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인순이가 만든 다문화 대안학교인 ‘해밀학교’에 들어서면 벽면에 후원자들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다.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가수 인순이가 만든 다문화 대안학교인 ‘해밀학교’에 들어서면 벽면에 후원자들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다.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한국인도 아니고 미국인도 아니었다. 그 경계에서 가수 인순이(본명 김인순)의 사춘기는 어둡고 길었다. 40~50년 전의 일이니 당시 다문화가정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은 편견 투성이였다. ‘혼혈아’ ‘튀기’ 같은 차별적 용어가 난무했다. 그 단어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인순이의 마음에 상처를 냈다. 부모에 대한 원망이 일었다. ‘어느 나라가 내 조국일까?’ 해답 없는 질문을 붙들고 지옥 같은 시간을 건너야 했다. 강인했던 엄마는 “내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냐?”고 딸을 위로했지만 딸이 겪어야 했던 정체성의 혼란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엄마는 확실한 조국이 있으니 입장이 달랐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쳐다보고 수군대는 것은 약과였다. 한번은 버스에 앉아 있는데 뒤에 앉은 남학생들이 발로 의자를 툭툭 차며 그를 “혼혈아”라고 놀렸다. 참다못해 벌떡 일어나 싸우다 한순간 깨달았다. “그들이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닌데.” 인정하고 보니 마음이 편해졌다.

2010년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뉴스가 인순이의 귀에 꽂혔다. 다문화가정 아이들의 고교 졸업률이 28%밖에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 순간 “이건 내가 나서야 할 일인데” 싶었다. 좋은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그 아이들의 가슴에도 자신처럼 불덩이가 있을 것이란 생각부터 들었다. 그 불을 꺼주고 싶었다. 뉴스는 바로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인순이의 학력도 중졸에 멈췄다. ‘그 아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한 아이의 인생이라도 구할 수 있다면’. 자신의 소명 같았다. 2012년 사단법인 ‘인순이와 좋은 사람들’을 설립하고, 2013년 ‘해밀학교’를 열었다. 중학교 과정의 아이들 6명을 모았다. 폭풍 몰아치듯 흔들리는 사춘기 때 아이들을 바로잡아줘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무언가에 홀린 듯 무작정 덤벼들었다. 몇 명의 아이라도 키워보자고 시작한 일이 점점 커졌다.

2018년 해밀학교는 교육부 인가 정식 중학교가 됐다. 정원 60명으로 중학교 학력을 인정받는 기숙형 대안학교이다. 올해로 7번째 입학식을 가졌고, 4회째 졸업생을 배출했다. 창원·부산 등 전국에서 온 학생들이 모두 기숙사 생활을 한다. 학비는 전액 무료이다. 다문화학교를 내세우고 있지만 일반 학생들도 40% 섞여 있다. 다문화 학생들만 모아놓는 것은 또 다른 격리가 된다는 생각에 처음엔 50 대 50으로 모집을 했다. 교육부 인가가 난 후 다문화 비중을 늘려달라는 요청에 따라 다문화 아이의 비중을 10% 늘렸다. 베트남·일본 등 9개국 출신의 부모를 가진 아이들과 한국인 학생들로 모두 38명이다.

폐교를 구입해 신축한 해밀학교. 설계는 간삼건축이 재능기부를 했다.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폐교를 구입해 신축한 해밀학교. 설계는 간삼건축이 재능기부를 했다.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제2, 제3의 해밀학교가 필요하다”

지난 8월 29일, 폭우를 뚫고 강원도 홍천군 남면 명동리에 있는 해밀학교를 찾았다. 해밀학교는 2017년 4월 신축 이전했다. 5년간 나눠서 돈을 내는 조건으로 폐교를 사서 지은 2층 건물은 마을 안쪽 산 밑에 자리하고 있었다. 도착한 시간이 점심시간인지 학교가 떠들썩했다. 1, 2층 복도를 뛰어다니기도 하고, 다트게임을 하는 학생들도 보였다. 음악실에선 3~4명이 기타와 드럼 연습을 하고 있었다. 다문화 아이인지 아닌지 구별이 안 됐다. 학생들 대화 중에 베트남어 같은 외국어도 들리고 서툰 한국어도 들렸다. 아이들의 얼굴은 밝았다. 예고 없이 방문한 취재진에게도 스스럼없이 인사를 하고 지나갔다.

김인순 이사장이 나타나자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김 이사장이 두 팔을 벌리자 아이들이 다가와 안겼다. 한 학생에게는 “TV에서 잘 봤다”면서 인사를 건넸다. 엄마와 함께 다문화 관련 TV 프로그램에 출연한 모양이었다. 김 이사장이 아이들을 가리키며 소개를 했다. “얘는 책을 엄청 좋아하고요, 얘는 리더십이 뛰어나요. 얘는 2년 전엔 한국말을 전혀 못했는데 이젠 아주 잘해요.” 그는 아이들의 신상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아이들과 친구처럼 곧 있을 마을축제 이야기를 한참 나누었다.

“초·중·고 다문화 학생은 올해 13만명이 훨씬 넘었습니다. 전체 학생의 2.5%에 달합니다. 갈수록 그 비율은 늘고 있습니다. 사춘기 때 그 아이들을 보듬어주고 소속감을 주지 않으면 어른이 돼서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흔들리게 됩니다. 인구절벽 시대에 대비해 이 아이들을 흡수하고 엘리트로 키워내야 합니다. 소중한 자원입니다. 다문화 학생 중 초등학교 고학년, 중학생이 가장 많습니다. 지금이 아주 중요한 시기입니다. 때를 놓치면 안 됩니다. 아이들에게 마음을 주고,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것을 뿌리 깊게 심어줘야 합니다.” 앉자마자 그는 열정적으로 말을 쏟아냈다.

공교육이 있지만, 기초학력이 부족하거나 부모의 결혼으로 뒤늦게 한국에 온 중도입국 학생들의 경우는 학습을 따라가기가 힘들다. 공교육의 테두리로 들어가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서 해밀학교 같은 대안교육 기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해밀학교에서 가능성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새 학생이 들어오면 아이들이 손짓발짓 해가면서 서로 이끌어주고 서로의 문화를 배웁니다. 한국말을 못하는 학생도 6개월 지나면 따라오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눈도 못 마주치는 아이들이 대부분입니다. 상처가 많은 아이일수록 똑바로 사람을 쳐다보질 않아요. 그런 아이들이 반 학기가 지나면 눈을 맞추고 말대꾸를 하기 시작합니다. 말대꾸를 하는 정도가 되면 아이들이 적응을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럼 교사들도 안심을 하고 다른 학생에게 신경을 씁니다. 공부보다 ‘아이들의 가슴속에 뭐가 있나’ 헤아려주는 것이 먼저입니다. 저도 그랬거든요.”

해밀학교의 운영은 일반 학교와는 다르다. 학년이 없다. 한국어 실력을 기준으로 반을 나눈다. 작은 학교(교사 1명당 학생 5~6명)를 만들어 멘토링을 한다. 정규 수업 이외에 음악·미술·요리·영화 등 외부강사를 초청한 특강도 다양하다. 최근엔 학교 커리큘럼을 보고 일반 학생들이 들어오려고 줄을 선다. 학교 운영은 학생들이 주도적으로 이끌어간다. ‘휴대폰은 금요일에 찾아가서 일요일에 반납한다’는 규칙도 총회를 거쳐 학생들 스스로 만들었다. ‘화장 금지’는 몇 달 동안 치열한 논의를 거쳐 결정했다. 결론이 나지 않아 결국 김 이사장이 총대를 멨다. 화장 금지 대신 매달 하루는 마음대로 꾸밀 수 있는 ‘패션데이’를 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덕분에 ‘패션데이’ 때는 남학생들까지 온 학교가 난리가 난다.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농사수업’이다. “흙을 만지고 좋은 음식을 먹이면 아이들의 몸도 마음도 건강해질 수 있다고 믿어요. 그래도 흔들리겠지만 단단하게 굳은살을 박이게 해주고 흔들리지 말아야 할 이유를 만들어주는 거죠. 모든 아이들이 농사를 짓고, 다 같이 김장도 합니다. 동네 이장님과 함께 옥수수를 키워서 파는데 불티납니다. 후배 가수 김종진이 최대 고객이에요. 올해도 수십 상자를 샀어요. 학생들은 옥수수를 팔아 매점을 운영합니다.”

‘농사’는 해밀학교의 중요한 수업이다.
‘농사’는 해밀학교의 중요한 수업이다.

해외탐방 등 진로탐색을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다.
해외탐방 등 진로탐색을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다.

해밀학교와 마을주민이 함께하는 마을 축제를 매년 열고 있다.
해밀학교와 마을주민이 함께하는 마을 축제를 매년 열고 있다.

“해밀학교는 기적이 만든 학교”

그가 애정을 쏟은 만큼 학생들의 변화는 놀라웠다. 1회 졸업생의 경우 6명 중 3명이 대학에 진학했다. 올해 졸업생 10명은 모두 고교에 진학했다. 패션, 통역, 기계 등 자신의 길을 찾았다. 외고에 진학한 학생도 있다. 처음 2~3년 동안은 그도 학생들도 헤맸다. 공교육에서도 받지 않았던 아이들을 끌어안다 보니 말도 안 통하고 거칠었다. 들락거리면서 수시로 싸움을 하는 통에 매일이 사건 사고였다. 그는 방법을 찾기 위해 성공한 대안학교를 찾아다니고 교육 관련 세미나를 쫓아다녔다. 다문화상담사 자격증도 땄다. 교사들은 울면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포기하지 않는 교사들을 보면서 아이들이 바뀌기 시작했다. 지금도 아이들이 잘못하면 교사도 같이 벌을 선다. 몇 킬로미터를 함께 걷고, 같이 자습을 한다. 선생님을 울렸던 아이들이 고교에 진학하더니 성적 상위권을 놓치지 않더란다. “우리 학교는 무한리필 서비스예요. 고등학교 가서도 시험 때면 선생님들에게 전화를 해요.” 그는 학생들의 변화를 보면서 교사들과 함께 더 큰 꿈을 꾸게 됐다고 했다. 아이들을 최고의 엘리트로 키울 수 있다는 꿈이다.

꿈이 커질수록 그의 어깨는 더 무겁다. 교사는 모두 7명이다. 교장은 일선학교에서 명예퇴직을 하고 올해 부임한 안만조 교장이다. 행정실 등을 포함하면 직원이 13명이다. 음악·목공·미술 등 외부 강사도 16명이다. 월 운영비가 5000여만원에 달한다. 1500여만원은 후원자들이 채워주지만 나머지는 그의 몫이다. 학교법인을 만들면 정부 지원이 나오지만 거액을 출연해야 하기 때문에 아직은 희망사항일 뿐이다. 학교 신축에도 20억원 넘는 돈이 들어갔다. 그도 큰돈을 보탰고, 후원해주겠다는 사람만 있으면 만사 제쳐놓고 달려갔다. 덕분에 요즘엔 공연 스케줄보다 학교 관련 스케줄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월급 때만 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면서 “해밀학교는 기적이 만든 학교”라고 했다.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숨넘어갈 때마다 기적처럼 도와주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잠깐 학교를 돌아보고 큰돈을 내주는 사람도 있었고 기타나 물품을 후원해준 사람도 있습니다.”

해밀학교에 들어서면 벽면에 걸린 큰 나무판에 기적을 만들어준 사람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다. 견미리, 류진, 한혜진, 김종진 등 연예인들의 이름도 보인다. 지난 6월 하나금융나눔재단은 해밀상호문화교류센터 건립 지원을 약속했다. 해밀학교 옆에 세워질 해밀상호문화교류센터는 해밀학교 기숙사와 다문화 청소년 소통의 공간으로 활용할 계획으로 내년 착공 예정이다. 해밀학교의 큰 숙제가 풀린 셈이다. 현재 기숙사는 학교와 10여㎞ 떨어진 곳에 있다.

해밀학교의 기적은 ‘가수 인순이’였으니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한번은 제주도에서 열린 세계한인무역협회(OKTA) 행사 무대에 섰다. 그를 대표하는 노래 ‘거위의 꿈’과 ‘아버지’를 부르자 성공한 한인 기업가들이 여기저기서 눈물을 훔쳤다. 그중에는 재일동포 기업가 장영식 에이산그룹 회장도 있었다. 장 회장의 초청으로 학생 10명은 올해 일본으로 3박4일 진로탐방을 다녀왔다.

김인순 이사장은 매주 한 번씩은 해밀학교를 찾는다. 학생들은 김 이사장을 “쌤”이라 부르면서 스스럼없이 대한다.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김인순 이사장은 매주 한 번씩은 해밀학교를 찾는다. 학생들은 김 이사장을 “쌤”이라 부르면서 스스럼없이 대한다.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거위의 꿈’이 꿈을 꾸게 하다

‘난 꿈이 있었죠. 버려지고 찢겨 남루하여도 가슴 깊숙이 보물과 같이 간직했던 꿈’. ‘거위의 꿈’의 가사이다. 화려한 무대 위에서 꿈을 노래했지만 정작 가수 인순이는 꿈이 뭔지도 모르고 달려왔다. 돈을 벌기 위해 가수가 됐고 가장으로서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삶이라는 러닝머신 위에서 기계처럼 움직였다. “‘거위의 꿈’을 부르고서야 꿈이라는 단어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거위의 꿈’을 연습하면서 그는 많이 울었다.

그는 “내 삶은 기적”이라면서 “내가 이룬 것은 하나도 없다. 다른 사람이 이끌어줬다”고 말했다. ‘희자매’로 데뷔한 후 긴 슬럼프를 겪던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열린 음악회’, 조PD와 함께 부른 ‘친구여’, ‘거위의 꿈’ ‘아버지’ 그리고 ‘나는 가수다’ 등이 그가 꼽은 기적들이다. 기억도 희미한 아버지로 인해 아팠던 만큼 그의 노래 ‘아버지’는 많은 사람들을 울렸다. 2008년 미국 카네기홀에서 107명의 한국전 참전용사 앞에서 그는 ‘아버지’ 노래를 부른 순간을 잊지 못한다. 그날 그는 참전용사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모두 제 아버지십니다. 고맙습니다.”

그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이젠 그림으로 그린다. 그의 그림 중에 우산을 씌운 철모 위로 들꽃이 피어 있는 그림이 있다. “구멍 난 철모는 아버지, 꽃은 부모의 사랑이에요. 사랑은 어디서도 피어나요. 그걸 이제 이해하는 거죠.” 그의 그림 속에는 모두 우산이 들어 있다. 그는 우산이 좋다. 우산을 쓰면 그 안에 자신만의 우주가 있었다. 사람들을 피해 수녀가 되고 싶었지만 사람들 앞에 서야 하는 가수가 됐다. 학교를 만들기 전, 자신을 다 드러내야 하는 부담감 때문에 마음의 갈등이 컸다. 그는 “상처를 낫게 하기 위해서는 소독을 해야지 덮고 감춰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걸 알기까지 그는 오래 걸렸다. 그에게 성공은 ‘성장’이었다. 그는 해밀학교 아이들은 성장통을 겪는 시간이 짧기를 바란다.

그는 사람들에게 과분한 사랑을 받았고 그 사랑에 보답하는 방법이 해밀학교라고 말했다. 그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굳이 말을 하지 않는다. 결과로 보여주고 싶다. 그는 “해밀학교가 다문화 대안학교의 롤모델이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월급날이 다가올 때면 머리를 싸매다가도 아이들이 변하는 모습을 보면 다시 뛸 힘이 생긴다.

이젠 그를 받쳐주는 우산들이 많다. 그의 뜻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있다. 인터뷰가 끝나갈 때쯤 한 노부부가 학교를 찾아왔다. 인근 동네에 사는데 해밀학교 이야기를 듣고 “뭐라도 도와줄 것이 없나” 싶어 찾아왔다고 했다. 그는 “오셔서 아이들과 함께 이야기만 나눠줘도 도움이 된다”면서 한참을 서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학교 이름인 ‘해밀’은 ‘비가 온 후 맑게 갠 하늘’을 뜻한다. “우리 학교는 이상하게 큰 행사만 있으면 비가 온다. 개교 기념식 때도 학교 준공식 때도 비가 억수로 쏟아지더니 행사가 끝나고 맑아졌다”면서 그가 덧붙였다. “비가 와도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준다면 구름은 날아가고 그 뒤에 가려진 해가 보입니다. 우리 아이들도 비 오는 어려운 시간을 견디고 맑은 하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황은순 기자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