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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회/르포
[2576호] 2019.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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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생명나눔 운동 하는 일면스님

▲ 일면스님은 생명나눔실천본부 이사장을 맡아 ‘장기기증 희망등록’을 세상에 알리고 있다. photo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산문에 다가가자 부슬비가 내렸다. 지난 9월 22일 경기도 남양주 불암산에 있는 불암사를 찾은 길이었다. 일주문 처마 밑엔 몇몇이 비를 긋고 있다. 불교에선 산문을 사바세계와 불국토의 경계로 본다. 처마 밑은 삶과 죽음 사이를 잇는 다리인 셈이다.
   
   불암사는 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다. 통일신라시대 지증대사가 창건하고 도선국사가 중창했다. 그 뒤 무학대사가 삼창을 한 유서 깊은 사찰이다. 조선 세조 시기, 한양을 둘러싼 경기도에 왕실의 발전과 안녕을 비는 사찰을 선정했다. ‘동불암(불암사), 서진관(진관사), 남삼막(삼막사), 북승가(승가사)’다. 불암사는 조선 초기, 동쪽에서 왕실을 지키는 호국 사찰이었던 셈이다.
   
   대웅전을 지나 일면스님의 처소인 동축당으로 향했다. 일면스님은 불암사의 회주다. 회주는 법회나 스님들의 모임을 대표하는 어른스님을 뜻한다. 불교의 스님은 크게 이판과 사판으로 나뉜다. 이판은 도를 닦는 수행승, 사판은 절의 살림을 꾸리는 행정승을 뜻한다. 일면스님은 행정승이다. 젊은 시절부터 조계종과 관련 기관에서 직책을 맡았다. 현재도 생명나눔실천본부와 광동학원의 이사장을 맡고 있다. 작년엔 조계종 원로회의의 일원인 원로스님으로 선출됐다. 원로회의는 총무원장 인준권과 불신임 인준권을 갖고 있다. 출가 45년, 세속 나이 70세 이상의 비구스님만 원로스님 후보가 될 자격이 있다.
   
   
   태풍에 스러진 고향 떠나 출가
   
   스님의 근황이 궁금했다. 담담한 답이 돌아왔다. “지난해 선거 이후 종단 소식에 별 관심을 안 갖습니다. 생명나눔실천본부와 광동학원 등 맡은 소임에만 전념할 뿐입니다.”
   
   작년 조계종엔 큰 파도가 일었다. 총무원장에 취임한 설정스님이 친자 의혹으로 탄핵됐다. 이후 선거가 열렸고 원행·일면·혜총·정우 스님 등 총 4명이 출마했다. 선거를 이틀 앞두고 원행스님을 제외한 나머지 후보가 사퇴했다. 일종의 선거 보이콧이었다.
   
   일면스님은 경주에서 태어났다. 60년 전인 1959년 합천 해인사에서 출가했다. 그해 9월 태풍 사라가 한반도를 할퀴었다. 3400여명이 죽거나 다쳤다. 특히 경상도 지역의 피해가 컸다. 지금까지도 기상청 관측 이후 최악의 태풍으로 기록되어 있다. “태풍 때문에 집이 엉망이 됐어요. 그 난리통에 한 스님이 걸망을 지고 탁발을 다니는 겁니다.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왜인지 가슴이 찡해요. 그 길로 스님을 따라 집을 나섰습니다. 전생에도 불제자였던 게지요.”
   
   출가 당시 13살. 다시는 절에서 받아주지 않을까봐 열세 살의 행자는 명절 때도 집에 가보지 않았다. 해인사에서 스님은 두 명의 스승을 만난다. 명허스님과 지월스님이다.
   
   은사였던 명허스님은 엄하디 엄한 수행승이었다. 대웅전 앞에서 뒷짐을 지고 걷기만 해도 ‘어디 부처님 앞에서 뒷짐을 지느냐’며 불호령을 내렸다. 절 살림살이에도 단호했다. 1원도 허투루 쓰는 걸 용납하지 않았다. “하루는 절에 필요한 물건들을 사러 시장에 갔습니다. 100원짜리 눈깔사탕을 사서 먹으면서 절에 돌아왔어요. 장 본 내역을 보고받던 명허스님이 사탕을 사 먹은 걸 듣고 불같이 화를 내십디다. ‘시은(施恩)으로 사탕 사 먹는 놈과는 중노릇 같이 못 한다.’ 두 시간 동안 참회하며 엎드려 있었더니 3000배를 하라 하시더군요.”
   
   명허스님은 일면스님이 화두정진하는 수행승이 되길 원했다. ‘참선으로 불교를 일으켜라’고 권했다. 일면스님은 조용히 답했다. “저는 행정의 도인이 되겠습니다.” “도 통할 생각은 안 하고 행정승이냐”며 은사는 역정을 냈다.
   
   이후 스님은 해인사와 조계사에서 재무를 맡았다. 수도승의 길을 가는 도반들을 보며 이렇게 되뇌었다. ‘너희는 주불을 해라. 난 후불탱화가 되련다.’ 100원 한 장 놓치지 않았던 은사의 태도는 그대로 일면스님에게도 이어졌다. “해인사에서 재무를 맡고 있는데 절에 돈에 관한 문제가 터졌어요. 주지스님과 함께 검찰청에 소환됐는데 장부를 가져가서 보였지요. 어떻게 문제 삼을 게 하나도 없냐며 조사하는 사람들도 놀라더군요. 이때 인정을 받은 것 같아요.”
   
   명허스님에게서 칼 같은 정확함을 물려받았다면, 지월스님에게선 온화한 부드러움을 배웠다. “지월스님은 어린 행자에게도 꼭 존대를 하시곤 했어요. 마주치는 모든 이에게 축원을 해주셨지요. 그러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삼 일 마음 닦는 것은 천 년의 보배요, 백 년 탐욕은 하루아침 티끌이다.’”
   
   일면스님이 밥 짓는 소임을 맡고 있던 시절의 일이다. “밥 하는 게 익숙지 않아 태우거나 너무 질게 짓곤 했어요. 쫓겨나지 않을까 애면글면하고 있으면 지월스님이 다가와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일면 보살, 오늘은 밥이 고슬고슬한 게 참 맛있었어요.’ ‘오늘은 밥이 촉촉해서 맛있었어요.’”
   
   지월스님은 마지막 모습도 온화했다. “지금 생각하면 간에 관련한 병이었던 것 같아요. 더 이상 치료를 거부하고 해인사로 돌아오셨지요. 말없이 경내를 둘러보시더군요. 그날 성철스님이 지월스님의 방으로 찾아오셨어요. ‘아파요?’ 지월스님은 말없이 미소를 지으셨어요. ‘몸 바꿔야 되겠네요?’ 고개를 끄덕이시더군요. ‘그럼 먼저 가소.’ 그 다음 날이었습니다. 지월스님이 입적하신 게.”
   
   
   간이식받고 두 번째 삶 시작
   
   행정승으로 뜻을 정한 스님은 해인사승가대학과 동국대 불교대학 승가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등록금을 벌기 위해 책 도매상에서 문학 전집을 사서 팔러 다니기도 했다. 1988년 제9대 조계종 중앙종회의원을 시작으로 13대까지 5선 의원으로 활동하며 차분히 원했던 길을 가는가 싶었다. 그런 스님에게 병마가 찾아왔다. 간경화였다. 일을 손에서 놓지 않은 탓일까, 병환은 점점 심해졌다. “병원에서 시한부 선고를 받았어요. 두 달 남았다는 말을 들었지요. 부처님 앞에서 일주일간 기도를 했습니다. ‘부처님 한번만 살려주세요. 살려주시면 부처님 시봉 잘하겠습니다. 만약에 살 수 없다면 스님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주세요.’” 울면서 애원하다 마지막엔 주변 사람들을 위해 축원을 올렸다.
   
   2000년 1월, 극적으로 한 청년과 인연이 닿았다. 스물두 살의 뇌사자였다. 그에게서 간을 이식받았다. 그리고 5년 후 스님은 생명나눔실천본부 이사장을 맡았다. 장기 기증과 조혈모세포 기증을 독려하는 공익법인이다. 저소득층 환자에게 치료비도 지원한다. 장기 기증 희망등록은 불의의 사고나 질병으로 뇌사 상태에 빠지면 아무 대가 없이 장기를 기증하겠다고 미리 의사표시를 해두는 것이다. 17살 이상이면 누구나 희망의사를 등록할 수 있다. 사실상 몸의 거의 모든 부분이 다른 사람에게 이식될 수 있다. 신장, 간장, 췌장, 심장, 폐, 골수, 안구, 췌도, 소장, 대장, 위장, 십이지장, 비장, 말초혈, 손과 팔이다. 지난 7월 법률이 일부 개정되어 발과 다리도 이식 가능한 신체 부위로 추가됐다.
   
   하루 평균 다섯 명의 환자가 장기 기증을 기다리다 숨을 거둔다. 일면스님은 도움을 기다리며 일주문에서 비를 긋고 있는 이들을 삶으로 이끄는 일을 하고 있는 셈이다. 스님은 “죽다가 살아난 내 경험을 바탕으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사람들을 삶으로 죽을 때까지 인도할 것”이라고 말했다. 생명나눔실천본부는 10월 5일 불암사 경내에서 산사음악회를, 11월 10일엔 나루아트센터에서 자선음악회를 연다. 난치병 환자와 장기 이식대기자들을 돕는 행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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