ 필자는 서울대 국사학과에서 학사·석사학위를 받고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지은 책으로 ‘민족주의 이제는 버려야 하나’ ‘대한민국 국호의 탄생’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대한민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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