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26일자 주간조선 제2572호와 9월 2일자 주간조선 제2573호에 실린 필자의 ‘반일 종족주의’ 비평에 대해 이 책의 주요 저자인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와 김낙년 동국대 교수가 반론을 내놓았다. 매우 반가운 일이다. 학술적 논쟁의 불모지인 한국근현대사 분야에 모처럼 내리는 단비라고 할 수 있다. 학계는 물론 국민적 관심이 높은 중요 주제들을 놓고 본격적인 토론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직접 당사자들뿐 아니라 관련 있는 전문가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를 통해 수준 높은 논쟁이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한말 애국계몽운동기에 강원도 강릉에 세워졌던 동진학교의 개교 기념사진. 국어와 국사에 역점을 두고 지리, 산수 등을 가르쳤다. 사진 속 태극기는 2015년 문화재로 등록됐다.
한말 애국계몽운동기에 강원도 강릉에 세워졌던 동진학교의 개교 기념사진. 국어와 국사에 역점을 두고 지리, 산수 등을 가르쳤다. 사진 속 태극기는 2015년 문화재로 등록됐다.

150년 근대화 과정서 40년 日帝 영향 과대평가 말아야

9월 9일자 주간조선 제2574호에 실린 글에서 김낙년 교수는 필자의 비평에 대해 두 가지 반박을 했다. 그 하나는 “일제시기에는 한국이 독립했을 때 달성할 수 있었던 비약적인 성장을 일제가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라는 필자의 주장이 무리라는 것이다. 일제시기(연평균 2.2%)와 해방 후(연평균 4.9%)의 경제성장률 차이는 독립국 여부로 인한 것이라기보다는 세계경제로부터의 영향이 더욱 컸다는 지적이다.

필자가 일제시기에 한국이 독립국이었다면 연평균 4.9%의 경제성장을 달성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해방 후 한국이 성취한 놀랄 만한 고도성장에 비추어보면 그 앞 시기도 한국인이 스스로 경제성장을 이룰 능력을 갖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물론 이런 주장에 대해서도 여러 각도에서 비판과 반론이 가능하다. 하지만 여기서는 한국인의 경제성장 능력이 갑자기 해방 후에 하늘에서 떨어진 것으로 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점만 지적해 두기로 한다.

다른 하나는 대한제국 시기 애국계몽운동 단체들과 그 계보를 잇는 국내외의 우파 민족주의자 등 민간 근대문명 세력이 우리나라 근대화의 주역이었다는 필자의 주장이 ‘근대적 제도의 이식’은 놓친 채 ‘조선인의 활동’에만 초점을 맞추어 일면적이라는 것이다. 김 교수가 ‘보다 중요한 논점’이라고 언급한 것처럼 이 문제는 한국근현대사의 이해에 핵심적이다. 필자가 국사학도로서 사상사·정치사·운동사 등 ‘상부구조’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을 지탱하는 경제사·사회사·제도사 등 ‘하부구조’의 중요성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김 교수는 “근대적 제도의 도입은 당시 고종을 비롯한 위정자들도 이루지 못했지만 그에 대항해서 자주적 근대화를 꿈꿨던 애국계몽운동 세력도 그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고 지적했다. 대한제국이 전제(專制)군주국이 되면서 국정 운영에 참여하지 못한 애국계몽운동 세력이 근대적 제도를 도입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했다. 이런 점에서 이들의 애국적인 개혁 요구를 억누른 고종 등 집권 세력이 망국의 주된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이들은 한말은 물론 나라가 망한 뒤에도 민간 차원에서 근대화 노력을 계속했고, 3·1운동 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여 독립이 된 다음 근대국가로서 채택해야 할 각종 제도를 ‘임시헌장’과 ‘임시헌법’에 담았다. 그리고 거기에 담겼던 근대적 제도들은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제헌헌법에 들어갔고 하나씩 실천에 옮겨졌다.

김 교수는 일제가 이식한 대표적인 근대적 제도로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을 꼽았다. 재산권의 보호나 계약 또는 영업의 자유, 회사제도와 같은 근대사회의 원리나 제도가 담겨 있는 일본 민법이 거의 그대로 조선에도 시행되었고, 이것이 경제성장에 도움이 됐다는 것이다. 또 해방 후 조선민사령 체제를 유지한 남한과 폐기한 북한의 차이가 남북한의 발전경로가 갈라지는 데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지적했다.

경제사적 측면에서만 본다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근대화’는 경제성장만을 가리키는 개념이 아니다. 신분제 폐지, 국민주권 실현(보통선거 실시), 의무교육 도입 등 근대사회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다른 제도들은 일제가 이식하지 않았다. 일제는 한국을 제대로 된 근대사회로 발전시키는 데 관심이 없었다. 이런 근대적 제도들은 조선왕조(갑오개혁)나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실현됐다. 그런 점에서 “근대 제도의 이식과 시행은 일제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냉엄한 역사적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는 김 교수의 주장은 진실의 한 부분만 담고 있다.

일제가 조선에 도입한 것은 조선민사령만이 아니었다. 조선민사령이 공포되던 1912년 조선총독부는 ‘조선태형령(朝鮮笞刑令)’도 제정했다. 곤장으로 볼기를 때리는 태형은 일본에서는 전근대적이라고 해서 1882년에 폐지됐지만 식민지에서는 제도화됐다. 일제 통치의 폭압성을 상징하는 태형은 3·1운동이 일어나고 이른바 ‘문화통치’가 실시되면서 없어졌지만 이후에도 정치·사회 등 각 방면에서 조선에 대한 차별과 억압은 계속됐다. 일제 말기에는 우리말과 역사 교육을 금지하는 등 민족말살정책까지 펼쳤다.

이처럼 일제시기에 나타나는 ‘근대적 제도의 도입’과 ‘식민지 지배의 수단’이라는 서로 다른 모습을 모두 포착하기 위해 학계에서는 ‘식민지적 근대’ ‘식민지 근대성’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이런 관점에 서는 학자들은 서구적 근대를 극복 대상으로 보는 탈(脫)근대주의, 서구적 근대에 비판적이고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대안적 근대를 모색하는 좌파 민족주의, 서구적 근대의 보편성을 받아들이는 우파 민족주의 등 여러 입장이 있지만 일제시기 조선의 근대에 나타난 억압성·기형성·파행성을 강조하는 점은 같다. 필자는 일제시기를 설명하는 데 경제성장과 조선인의 근대 학습을 강조하는 ‘식민지 근대화론’보다 식민지배의 양면성(兩面性)과 중층성(重層性)을 드러내는 ‘식민지적 근대론’ ‘식민지 근대성론’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김낙년 교수는 “개항 이후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는 일제시기도 포함하여 서구 근대문명의 확산과 수용이라는 큰 틀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리고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이제 150년 가까이 진행된 한국의 근대화에서 불과 40년을 차지하는 일제시기가 미친 영향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한국근현대사를 거시적 관점에서 보면 일제시기는 서구 근대문명의 수용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타의에 의해 한동안 탈선(脫線)했던 기간이었다. 한민족은 해방 후 다시 자주적 근대화라는 원래 궤도로 돌아와 치열한 노력 끝에 세계사에서 유례없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한국의 자주적 근대화는 개항 이후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각축 속에서 30년 동안 ‘시간과의 경쟁’을 벌이면서 숨 가쁘게 추진됐다. 집권 세력의 잘못으로 나라를 빼앗긴 뒤에는 국내외에서 우파 민족주의자들이 근대화를 위해 노력했고, 그들의 꿈은 나라를 되찾은 뒤 대한민국을 통해 70년 넘게 착실하게 실현되고 있다. 우파 민족주의자들을 주축으로 하는 대한민국 수립 주역들이 조선민사령 체제를 유지한 것은 일제가 이식한 제도라도 근대국가에 필요하다면 선택적으로 활용하는 안목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서구적 근대의 보편성을 이해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래서 ‘구정물을 버리면서 아기를 버리지 않는’ 지혜를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 설 때 필자가 지난번 글에서도 강조했듯이 한국의 근대를 ‘이식’과 ‘수용’ 중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김낙년 교수는 ‘이식’ ‘수용’ ‘확산’을 구별하지 않고 섞어서 사용했지만 필자는 한국의 근대는 주체적인 ‘수용’이었고, 그때에만 ‘확산’이 가능했다고 본다. 외부의 힘에 의해 ‘이식’된 근대는 ‘확산’되기 어렵다. 한말 애국계몽운동기에 전국 각지에서 학교 설립이 들불처럼 번져갈 때 열광적으로 호응했던 우리 조상들이 일제 통치 초기에는 자녀의 학교 취학을 거부했던 모습에서 그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울릉도 쟁계’ 결과를 토대로 만들어진 태정관문서

9월 23일자 주간조선 제2575호에 실린 글에서 이영훈 교수는 “(‘반일 종족주의’) 책이 나온 지 두 달이 지났지만 전문가들의 목소리는 지금껏 단 한마디도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그동안 여러 언론에서 ‘반일 종족주의’가 다룬 주요 주제들에 대해 전문가들의 비판을 실었다. 그 가운데 독도 문제는 9월 2일자 조선일보에 김기철 학술전문기자가 쓴 ‘연구자 3인이 본 ‘반일 종족주의’ 3대 쟁점’이라는 기사를 꼽을 수 있다. 이 기사에서 최운도 동북아역사재단 독도연구소장은 “16세기 지도를 현대 지도와 같은 시각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다. 조선시대 지도를 보면 우산도는 17세기 말 안용복 사건을 계기로 울릉도 서쪽에서 동쪽으로 자리를 잡아간다. 우산도에 대한 인식이 구체화되고 있다는 뜻이다. ‘동국문헌비고’(1770) 등에는 ‘울릉도와 우산은 모두 우산국 땅인데, 우산은 바로 왜인들이 말하는 송도(독도)’라고 기록돼 있다”고 했다. 필자는 학계에서 널리 받아들여지는 연구들에 바탕을 둔 이 서술이 대체로 역사적 사실에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서 핵심이라고 할 이 부분은 오랫동안 천착해온 전문가가 따로 깊이 있게 다룰 필요가 있다.

이영훈 교수는 또 필자가 주장하는 ‘시민적 민족주의’에 회의적인 입장을 피력했다. 이것은 이념 문제라서 견해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민족주의’는 이 논쟁의 주제가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 따지지 않겠다. 필자는 지난 7월 31일자 조선일보에 쓴 ‘‘‘민중적 민족주의’를 넘어 ‘시민적 민족주의’로”라는 칼럼에서 이와 관련한 생각의 골자를 밝힌 바 있다.

그러나 필자의 비평이 ‘민족주의의 독한 향기가 건전한 지성의 후각을 마비시킨 효과’라고 주장한 것에는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민족주의가 그런 위험성을 지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런 위험성은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세계주의 역시 마찬가지이다. 필자는 이영훈 교수의 글에서도 동일한 위험성을 발견한다. 그런 위험성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중요한 자료를 외면하지 말고, 자료를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해석하며, 그로부터 논리적으로 도출되는 결론을 부정하지 말아야 한다. 이제 이런 입장을 최대한 지키면서 필자의 비평에 대한 이 교수의 반론을 하나씩 검토해 보기로 하자.

이영훈 교수는 “왜 독도가 일본 영토가 아니라고 한 메이지 정부의 태정관문서는 언급하지 않았느냐”는 필자의 질문을 ‘논점 이탈’이라고 했다. “그 문서는 한국 측이 국제사회에 제시할 독도 고유 영토설의 근거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독도에 대해 일본이 ‘무주지 선점론’이나 ‘일본 고유 영토설’을 주장하는 상황에서 현재의 일본 정부와 바로 이어지는 메이지 정부가 독도 영유권을 어떻게 생각했는가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독도 한국 고유 영토설’을 뒷받침하는 결정적 증거는 아니라 해도 유력한 방증이 될 수 있다. 더구나 태정관문서는 독도에 대한 일본의 이후 움직임을 이해하는 데도 필수적이다. 그래서 호리 가즈오(堀和生) 교토대 교수가 태정관문서를 공개한 1987년 이래 한·일 양국의 학자들이 이 문서를 집중 연구해왔다. 이를 ‘논점 이탈’이라고 하는 것은 중요한 자료를 외면한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이영훈 교수는 태정관문서가 “독도가 일본과 상관없다”는 결론을 내린 이유를 “울릉도와 독도를 둘러싼 조선과의 알력이 자칫 중국과의 충돌로 이어질 위험성을 예의 선제 차단하기 위해서”라고 해석했다. 독도를 둘러싼 조선과의 분쟁이 중국과의 충돌로 이어질 가능성을 우려한 정치적 판단에서 나온 결정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태정관문서가 만들어진 과정을 살펴보면 합리적이고 객관적이라고 하기 어렵다.

독도 문제와 관련해 태정관문서가 지니는 의미는 이성환 계명대 교수가 쓴 ‘일본의 태정관지령과 독도 편입에 대한 법제사적 검토’(‘국제법학회논총’ 제62권 제3호·2017)란 논문에 상세하게 정리돼 있다. 이 논문에 따르면 태정관문서는 국제정치적 고려가 아니라 시종일관 일본의 지적(地籍) 편찬이라는 행정 차원에서 만들어졌다. 문서 작성의 전 과정을 내무성이 주관한 것이 이를 입증한다.

그리고 그 작업은 역사적 자료를 검토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시마네현과 내무성이 태정관에 올린 문서에 첨부한 방대한 참고자료는 1693~1696년 조선 정부와 일본 막부(幕府) 사이에 벌어졌던 ‘울릉도 쟁계(爭界)’와 관련된 것이었다. 태정관·내무성·시마네현의 5개월에 걸친 치밀한 검토 끝에 태정관 관리들은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 영토가 아니라 조선 영토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래서 “원록(元錄) 5년(1692년) 조선인(안용복-필자)이 입도(入島)한 이래 구(舊)정부(일본 막부)와 해국(該國·조선)과의 왕복의 결과 마침내 본방(本邦)은 관계가 없다는 것을 들어 상신(上申)한 품의(稟議)의 취지를 듣고 다음과 같이 지령을 작성함이 가(可)한지 이에 품의합니다. ‘품의한 취지의 죽도(竹島·울릉도) 외(外) 일도(一島·독도)의 건에 대하여 본방(本邦)은 관계가 없음을 심득(心得)할 것’”이라는 문서를 기안해서 올렸다. 태정관 우(右)대신과 외무·사법·대장경(卿)의 결재를 마치고 확정된 태정관지령은 내무성에 보내져 시마네현에 전달됐다. 이성환 교수는 “태정관지령은 울릉도 쟁계의 결과로 확정된 한·일 간의 국경조약을 메이지 정부가 보다 명확히 국내적으로 수용한 것”이라며 “17세기 이후 조선과 일본 사이에 전개된 울릉도와 독도를 둘러싼 영유권 문제는 메이지 정부에서 완전히 해결, 확정됐다”고 했다.

태정관문서의 성격에 대한 견해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영훈 교수 역시 그것이 독도가 조선의 영토라는 인식을 전제하고 있고, 그런 인식이 1904년까지 이어졌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는 “태정관문서는 이후 언젠가 조선왕조가 독도를 영유하고 있지 않음을 일본의 관민이 인지할 때 일본 정부의 입장이 달라질 가능성을 배척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조선이 독도를 제대로 지키지 못할 경우 일본이 언제든지 입장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일본이 마음만 먹으면 독도를 자기 영토로 편입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이성환 교수는 앞의 논문에서 일본의 입법·행정·사법을 통할하는 국가최고통치기구였던 태정관의 지령은 법률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특히 영토에 관한 결정은 헌법의 영토 조항에 해당한다고 지적했다. 태정관지령은 그 이후에 개정 또는 폐기된 흔적이 없다. 따라서 독도를 법률보다 하위인 내각 결의에 의해 시마네현에 편입한 것은 일본 국내법 체계로도 합법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또 김명기 명지대 명예교수는 ‘국제법상 태정관지령문의 법적 효력에 관한 연구’(‘영토해양연구’ 11권·2016)란 논문에서 태정관지령이 근대국제법이 성립된 이후 작성됐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일본 정부의 공식문서인 ‘태정류전(太政類典)’ ‘공문록(公文錄)’에 등재돼 공시된 태정관지령은 국제법상 국가의 일방적 법률행위인 ‘통고(notification)’에 해당하며, 일본이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한국의 영토주권을 명시적으로 승인한 것이라는 지적이다. 근대국가로 탈바꿈한 일본이 해적국가가 아닌 이상 국내법과 국제법을 어기면서 독도를 자기 영토로 편입할 수는 없다.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한 주역들도 이런 난점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쓴 방법은 독도를 조선의 영토인 ‘송도(松島)’가 아니라 무주지(無主地)인 ‘량코도(りやんこ島)’로 만들고 새로 ‘죽도(竹島)’라는 이름을 붙여 일본 영토에 편입시키는 것이었다. ‘량코도’는 서양인들이 독도를 부르는 이름인 ‘리앙쿠르 암초(Liancourt Rocks)’의 일본식 표기였다. 수백 년 동안 잘 알던 섬을 갑자기 새로 발견된 것처럼 해서 자기 영토에 편입시키는 꼼수를 부린 것이다.

일본의 독도 편입 과정과 그것이 근대기 일본의 도서(島嶼) 영토 확대 과정에서 지니는 의미는 허영란 울산대 교수의 ‘명치기 일본의 영토 경계 확정과 독도: 도서 편입 사례와 죽도 편입의 비교’(‘서울국제법연구’ 제10권 제1호·2003)라는 논문에 잘 정리돼 있다. 독도 문제를 바라보는 시야를 넓혀주는 이 논문에 따르면 ‘무주지 도서 발견→일본인의 이주나 경제활동→영토 편입’은 일본이 메이지유신 후 인접 해양의 섬들을 영토에 편입할 때 사용한 전형적인 수법이었다. 동중국해의 센카쿠열도(尖閣列島·1895), 태평양의 미나미토리시마(南鳥島·1898)가 이 수법에 의해 일본 영토에 편입됐다. 특히 센카쿠열도는 군사적·지리적 요충지에 눈독을 들이던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가 확실해지자 영토에 편입시켰다는 점에서 러일전쟁의 혼란을 틈타 영토에 편입시킨 독도의 판박이 선례(先例)였다. <표 참조>

이영훈 교수는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시킨 주역이 ‘나가이라는 오키섬 거주 일본 어민’이었다고 주장했다. 나가이와 그에 협력한 오키섬 출신의 중앙정부 관리들이 독도가 조선의 영토인 증거가 없음을 들어 일본 정부에 시마네현 편입을 청원했다는 것이다. 일본의 독도 편입이 지역 차원에서 일본 관민(官民)의 의지로 이루어졌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 1903년 5월부터 울릉도를 거점으로 독도 부근에서 강치 잡이를 하던 어업 사업가 나가이 요자부로(中井養三郞)는 독도가 조선 영토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1904년 9월 도쿄의 농상무성을 찾은 것은 조선 정부로부터 독도를 임차할 방안을 묻기 위해서였다. 그런 나가이를 부추겨 ‘량코도 영토 편입원(願)’을 제출하도록 만든 주역이 해군성 수로부장, 외무성 정무국장 등 당시 일본의 대외침략을 이끌던 핵심 관료였다는 사실은 이미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독도 편입은 러일전쟁이 진행되면서 군사적 요충지인 독도에 망루 건설, 해저전신선 부설 등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일본 정부가 조직적으로 진행한 작업이었다. 그리고 이런 계획은 독도 편입 후 차례로 실현됐다. 일본의 독도 영토 편입 과정 전체를 살펴볼 때 논리적으로 도출되는 결론은 그 주역이 나가이가 아니라 러일전쟁과 관련된 일본 정부 요인들이라는 것이다.

일본이 독도를 자기 영토에 편입했다고 주장한다는 심흥택의 보고와 이에 대한 내부(內部)의 지령을 보도한 대한매일신보(왼쪽)와 제국신문 기사. 제국신문은 내부가 “‘일본리사’와 교섭하여 처단하라”고 훈령했다고 적었다.
일본이 독도를 자기 영토에 편입했다고 주장한다는 심흥택의 보고와 이에 대한 내부(內部)의 지령을 보도한 대한매일신보(왼쪽)와 제국신문 기사. 제국신문은 내부가 “‘일본리사’와 교섭하여 처단하라”고 훈령했다고 적었다.

제국신문 기사 “일본리사에게 교섭하여 처단하라고 지시”

이영훈 교수는 1906년 5월 독도가 일본 영토에 편입된 사실을 인지한 대한제국 정부가 비록 발송되지는 못했지만 항의문서를 작성했으며, 이 사실은 도하 각 신문에 보도됐다는 필자의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일본의 독도 무단 편입 사실을 대한제국 정부가 처음 알게 된 것은 1906년 3월 독도를 관할하는 울도(鬱島)군수 심흥택의 보고를 통해서였다. 시마네현 관리가 이끄는 45명의 대규모 조사대는 독도를 돌아본 후 울릉도에 와서 심흥택에게 일본이 독도를 영토로 편입했다고 말했다. 심흥택은 즉시 중앙정부에 이를 보고했고, 그 결과 나온 것이 내부대신 이지용과 의정부 참정대신 박제순의 지령문이었다. 심흥택은 ‘본군(本郡) 소속 독도(獨島)’를 일본이 영지(領地)로 삼았다고 주장한다는 것을 보고했고, 정부의 최고책임자였던 박제순은 지령에서 “올라온 보고를 다 읽었고 독도가 일본 영지 운운하는 주장은 전적으로 근거 없다”고 일축했다.

심흥택의 보고서는 1947년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단의 일원이었던 신석호 고려대 교수가 울릉도청에 있던 부본(副本)을 찾아내 논문으로 공개했다. 한국 쪽에서 ‘독도’라는 명칭이 처음 나오는 이 보고서의 부분은 그 후 사라져 연구자들이 애를 태웠다. 그러다 1978년 송병기 단국대 교수가 서울대 규장각에서 심흥택의 보고를 받은 강원도관찰사서리 이명래가 의정부 참정대신에게 보낸 보고서에 수록된 심흥택의 보고서를 발견했다.

이영훈 교수는 의정부 참정대신의 지령을 인용하면서 “이 문서를 통해 1906년 5월까지도 독도의 객관적 소재와 실태를 알지 못한 대한제국 중앙정부의 민낯을 읽을 뿐”이라고 했다. 하지만 필자는 참정대신 지령에 대한 이 교수의 독해를 이해할 수 없다. 심흥택의 보고와 이에 대한 정부의 지령을 보도한 언론을 보면 당시 현지 주민뿐 아니라 대한제국의 관민(官民)은 독도를 우리 영토로 잘 알고 있었다. 심흥택의 보고는 1906년 5월 1일자 ‘대한매일신보’와 ‘제국신문’, 5월 9일자 ‘황성신문’에 기사화됐다. 당시 3대 신문에 모두 실린 것이다.

한말 우리 지식인들이 독도를 한국 영토로 생각했음은 우국지사 황현의 저술에서도 알 수 있다. ‘매천야록(梅泉野錄)’ 1906년 음력 4월조(條)는 “울릉도 바다 동쪽 백리 떨어진 곳에 섬 하나가 있는데 독도라고 한다. 예로부터 울릉도에 속했는데 왜인(倭人)들이 자기네 영토라고 억지를 쓰며 자세히 조사해갔다”고 했다. ‘오하기문(梧下記文)’은 “울릉도 백리 밖에 하나의 속도(屬島)가 있는데 독도라고 한다. 왜인들이 이제 일본 영토가 되었다고 하며 자세히 조사해갔다”고 했다.

심흥택의 보고 이후 대한제국 정부의 대응과 관련, 외교부 영토해양과 홍정원 박사는 ‘러·일의 울도군 침탈과 대한제국의 대응 연구’(‘군사(軍史)’ 제80호·2011)라는 논문에서 제국신문 기사에 주목했다. 그 내용은 “내부에서 훈령하기를 일인(日人)의 호구 조사는 용혹무괴(容或無怪)한 일이어니와 점령하였다는 말은 무거(無據)한 일이니 정 이상하거든 일본리사에게 교섭하야 처단하라 하였다더라”는 것이었다. 홍 박사는 ‘일본리사’는 1906년 2월 통감부의 지방기구로 설치된 이사청(理事廳)을 가리키는 것으로 대한제국 정부가 통감부에 조회했다는 방증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1906년 7월 통감부가 내부에 울도군의 소속 도서와 군청 설치 시기를 알려달라는 공문을 보냈고, 9월 내부의 지시를 받은 울도군이 군(郡)의 경계 위치와 호구장적을 보고했다는 언론 보도를 이와 연결시켜 해석했다. 대한제국 정부가 독도 문제와 관련하여 일본 측과 접촉했다는 것이다.

이영훈 교수는 “대한제국은 1906년 5월 지방정부나 중앙정부 차원에서 독도를 영유하는 체제를 정비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대한제국이 독도를 정기 순시하거나 방어하는 체제를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웃집의 방범이 소홀한 틈을 타서 그 집의 귀중품을 노리던 도둑이 무단 침입해 주인의 손발을 묶고 귀중품을 털어 달아난 사건에 대해 도둑을 비난해야 하나, 피해자를 비난해야 하나. 그렇게 훔쳐간 장물(贓物)은 돌려줘야 하나, 그냥 가져도 되나. 양식(良識)에 따라 판단할 문제이다.

이영훈 교수는 2차 세계대전 후 한국이 국제사회로부터 독도를 영토로 인정받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미 국무부에 한국은 고유 영토를 입증할 자료를 제출하지 못했고, 일본은 제출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일본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그들이 보유한 자료를 제출하고 국제사회를 설득했을 뿐”이라고 해서 국제사회가 일본에 기울었던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이 교수가 지적한 것은 1951년 8월 미국 국무부가 러스크 차관보의 명의로 한국 정부에 보내온 문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문의에 주미 한국대사관이 정확하게 답변하지 못한 사실이다. ‘반일 종족주의’에도 인용됐던 이 문서는 이른바 ‘러스크 서한’으로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서 독도를 일본 영토로 결정했다고 주장하는 근거로 삼고 있다. 당시 한국은 6·25전쟁을 치르는 중이었고 외교 인력도 일본에 비해 절대적 열세에 있었지만,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후환을 남긴 점은 아쉽다.

그러나 ‘러스크 서한’은 독도 영유권 문제에서 이 교수가 부여하는 정도의 중요성을 지니지 않는다. 우선 서한에 ‘우리 정보에 따르면’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다. 자신들의 정보가 제한적일 수 있다는 점을 전제한 것이다. 그리고 일본 정부와 시볼트 연합군최고사령부(SCAP) 외교국장 등 일본에 우호적인 인사들의 공작에 흔들렸던 미국 정부는 안팎의 반발에 부딪히자 독도 문제를 둘러싼 한·일 갈등에서 중립적 입장으로 선회했고, 1953년 12월 미국 국무장관 덜레스는 불개입을 선언했다. 또 미국은 샌프란시스코 평화회담을 주도했지만 법적으로는 연합국의 일원에 불과했다. 연합국의 또 다른 중요 축이었던 영국을 비롯한 영연방 국가들은 독도 문제와 관련해 시종 한국에 우호적이었다. 당시 국제사회가 점차 독도를 한국 영토로 인정하는 상황이었고, 이를 뒤집기 위해 일본이 총력을 기울였다는 사실은 필자의 지난번 글에 서술된 바 있다.

긴장된 자세로 이영훈 교수의 글을 읽던 필자는 “독도는 한때 국운이 쇠하여 빼앗긴 섬이었다. 그것을 이승만 대통령이 (평화선을 발표하고 독도를 우리 영토로 편입함으로써) 제자리로 돌려놓았다”는 부분에 이르러 어리둥절했다. 이런 서술은 필자의 생각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 교수가 ‘반일 종족주의’와 주간조선 기고에서 거듭 주장한 내용들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독도가 한국의 고유 영토였다고 주장할 증거는 하나도 없다”는 서술과 “독도는 한때 국운이 쇠하여 빼앗긴 섬이었다”는 서술은 논리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 이영훈 교수는 먼저 두 개의 주장 가운데 하나를 철회하여 자신의 입장부터 보다 분명하게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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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민 조선일보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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