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즈오카현에 있는 도카이도 히로시게미술관. 지난 8월 24일 한국인 관광객은 단 한 명도 없었다. ⓒphoto 하주희 기자
시즈오카현에 있는 도카이도 히로시게미술관. 지난 8월 24일 한국인 관광객은 단 한 명도 없었다. ⓒphoto 하주희 기자

일본인들의 생각을 알고 싶었다. 한·일 관계가 역대 최악으로 가고 있는 요즘, 보통 일본인들의 마음엔 어떤 기류가 흐르고 있을까. 평소 알고 지낸 일본인 지인들에게 소셜미디어로 안부를 물었다. 안부 인사엔 반갑게 화답했지만, 정치 얘기로 화제가 넘어가는 것은 저어하는 눈치였다. 유학이나 사업 관계로 일본에 체류 중인 한국인들에게 물어도 마찬가지였다. 앞으로도 쭉 만날 사이라 그럴까,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뜨내기 관광객에겐 오히려 민낯을 보여줄지 모른다. 일본에 직접 가보기로 했다.

시즈오카현은 오사카와 도쿄 중간에 있다. 특산물은 녹차이고 후지산이 유명하다. 일본산 녹차의 45%가 시즈오카에서 난다. 일본을 대표하는 산, 후지산과 가장 붙어 있는 현이기도 하다. 후지산 등반이나 주변 관광 프로그램이 잘 꾸려져 있다. 등반 가능한 시기가 정해져 있다. 7월부터 9월 중순까지다. 순전히 관광 목적으로만 찾는 이들이 많은 도시이기 때문에 그만큼 한·일 관계 악화의 여파가 더 잘 보이리라 생각했다.

제주항공은 인천~시즈오카 직항을 운영한다. 비행시간은 2시간. 주 4회 운영하던 것을 9월부턴 주 3회 운항으로 줄인다고 했다. 일본 불매운동의 여파다. 8월 23일 저녁, 비행기 안은 생각보다는 차 있었다. 승객 중엔 일본으로 귀국하는 일본인들이 많았다. 한국에서 관광을 하고 일본으로 돌아가는 가족 단위 여행객이나 다른 나라에서 인천을 경유해 일본으로 돌아가는 일본인들이었다. 관광객으로 보이는 한국인은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문 대통령이 일본 싫어하기 때문 아닌가”

시내 호텔에 짐을 내려놓고 부근 식당가로 갔다. 어두워진 거리를 걷다 아오바 어묵 거리에 닿았다. 일종의 작은 선술집이 일렬로 붙어 있는 곳이다. TV 프로그램 ‘나혼자산다’에서 배우 이시언이 방문해 한국에도 유명해졌다. 열몇 군데 가게 중 한 군데에서만 한국인 관광객이 보였다. 발길이 가는 대로 아무 가게나 들어갔다. 주인 할머니는 반색을 하며 반겼다. 손님은 적어도 60대 후반으로 보이는 할머니 단 한 명이었다.

시즈오카산이라는 어묵을 주문해 씹고 있으려니, 두 사람의 눈길이 연신 느껴졌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묻고 싶은 게 많아지는 눈치였다. 일본 체류 기간 동안 일반인들과 대화를 나눌 때 기자 신분은 밝히지 않았다. 마침 천장에 달린 TV에선 ‘보도스테이션’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사히TV에서 방송하는 ‘보도스테이션’은 일본에서 가장 사랑받는 뉴스 프로그램이다. 뉴스 프로그램 중 시청률이 매우 높은 축에 속한다. 주요 뉴스를 몇 가지 골라 심층적으로 보도하는 식이다. 정치적 성향을 굳이 따지면 중도 내지는 진보라 평가받는다. 이날 보도스테이션에선 서울 홍대 거리를 아예 생중계로 연결해 보여줬다. 홍대 거리에서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리포터가 질문을 던졌다. “문재인 정부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박근혜 대통령 탄핵 당시 촛불 집회에 나간 적이 있는가.” 여러 답이 나왔다. “문재인 대통령에게 투표했지만 이젠 현 정부를 지지하지 않는다.” “현 정부가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정부가 잘하고 있다는 한 남성의 대답 뒤엔 한국의 청년실업률 통계를 보도하는 리포트를 붙였다. ‘청년들의 사정은 오히려 안 좋아진 듯한데 왜 현 정권을 지지할까’, 보는 이에게 의문을 갖게 하는 보도였다.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즉 지소미아를 종료하기로 한국 정부가 발표한 날, 한국과 일본 정부가 어떻게 움직였는지 마치 영화처럼 교차편집으로 보여주기도 했다.

방송이 끝나자 주인 할머니는 기다렸다는 듯 한·일 관계 얘기를 꺼냈다. “위에 있는 사람들이 일반 서민들 생각을 안 한다. 양국 모두 마찬가지다.” 그러면서 기자에게 물어왔다. “지금까지는 정치의 문제는 정치의 영역에서만 움직였다. 이번엔 어째서 관광, 문화에까지 영향을 미치나.” 일상적인 한탄을 예상했던 기자는 어묵을 씹다 약간 놀랐지만 침착하게 되물었다.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 할머니는 문 대통령을 지목했다. “문 대통령이 일본을 싫어하기 때문 아닌가.” 기자는 아베 총리 얘기를 꺼냈다. “그렇다면 아베 총리의 결정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나.” 할머니의 답이다. “아베 총리 한 명이 아니라 내각 차원에서 내린 결정 아닌가.”

이튿날, 후지산 부근 관광지에 가봤다. 후지노미야에 있는 후지산혼구센겐타이샤(富士山本宮浅大社). 여기에선 한국인 관광객을 두 팀 만났다. 가족 단위 관광객들이었다. 어차피 관광지야 그곳이 그곳이니 눈이 마주칠 때마다 범죄 현장에서 마주친 듯 머쓱해하는 눈치였다. 신사를 안내해주는 해설사는 60대가량으로 보이는 남성이었다. 해설이 끝날 때쯤 슬쩍 물었다. “한국인들은 요즘 얼마나 오는가.” 긴 답이 돌아왔다. 한·일 문제에 대해 관심이 많은 듯 통계까지 인용한 답이었다. “한국인 관광객은 한 달 전부터 급격히 줄었다. 7월에 일본을 찾는 한국인은 줄었지만 한국을 찾은 일본인은 오히려 늘어났다고 하지 않나. 지금까지 한국과 일본 간에 여러 번 갈등이 있었지만 모두 정치 수준에서 끝났는데 이번엔 젊은 사람들까지 동조하며 진짜 갈등이 되어가는 것 같아 걱정이다.” 그러면서 오히려 기자를 걱정했다. “일본을 찾았다는 걸 주변 사람들에게 들키면 비난받지 않나. 괜찮겠나.”

보통 일본인들의 안타까움과 피로감

후지노미야역 부근의 식당에 들어갔다. 한국 관광객에게도 꽤 알려진 작은 국숫집이었다. 한국어 메뉴판도 갖춰 놓았다. 역시 한국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요즘 한국인들이 얼마나 오느냐”고 묻자 “전보다는 줄었다. 그래도 오는 분들은 온다”는 답이 돌아왔다.

또 다른 관광지로 이동했다. 도카이도 히로시게미술관이다. 우키요에의 대가인 우타가와 히로시게의 작품을 전시하는 곳이다. 우키요에는 근대 일본의 풍경을 판화 형식으로 그려낸 미술 장르를 뜻한다. 우리로 치면 민화, 풍속화다.

중년 여성 한 분이 말을 걸어왔다. 미술관의 해설사였다. “도쿄에서 왔느냐”고 해서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대뜸 감사 인사를 건네왔다. “이런 시기에 찾아주다니 정말 고맙다.” “주변의 보통 일본인들은 현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해설사는 위안부 얘기를 꺼냈다.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현 상황은 답답한 것 아닌가. 위안부 문제도 그렇다. 당연히 미안해해야 하지만 도대체 언제까지 과거 때문에 양국 국민이 이런 식으로 지내야 하나. 얼마나 과거에 매달려야 해결되는 건가.”

미술관 안엔 찻집을 겸한 작은 문화재 건물이 있었다. 그곳을 관리하는 여성은 ‘안타깝다’는 말을 거듭했다. “당신(기자)이나 나나 같은 아시아에 이웃한 여성 아닌가. 양국 여성인 우리들은 얼굴도 닮지 않았나. 일본 여성 중엔 한국의 음식, 문화, 음악, 드라마를 좋아하는 이들이 많다. 우리는 가장 이웃한 사이가 아닌가. 왜 이렇게 지내야 하나.” 그는 “요샌 중국인들이 부쩍 많이 찾아온다”는 말도 덧붙였다.

물론 기자는 관광도시에 거주하는 소수의 사람들을 만났을 뿐이다. 만 이틀 동안 머문 시즈오카에서 기자가 만난 거리의 보통 일본인들과 대화를 나눈 후 느낀 점은 이렇다. 정치 이슈가 양국 일반 국민들의 교류에 왜 영향을 미칠까 하는 안타까움과 과거를 둘러싼 논쟁에 대한 피로감이 묻어났다. 아베 정부에 대한 비난보다는 한국 정부와 한국인에 대한 섭섭함이 더 큰 듯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일본이란 나라를 아주 싫어하는 것 아닌가”라며 물어오는 이들도 여러 명 있었다. 그러면서도 하나같이 양국이 우호 관계를 회복하길 바라는 소망을 간절히 피력했다. 이들의 소망은 언제 어떤 식으로 이뤄질까, 인천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문득 든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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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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