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무용가 다이앤 애먼스와 경북 예천군 지보면 상월리 주민들. ⓒ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영국의 무용가 다이앤 애먼스와 경북 예천군 지보면 상월리 주민들. ⓒ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지난 10월 2일 경북 예천에서 차량으로 1시간 거리인 안동 서구동 복지회관. 4층 대강당에 흥겨운 리듬이 퍼졌다. 77살 임낙순 할머니의 발이 먼저 움직였다. “이~야” 소리를 내며 사람들 한가운데로 나선 할머니는 키를 들고 벼를 탈곡하는 것처럼 허공에 두 손을 리듬감 있게 흔들었다. 최화열 할아버지도 한몫을 보탰다. 지난 9월 뇌출혈로 쓰러져 수술을 받았던 사실을 잊은 것처럼 오른손을 높이 들어 빙빙 돌며 도리깨질에 열심이었다. 모를 심는 사람, 곡괭이질을 하는 사람 등 음악에 맞춰 움직이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몸짓이 어울려 하나의 커다란 원을 만들었다. 흥이 올라 서로 웃으며 대화도 나눴다. 함께 몸을 움직이며 어울리던 영국의 무용가 다이앤 애먼스의 입에서 “굉장하다”는 감탄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어깨가 들썩거리던 리듬이 멈추고 부드러운 선율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다이앤 애먼스가 먼저 팔을 흔들흔들 몸을 정리하며 표정을 가라앉혔다. 들썩거리던 분위기가 차분해졌다. 모두의 얼굴에 진지함이 감돌았다. 여섯 차례에 걸친 애먼스의 ‘커뮤니티댄스(Community Dance)’ 수업이 마무리되고 있었다. 꺼지지 않는 LED 촛불을 들고 축제의 마지막을 장식하듯 아름다운 곡선을 만들어내던 모두의 입에서 감사의 인사가 흘러나왔다. 앞다퉈 다가가 다이앤 애먼스를 껴안고 고마움을 표현하는 어르신들은, 막춤 아닌 정식 ‘댄스’를 일생 한번도 접한 적 없는 경북 예천군 지보면 상월리에 사는 주민 20명이었다. 다섯 차례의 댄스 수업을 마치고 안동 서구동 복지회관에 모여 마무리 수업을 가지던 참이었다.

이들에게 ‘댄스’를 가르치러 한국에 온 다이앤 애먼스는 영국의 세계적인 ‘커뮤니티댄스’ 전문가다. 그가 쓴 ‘커뮤니티댄스 입문(An Introduction to Community Dance Practice)’이란 책은 전 세계에서 교재로 활용되고 있다. 다이앤 애먼스와 함께 한국을 찾은 세계적인 무용가도 있다. 야스민 바르디몽(Jasmin Vardimon)은 애먼스에 앞서 9일간 경북 안동에서 여성들을 대상으로 커뮤니티댄스를 가르쳤다. 이들의 방문은 주한 영국문화원과 경북도청의 한·영 문화예술 교류 프로그램의 하나로 진행됐다.

커뮤니티댄스는 1970년대 영국에서 처음 사회·문화 운동으로 시작된 커뮤니티 예술(Community Art)의 일환이다. 이름 그대로 전문 예술가들이 하는 기존의 예술과는 조금 다르게 공동체(community)의 참여를 기반으로 한다. 나이·성별·직업이나 장애 여부에 상관없이 누구나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몸짓을 만들어가며 춤을 추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누구나 무대로 나서 춤을 추는 축제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기본적으로 커뮤니티댄스에는 전문가가 참여한다. 전문가는 자신의 감정이나 몸을 어떻게 느끼는지, 그걸 어떻게 표현하는지 알려준다. 참여자들은 그의 지도에 따라 자신만의 몸짓을 만들어내고 나눈다.

이 활동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 5일간 경북 안동에 머무르며 상월리의 노인들과 몸짓을 나눠온 다이앤 애먼스의 말을 들어보자.

“제가 생각하는 커뮤니티댄스의 지향점은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즐거움(enjoyment)을 얻는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서로 다른 동기와 필요를 가지고 있겠지만 최대한 참여를 유도하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즐겁게 참여하면서 창조적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단순히 몸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참여하고 표현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왜 춤을 추며 자신을 표현해야 하는지, 애먼스와 같은 전문가들이 한국의 시골마을을 찾은 이유는 무엇인지, 상월리 주민들의 5일을 되짚어보면 잘 알 수 있다.

나를 표현하며 찾는 즐거움

맨 처음 ‘땐스’를 배워보겠느냐는 제안을 받았을 때 상월리 이장 최재창씨는 망설였다고 한다.

“이장이 되고 나서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이, 마을 어르신들이 즐거워할 일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4월에는 풍물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을 모셔 풍물놀이를 배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땐스’요? 술 마시고 잔치 열리면 흥겨워서 춤추는 어르신들이야 많지만 제대로 된 댄스 같은 것은 배워본 적이 없는데, 망설였지요.”

그러나 이 ‘땐스’가 우리가 보통 어렵게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마을 어르신들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고 억눌려 있던 감정을 표현하게 한다는 주한 영국문화원 관계자들의 설명을 듣고 마음을 바꿨다.

다이앤 애먼스가 상월리 주민들을 가르칠 전문가로 초빙됐다. 전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노인들에게 커뮤니티댄스를 가르쳐온 애먼스는 농사짓는 작은 시골마을 어르신들이 전문가를 어떻게 맞이하는지 알고 있었다.

“보통 첫 수업 때는 저를 ‘선생님’으로 받아들이곤 해요. 제가 가르쳐주는 것만 배우고, 제가 하는 몸짓을 따라하려고 합니다. 그때 저는 선생님의 역할을 다른 참여자에게 양보하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상월리의 어떤 할머니가 저와는 다른 종류의 몸짓을 하기 시작했어요. 한국 농촌에서 농사일을 하며 자주 하는 동작 같은 거죠. 그럼 저는 모두가 그분을 따라하게 만듭니다. 새로운 선생님으로요.”

두 번째 수업부터 곧바로 변화가 일어났다. 모두가 각자의 동작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일 많은 호응을 받았던 것은 벼를 탈곡하는 동작을 음악에 맞춰 무용으로 만든 것이었다. 아예 수업시간에 맞춰 기타를 들고 온 할아버지도 있었다. 직접 익힌 기타 솜씨로 갖가지 노래를 연주하자 수업시간은 금세 축제장으로 변했다.

“노인들이 느꼈으면 했던 것이 자신을 표현하면서 얻는 즐거움이에요. 틀린 것은 없다는 것이죠. 자신이 하던 일 그대로 자신을 표현할 수 있어요.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죠. 일상에 불과했던 농사일이 댄스가 될 수 있고 그를 통해 성취감을 느꼈으면 했어요. 새로운 경험을 하는 거죠.”

상월리와는 40㎞ 떨어진 안동 시내에서 ‘끌림 헤어샵’을 운영하고 있는 김호남씨는 커뮤니티댄스를 통해 자기 자신의 일을 새롭게 긍정하게 된 사람이다. 그는 야스민 바르디몽에게서 9일간 댄스를 배웠다. 그리고 지난 10월 2일 상월리 주민들의 마지막 수업에 앞서 5분간 자신이 직접 만들어낸 작품을 공연했다.

김호남씨는 평생 해온 자신의 미용 일을 무용에 접목했다. 가위질을 하는 듯한 손동작이 공연 내내 이어졌다. 때로는 흥겹기도 하지만 때로는 진지하고 슬프기도 한 자신의 모습을 엎드려 카메라를 직접 응시하며 표현했다. 9일 전에 처음 댄스를 접한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진지하고 본격적인 공연이었다.

“저는 아름다운 것을 좋아했어요. 처음 미용을 시작할 때는 그랬지요. 그런데 오래 일을 하다 보니 처음의 생각이 옅어졌어요. 대신 일상생활에 시달려 억눌려 있었죠. 야스민 선생님은 그런 저의 원래 모습을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와줬어요. 제가 하는 일이, 그걸 표현하는 내 몸이 아름답다고 생각한 건 거의 처음 있는 일인 것 같아요.”

김호남씨가 느낀 것이 바로 커뮤니티댄스가 지향하는 것이다. 다이앤 애먼스는 상월리 주민들이 새로운 경험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삶을 긍정하기를 원했다.

‘커뮤니티댄스’의 권위자 다이앤 애먼스. ⓒ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커뮤니티댄스’의 권위자 다이앤 애먼스. ⓒ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노인들에게 찾아온 것

사실 노인들에게 춤을 추는 것은 도전에 가까운 일이다. 노인들을 위한 커뮤니티댄스 입문서도 쓴 다이앤 애먼스는 노인들을 이끌 때 몇 가지 원칙을 가지고 있다.

“신체적 문제 때문에 노인들은 자주 휴식을 취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앉아서 쉬게 하면 안 되죠. ‘음악을 함께 들어봅시다’라고 자연스럽게 휴식시간을 가지면서 심장 박동수를 늦추는 것이 필요합니다. 기억력의 문제도 있지요. 이해하기 쉽고 기억하기 쉬운 동작들로 구성해야 합니다.”

그렇게 다이앤 애먼스와 함께 매일 저녁 2시간씩 보낸 상월리 주민들은 음악이 흘러나오기 무섭게 발을 구르고 손을 뻗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리본을 들고서는 음악에 맞춰 자신만의 몸짓을 만들어냈다. 손잡이가 달린 원형 고무밴드를 늘려 서로 동작을 맞출 때는 지칠 줄 모르고 내내 몸을 움직였다. 임낙순 할머니는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다”고 말했다.

“상월리로 시집온 지도 벌써 45년 됐습니다. 그동안 농사짓고 살면서 옛날 생각을 별로 못 해봤는데 몸을 움직이고 동작을 생각해내면서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어요.”

74살 최화열 할아버지에게는 애먼스의 댄스 수업이 재활치료와 같은 역할을 했다.

“지난 9월 뇌출혈로 쓰러졌을 때 빨리 발견한 덕에 큰 후유증 없이 일상생활로 복귀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몸을 쓰는 일이 불편하기는 해요. 댄스 수업은 마침 저에게 정말 많은 도움이 됐지요. 안 하던 동작을 하면서 굳은 근육이 풀리고 자연스럽게 생활하게 됐습니다.”

커뮤니티댄스는 가끔 노인들의 몸과 마음을 위한 치료 행위로 인식되기도 한다. 실제로 북유럽에서는 치매 노인들을 위한 치료 프로그램에 커뮤니티댄스를 포함시킨다. 다이앤 애먼스는 이에 대한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가끔 커뮤니티댄스 전문가들이 ‘치료사’는 아닌가 스스로 의문을 던질 때도 있어요. 커뮤니티댄스가 참여자들의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하는 것은 확실하거든요. 그러나 전문적으로 건강을 되찾는 것이 커뮤니티댄스의 목적은 아닙니다. 즐거움, 창조적인 표현 같은 것이 커뮤니티댄스가 추구하는 것입니다.”

때로 커뮤니티댄스는 말 그대로 커뮤니티, 그러니까 공동체를 회복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상월리는 수십 년 함께 살아온 주민들로 이뤄진 마을이지만 모두가 돈독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던 것은 아니다.

“처음 저희가 상월리에 방문했을 때는 남녀 어르신들이 서로 떨어져 무리를 지어 앉아 계셨어요. 그런데 한두 번 수업하고 나서는 달라졌죠. 서로 대화하고 어우러지기 시작했어요.”

다이앤 애먼스를 초청한 주한 영국문화원 관계자가 말한 것처럼 5일 간의 커뮤니티댄스 경험은 상월리 마을 전체의 분위기를 바꿔놓았다. 최재창 이장의 설명이다.

“요즘 어르신들은 나이가 들어도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배우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상월리 같은 오지에서는 배우는 경험을 하기 쉽지 않아요. 하물며 자기 자신을 돌이켜보고 표현하는 일은 더욱 어렵죠. 그런데 애먼스 선생님이 오면서 마을 전체에 활기가 넘치고 웃음이 가득해졌어요, 정말로요.”

다이앤 애먼스는 상월리 주민들에게서 ‘웃음’ ‘활기’ ‘진심’ 같은 단어를 발견했다고 했다.

“두 번째 수업부터 사람들이 저에게 먼저 다가와 얼른 빨리 수업하자고 보챘죠. 상월리 주민들은 어느 곳과 비교해봐도 훨씬 많이 웃고 더욱 활기찬 모습을 보여줬어요. 딱 한 번의 수업이 사람들을 바꿨어요.”

이 경험은 일회적인 것일까. 모두가 ‘아니’라고 대답했다. 상월리 주민들은 다음 ‘배움’을 기획하고 있다. 상월리 주민들에게 자신을 소개했던 김호남씨는 “앞으로도 기회가 있으면 표현하는 댄스를 계속할 예정”이라고 했다.

김효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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