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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쟁]  ‘반일 종족주의’ 이영훈의 ‘독도’ 반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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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회/르포
[2575호] 2019.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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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반일 종족주의’ 이영훈의 ‘독도’ 반격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이승만학당 교장)·‘반일 종족주의’ 대표저자 겸 편집자 

이 글은 주간조선 8월 26일자(2572호)와 9월 2일자(2573호)에 실린 이선민 조선일보 학술기자의 글(‘국사학도 기자가 이영훈 교수에게 묻다’)에 대한 반론이다. 이선민 기자는 필자가 편집한 책 ‘반일 종족주의’에 제시된 필자의 독도 이해를 비판하였다. 필자는 우리 정부나 산하 연구소, 박물관, 역사 교과서가 독도가 역사적으로 한국의 고유영토였음을 입증하기 위해 제시해온 여러 가지 근거를 논박하였다. 512년 신라가 우산국을 정벌한 사건, 1450년대 ‘세종실록지리지’에 나오는 우산도, 1693~1696년에 있은 안용복(安龍福) 사건, 1900년 대한제국이 울릉도를 울도군으로 승격하면서 석도(石島)를 관할 섬으로 지정한 사건 등이 그것들이다.
   
   실은 독도 연구자들 사이에 위의 여러 근거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은 이전부터 죽 있어온 바로서 그리 생소하지 않다. 그럼에도 이번에 필자의 글을 두고 논란이 인 것은 필자가 그간의 여러 지적을 종합하면서 우리 한국인의 독도 고유영토설에 대한 맹목적 지지를 ‘종족주의’라는 명제로 비판하였기 때문이다. 필자는 설령 국익에 반하더라도 연구자는 사실과 논리를 엄정하게 추구해야 하며, 그 길이 궁극적으로 국익에 봉사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실은 ‘반일 종족주의’의 편집에서 독도에 관한 글은 빼는 편이 좋겠다는 충고가 없지 않았지만, 끝내 그에 구애되지 않은 것은 위와 같은 신념에서였다.
   
   어쨌든 사건은 벌어졌다. 독도 고유영토설에 대한 종합적 논박이 공개리에 최초로 이루어진 셈이다. 정부, 산하 연구소, 박물관, 교과서 집필자들은 필자의 비판에 대응해야 한다. 성공적으로 방어하지 못할 경우 예컨대 외교부의 독도 관련 홈페이지는 닫아야 한다. 그것이 차가운 논리와 이성이 지배하는 학문의 세계이다. 여러 역사 교과서를 살피면 1900년 울도군에 부속한 석도를 독도로 간주함이 독도 고유영토설의 근거로서 가장 중시되고 있다. 필자는 그 논리의 억지와 모순을 비판한 위에 석도가 울릉도에 바로 붙은 오늘날의 관음도임을 입증하는 새로운 지도까지 제시하였다.
   
   이선민씨는 학술기자로서 우선 이 사건 자체의 파장을 취재할 필요가 있었다. 우선 외교부의 담당관을 비롯하여 그간 정부의 적극적 지원 아래 독도 문제를 취급해온 이른바 전문가들의 의견을 청취해야 하였다. 그렇지만 책이 나온 지 두 달이 지났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지금껏 단 한마디도 들리지 않는다. 대신 이 기자 자신이 논쟁의 당사자로 나섰다. 그가 필자를 상대로 제기한 첫 번째 비판은 필자의 입장에선 논점 이탈과 다를 바 없는 성질의 것이다.
   
   이 기자는 필자가 독도가 일본의 영토가 아님을 밝힌 1877년 일본 명치정부의 이른바 ‘태정관문서(太政官文書)’에 대해선 왜 언급하지 않는가라고 따졌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 문서는 우리 한국 측이 국제사회에 제시할 독도 고유영토설의 근거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1873년 명치정부는 전국의 토지를 측량하고 지적(地籍)을 작성하는 사업을 개시하였다. 1876년 내무성 지리료(地理寮)의 관리들은 일본해(동해) 속의 울릉도가 혹 측량의 대상이 되지 않는지를 시마네(島根)현 지사에게 조회하였다. 그에 대해 현 지사는 해당 섬에 관해 1695년 막부가 조선의 영토임을 인정한 조치가 있었음을 상기하면서 울릉도와 도중 항로의 1개 섬, 곧 독도는 일본의 영토가 아니지만 그렇게 최종 결정할지 여부는 내무성의 몫이라는 의견을 상신하였다. 이에 내무경 오쿠보(大久保利通)는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과 관계가 없다”는 결정을 내림과 동시에 “판도(版圖)의 취사(取捨)는 중대한 안건”이므로 이를 최고 집정자인 태정관에 상신하여 그의 이름으로 동일 내용의 지령을 반포케 하였다. 그것이 곧 태정관문서이다.
   
   
▲ 1906년 5월 20일 의정부 참정대신 박제순이 강원도 관찰사에 내린 지령3호.

   태정관문서의 인식은 1904년까지만 유효
   
   필자가 보기에 명치정부의 실력자 오쿠보가 자신의 결정을 넘어 태정관의 지령까지 구한 것은 그 결정의 정치적 의미가 매우 중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일본 사회는 정한론(征韓論)을 둘러싸고 여론이 갈라져 있었으며, 이는 1877년에 벌어진 내전과 무관하지 않았다. 오쿠보는 울릉도와 독도를 둘러싼 조선과의 알력이 자칫 중국과의 충돌로 이어질 위험성을 예의 선제 차단한 셈이었다.
   
   이러한 전후 사정에서 작성된 태정관문서는 독도와 관련하여 그것이 조선의 영토라는 일본 측 인식을 전제하고 있다. 이러한 일본 측의 인식은 크게 보아 1904년까지 이어졌다. 당시 일본이 보기에 독도는 조선왕조가 그것의 객관적 소재를 인지하는 가운데 그것을 자국의 영토로 영유하는 체제를 성립, 유지하는 섬이었다. 일본의 오키(隱岐)섬보다 조선의 영토임이 확실한 울릉도에 보다 가깝기 때문에 그 점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이 같은 일본 측 인식이 실제 조선왕조가 독도의 객관적 소재를 인지하고 그것을 영유하는 체제를 유지했다는 사실을 보증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태정관문서는 이후 언젠가 조선왕조가 독도를 영유하고 있지 않음을 일본의 관민이 인지할 때 일본 정부의 독도 입장이 달라질 가능성을 배척하지 않는다. 바로 이 점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에 태정관문서에 관한 기왕의 한국 측 이해에 큰 맹점이 있었다고 필자는 생각하고 있다.
   
   실제 조선왕조는 독도의 객관적 소재를 인지하였던가. ‘반일 종족주의’에서 필자는 그렇지 못했음을 1882년의 울릉도 감찰 사건, 1889년에 작성된 대한전도(大韓全圖)를 통해 설명하였다. 1900년 울릉도를 울도군으로 승격할 때도 마찬가지였음은 앞서 지적한 그대로인데, 이 점은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좀 더 부연한다. 동년 10월 22일 내무대신 이건하(李乾夏)는 의정부에 울도군 승격을 청원하면서 해당 섬의 형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울릉도는 종(縱)이 80리, 횡(橫)이 50리이다. 토지가 비옥하고 인구가 번식하여 농지 1만두락(斗落)에 연간 수확이 감자 2만포(包), 보리 2만포, 밀이 5000포이다. 비록 육지의 산군(山郡)에 미치지 못하지만 큰 차이가 없다. 근래에 외국인이 왕래하여 교역의 이익이 있다.”
   
   다시 말해 조선왕조의 울릉도에 관한 이해와 평가는 기본적으로 농업국가의 그것을 넘지 않았다. 원양어업 강치잡이의 거점으로서 독도의 존재는 관심 능력 밖이었다. 섬의 영역을 80리(32㎞)와 50리(20㎞)라 한 것도, 산지의 굴곡을 포함한 거리라 여겨지는데, 동남 87㎞ 해양상의 독도를 내포하지 않았다.
   
   
▲ 1877년 일본 태정관이 ‘죽도(竹島·울릉도)와 그 외 일도(一島·독도)는 일본과 관계없는 곳’이라는 결정을 내무성에 내려보낸 이른바 ‘태정관문서’.

   일장기 꽂혀도 독도가 어떤 섬인지 몰랐다
   
   조선왕조와 독도의 이 같은 관계가 일본 관민에 의해 명확히 인지되는 것은 1904년의 일이다. 나가이(中井養太郞)라는 오키섬 거주 일본 어민이 그 주역이었다. 나가이와 그에 협력한 오키섬 출신의 중앙정부 관리들이 독도가 조선의 영토인 증거가 없음을 들어 일본 정부에 시마네현 편입을 청원하고 1905년 2월 그렇게 귀결된 과정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겠다. 그들은 이미 1903년 5월부터 독도 바위에 일장기를 꽂았지만, 울도군수는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였다. 정기적인 순시를 포함한 독도의 영유체제가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선민 기자는 1906년 5월 독도가 일본 영토에 편입된 사실을 인지한 한국 정부가 비록 발송되지는 못했지만 항의문서를 작성했으며, 이 사실은 도하 신문에 보도까지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 두 가지 모두 사실이 아니다. 이 기자가 언급한 규장각 소장의 항의문서<사진자료 참조>는 1906년 5월 20일 의정부 참정대신 박제순(朴齊純)이 강원도 관찰사에 내린 지령3호로서 예부터 잘 알려져온 것이다. 필자는 이 기자가 이 문서를 세밀하게 읽었는지 의심하고 있다. 문서의 내용과 당시 상황을 간략히 소개한다.
   
   <1906년 4월 4일 일본 시마네현 오키섬 도사(島司) 일행이 울릉도를 찾아와 독도가 일본령에 편입되었음을 알린 다음, 울릉도의 인구와 산업 등을 질문하고 돌아갔다. 이에 4월 모일에 울도군수가 “본군 소속으로” “바깥바다 백여 리에 있는” 독도가 일본에 편입되었음을 강원도 관찰사에 보고하였다. 4월 29일 강원도 관찰사가 그 사실을 중앙정부에 알리는 보고서를 작성하는데, 의정부가 이를 접수하는 것은 5월 7일이었다. 이후 13일이 지난 5월 20일 참정대신 박제순은 강원도 관찰사에게 다음과 같은 지령을 내렸다. “보고서는 자세히 살폈으며 (일본의) 독도 영유설은 전혀 근거가 없으나 해당 섬의 형편과 일본인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다시 조사하여 보고하라.”>
   
   필자는 이 문서를 두고 일본 정부에 대한 항의문서라 여기는 이 기자를 비롯한 여러 연구자의 주장을 납득하지 못한다. 강원도 관찰사에 대한 참정대신의 지령은 마치 울릉도에 부속한 어느 섬에 일본인들이 무단 상륙하여 야료를 부리고 있는 사태를 상정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독도가 어떤 섬인지를 전혀 알고 있지 못함을 폭로하고 있을 뿐이다. 필자는 이 문서를 통해 1906년 5월까지도 독도의 객관적 소재와 실태를 알지 못한 대한제국 중앙정부의 민낯을 읽을 뿐이다.
   
   그 점은 현지의 울도군수도 마찬가지였다. 앞서 지적한 대로 이미 1903년부터 독도 바위에 일장기가 펄럭였지만, 울도군수는 일본 오키섬 도사가 통보해주는 1906년 4월까지 그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동남 87㎞ 해상의 독도를 두고 바깥바다 100여리(40㎞)에 있는 섬이라고 했는데, 그 역시 한번도 독도에 가보지 않은 지방관리의 부정확한 보고였다. 기존의 연구에 의하면 1904년경 울릉도에 거주한 한국인들은 흔히 ‘리얀코’라고 불러온 그 섬을 ‘독도(獨島)’라고 부르고 쓰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현지 주민의 영유 의식에도 불구하고 1906년 5월의 위 문서는 지방정부나 중앙정부 차원에서 독도를 영유하는 체제가 그때까지도 정비되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광복 후 한국을 일본에서 분리할 방침을 세운 연합군 사령부가 독도를 한국령에 포함시킨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한국령 울릉도에 보다 근접한 섬이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이후 한국 정부는 국제사회로부터 그 섬을 자국의 영토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샌프란시스코 회담을 주관한 미 국무부에, 미 국무부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그 섬이 한국의 고유영토임을 입증할 자료를 제출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반면 일본은 자료를 제출하였다. 그것을 두고 일본이 간계를 부려 미국의 판단을 흐리게 만들었다고 이야기해서는 곤란하다. 일본 정부는 자국의 국익을 위해 그들이 보유한 자료를 제출하고 국제사회를 설득하였을 뿐이다.
   
   필자는 1952년 1월 이승만 대통령이 평화선을 발표하고 독도를 우리의 영토로 편입한 사건을 이해하고 지지한다. 독도는 원래 오키섬보다 울릉도에 보다 가깝게 위치한 섬이었다. 당연히 한국령이 되어야 할 섬이었다. 일본인 연구자 이케우치(池內敏)는 일본이 이웃 나라에 보다 근접한 섬을 ‘무주지 선점의 원칙’을 내세워 차지한 것은 도덕적으로 정당하지 않았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 주장으로 이케우치 교수는 일본 국민으로부터 적지 않은 질타를 당하는 모양이다. 필자는 이케우치의 주장에 감사한다. 우리 한국에도 그 같은 연구자가 있어야 한다. ‘반일 종족주의’에 실린 필자의 독도 관련 글은 그런 취지에서 쓰였다. 독도는 한때 국운이 쇠하여 빼앗긴 섬이었다. 그것을 이승만 대통령이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그렇지만 그간의 굴곡이 없지 않아서 대놓고 분쟁을 벌일 처지가 아님도 또한 사실이다. 그래서 박정희 정부 이래 김대중 정부까지 역대 정부는 독도에 대해 도발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일본 정부와의 사실상의 협약에 충실하였다. 분쟁을 낮은 수준에서 일종의 의례로 관리하는 가운데 일본과의 우호·협력 관계를 추구하였다. 그것이 국익을 위하는 현명한 길이었다.
   
   
▲ 독도 전경 photo 뉴시스

   노무현 정부부터 시작된 ‘독도 종족주의’
   
   그러한 역대 정부의 현명함을 깨고 독도에 대해 공격적인 자세로 돌아선 것은 노무현 정부였다. 그와 동시에 “독도, 내 조상의 담낭”이라거나 “독도 바위를 깨면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는 식의 종족주의가 난무하기 시작하였다. 필자는 ‘반일 종족주의’에서 그 어리석음과 무책임함을 질타하면서 이전 정부의 냉정한 자세로 되돌아갈 것을 촉구하였다.
   
   이선민 기자는 자신을 ‘우파 민족주의’로, 필자를 ‘우파 세계주의자’로 규정하였다. 같은 우파인 입장에서 우파 진영 내에서 야기되는 불편함이나 ‘두통’을 해소하기 위해 필자를 비판한다고 하였다. 필자는 그의 진영 구분에 공감하지 않는다. 필자와 동료 연구자의 ‘반일 종족주의’는 좌·우파를 막론하고 한국인 모두를 운명처럼 사로잡고 있는 종족주의, 그 저열한 역사인식, 그 샤머니즘의 주술성과 비과학성, 거기서 파생하는 도덕적 타락을 비판하고자 하였다. 필자는 인간은 이성만이 아니라 감성의 동물이며, 이에 국민 대중이 일상생활에서 체현하는 집단정서로서 민족주의를 소홀하게 취급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고 정치가를 포함한 지식인 계층마저 민족주의에 매몰되어 역사와 현실을 오도하는 일은 정말이지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필자는 민족주의를 ‘좌파’와 ‘우파’ 또는 ‘민중적’과 ‘시민적’으로 구분함이 타당한지 회의적이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해 민족주의를 표방할진대 지식인으로서의 건전한 이성은 마비되거나 왜곡되기 십상이라고 지적하고 싶다. 유감스럽게도 필자에 대한 이선민 기자의 비판에서 그러한 현상을 재확인하였다. 일본의 태정관문서에 기대어 독도 고유영토설을 입증코자 하거나 참정대신의 무책임하기 그지없는 지령을 일본 정부에 대한 항의문서로 각색하는 것은 민족주의의 독한 향기가 건전한 지성의 후각을 마비시킨 효과 이외의 것으로 달리 설명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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