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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회/르포
[2578호] 2019.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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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이영훈의 ‘독도’에 반박한다

홍성근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이 글은 이영훈 교수가 ‘반일 종족주의’에서 제기한 ‘우산도는 환상의 섬’이며, ‘석도는 관음도’라는 주장에 대한 반론이다. 이영훈 교수의 우산도와 석도에 관한 주장은 일본 측 주장과 흡사하다. 이러한 일본의 주장에 대해서는 이미 국내 학자들이 비판한 연구 성과가 많다. 이 글은 그러한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이 글은 필자 개인의 견해이며, 필자가 속한 기관이나 단체와는 상관이 없음을 밝힌다.
   
   
   장한상과 안용복 이후 지도에서 울릉도 서쪽 ‘우산도’가 동쪽으로
   
   먼저 이영훈 교수의 우산도 주장에 대한 반론이다. 그는 우산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우산도는 조선시대에 걸쳐 떠도는 섬이었습니다. 환상의 섬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연히 그 섬은 울릉도 동남 87킬로미터에 위치한 독도가 아니었습니다. 독도로 비정해도 좋을 만큼 근사한 방향과 위치에 우산도를 그린 지도는 단 한 장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 조선 왕조는 독도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반일 종족주의’ 159~160쪽)
   
   여기서 논점은 조선 정부가 독도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했는가 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다. 조선의 관리가 독도를 구체적으로 인지한 기록이 있다. 1694년 삼척영장 장한상은 조선 정부의 명령을 받고 울릉도 수토관(搜討官)으로 파견되었다. 그가 쓴 ‘울릉도 사적(事蹟)’에는 울릉도 중봉(성인봉)에 올라 독도를 목격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서쪽으로는 구불구불한 대관령의 모습이 보이고 동쪽으로 바다를 바라보니 동남쪽에 섬 하나가 희미하게 있는데 크기는 울릉도의 3분의 1이 안 되고 거리는 300여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울릉도 정상인 성인봉에서 동남쪽으로 보이는 섬은 독도밖에 없다. 울릉도 주변에는 죽도와 관음도, 북저바위 등이 있지만 이들은 울릉도에서 직경 약 2㎞ 내에 있고 성인봉에서는 그 아래의 산과 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장한상이 독도와 울릉도의 거리가 300여리라고 한 것은 실제 거리와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 그가 중봉에서 울릉도 남쪽 해안까지의 거리가 40여리라고 했고, 울릉도 해안에서 독도까지의 최단거리가 222.5리(87.4㎞)라는 것을 고려하면 상당한 근사치라고 할 수 있다.
   
   장한상이 본 독도의 방향과 위치가 그냥 일시적으로 파악되었다가 사라졌을까. 그렇지 않다. 그때 장한상 혼자만 독도를 인지했을까. 대답은 역시 ‘아니다’이다. 장한상과 함께 울릉도에 간 수토군의 규모는 동원된 선박이 6척이고, 인원이 군관·역관·포수·선졸 등 150명이나 되었다. 장한상이 울릉도의 이곳저곳을 수색할 때 데리고 다닌 인원이 60여명이었음을 감안하면 그가 성인봉에 올라 독도를 조망할 때 함께한 군사도 그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장한상 수토군이 울릉도를 다녀온 3년 후인 1697년 조선 정부는 울릉도를 정기적으로 수토하는 정책을 결정하였다. 울릉도 가까운 지역에 있는 월송만호와 삼척영장이 80명 내외의 병사를 이끌고 1699년부터 1894년까지 2년 또는 1년 간격으로 울릉도를 수토하였다. 1699년 이후 상당 기간 동안 장한상의 울릉도 수토에 참가한 병사들도 함께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목격한 독도의 존재에 대한 인식은 그 후 계속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1714년 강원도 어사 조석명도 “울릉도 동쪽에 섬이 있고 왜경(倭境)에 접해 있다”는 사람들의 말을 인용하여 보고했다.(‘숙종실록’)
   
   장한상이 울릉도를 수토할 무렵 안용복은 1693년과 1696년 두 차례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그 과정에서 독도를 실제로 봤다. 특히 1696년에는 그가 우산도로 가서 일본인들을 직접 내쫓은 기록이 있다. 또 일본 기록 ‘원록구병자년(元祿九丙子年) 조선주착안(朝鮮舟着岸) 일권지각서(一卷之覺書)’(1696)에는 안용복이 울릉도에서 독도까지 50리라고 그 거리를 구체적으로 진술했다. 조선 정부는 안용복의 진술을 통해 우산도의 방향과 위치를 더욱 명확하게 인식하고, 우산도가 일본에서는 송도(松島)라고 불린다는 정보까지 취득했음을 알 수 있다.
   
   안용복의 독도에 관한 진술은 ‘숙종실록’(1696)과 예조에서 담당하는 업무 전반을 기록한 ‘춘관지’(1745),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기술한 ‘변례집요’(1800년대 중엽) 등 조선 정부의 공식 문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지리적 정보들이 바탕이 되어 ‘동국문헌비고’(1770)와 ‘만기요람’(1808) 등 국정 운영에 참고하는 중요 문헌에 ‘우산도는 일본에서 말하는 송도’라고 밝혔다. 또 이 문서들은 ‘울릉도와 우산도는 모두 우산국의 땅’이라고 하여 우산도에 대한 영유 인식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장한상 수토군의 독도 인식과 안용복의 우산도 활동은 그때까지 전해오던 우산도의 방향과 위치를 크게 교정하는 역할을 하였다. 1531년 만들어진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팔도총도’에는 우산도가 울릉도에 버금가는 크기로 울릉도의 서쪽에 그려져 있다. 그런데 17세기 말 이후 지도에는 우산도를 울릉도 동쪽에 표시하고 그 크기도 울릉도의 3분의 1보다 작게 그렸다. 우산도의 변화된 모습은 18세기 중엽의 ‘동국대지도’, 18세기 말의 ‘아국총도’, 19세기 중엽의 ‘해좌전도’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만약 조선 정부가 우산도를 실재하는 섬으로 인식하지 않았다면 그러한 표기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강원도와 울릉도를 함께 나타낸 도별(道別) 지도의 경우 우산도가 울릉도의 남쪽과 북쪽에 그려지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지도상 지면의 공간 부족으로 울릉도의 동쪽에 그리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1882년 이규원의 울릉도 검찰의 경우처럼 우산도의 존재를 확인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조선 정부가 일시적으로 우산도에 대한 인식이 흐릿해졌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독도에 대한 영유 의사나 의지를 포기했다고는 할 수 없다. 국제법에서 영토의 포기는 국가의 명시적 의사표시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1899년 ‘대한전도’와 1908년 ‘증보문헌비고’ 등 관찬사료와 1899년 황성신문 등에는 여전히 울릉도의 부속도서로 우산도를 언급하고 있다.
   
   
▲ 왼쪽은 1531년 만들어진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들어 있는 ‘팔도총도’의 울릉도 부분. 우산도가 울릉도와 비슷한 크기로 울릉도 서쪽에 있다. 오른쪽은 18세기 중엽 만들어진 ‘동국대지도’로 우산도를 울릉도 동쪽에 울릉도보다 훨씬 작게 그렸다.

   석도(石島)는 울릉도 이주민들이 붙인 ‘독섬’ 뜻을 따라 표기한 것
   
   15세기 초 이래 왜구의 침탈을 피해 울릉도 주민을 본토로 옮기고 섬을 비워두는 정책을 펴던 조선왕조는 1882년 일본인들이 울릉도에 들어와 벌목과 고기잡이를 하는 것을 발견하고는 ‘울릉도 개척령’을 내리고 이주민을 모집했다. 이때 많은 사람이 울릉도에 들어가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독도의 존재에 대한 인식은 더욱 뚜렷해졌다. ‘우산도’라는 지명을 몰랐거나 친숙하지 않았던 이들은 울릉도에서 바라보고 또 경험한 독도에 대해 그들의 언어로 새로운 이름을 붙여 사용하였다. 그것이 오늘날 ‘독도’의 유래가 된 ‘독섬’이다.
   
   울릉도 출신인 필자는 이 글을 쓰면서 고향에 계신 노인께 독도의 옛 지명에 대해 여쭈어 보았다. 그분은 1960년대까지도 울릉도 주민들은 독도를 ‘독섬’이라고 불렀다고 했다. 1940년대에 독도를 ‘독섬(Doksum)’이라고 부른 것은 1948년 우국노인회가 맥아더 사령부에 보낸 청원서나 1947년과 1948년 한성일보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 연구에 의하면 일제강점기에도 울릉도의 조선인들은 ‘독섬’을 주로 사용했다고 한다.(유미림 ‘우리 사료 속의 독도와 울릉도’ 298쪽) 아마 독도가 외교 문제로 비화되어 언론에 빈번히 등장하면서 ‘독도’가 많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생각한다.
   
   19세기 말 이래 울릉도의 조선인들은 한자식 지명 대신 순우리말 지명을 주로 사용했다. 그래서 울릉도에 있던 조선인과 일본인은 같은 지역을 부르는 이름이 달랐다. 죽도(대섬)의 경우 한인들은 ‘대섬’이라고 하는데 일본인들은 ‘죽도’라고 했다. 1970~1980년대까지도 울릉도 사람들은 죽도를 주로 ‘대섬’이라고 불렀다. 울릉도를 찾는 관광객이 늘어나고 관광지로 외부에 알려지면서 ‘죽도’로 많이 부르게 되었다.
   
   ‘독섬’이란 이름은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 일찍이 광복 직후인 1947년 울릉도-독도 조사대의 일원으로 참가했던 방종현 서울대 교수는 조사 직후 쓴 글에서 ‘독도’ 또는 ‘독섬’이 ‘석도(돌섬)’라는 뜻에서 유래한 것이 아닐까 했다. 독도의 외형이 전부 돌로 된 것같이 보이는 지리적 특성을 고려했던 것이다. 또한 그는 전라도 등 지방 방언에 의하면 ‘돌’을 ‘독’이라고 하는데, 독섬이 석도(돌섬)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1882년 검찰사 이규원이 울릉도를 조사할 당시 울릉도에 있던 조선인 140명 중 115명이 전라도 지역에서 온 사람이었다. 지금도 전라도 고흥 등지에 가면 독도, 석도, 독섬으로 호칭되는 섬들이 있다.
   
   이처럼 독도를 부르는 이름은 ‘우산도’에서 ‘독섬’으로 바뀌었지만 그 존재와 영유 인식은 더욱 분명해졌다. 대한제국 정부는 1900년 10월 25일 칙령 제41호를 제정하여 근대 법령체계에 따라 울릉도의 행정체제를 정비하여 울도군을 설치하면서 “구역은 울릉전도(鬱陵全島)와 죽도(竹島), 석도(石島)를 관할할 것”이라고 했다. 일반적으로 여기서 울릉전도는 울릉도 본섬을 가리키고, 죽도는 오늘날의 죽도, 석도는 독도를 가리킨다고 이해한다. 독도를 ‘석도(石島)’라고 표기하여 울도군의 행정구역으로 명시한 것이다. 그리고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는 1900년 10월 27일 관보로 고시되어 독도가 울도군의 행정구역에 속해 있음을 대내외에 공포했다.
   
   그런데 이영훈 교수는 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이에 대한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칙령 제41호의 석도는 오늘날의 관음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한국 정부나 학자들은 석도가 독도라고 주장합니다.… 대한제국은 1900년까지 독도를 몰랐습니다.’ (‘반일 종족주의’ 165쪽)
   
   우선 이 교수는 ‘석도는 관음도’라는 주장에 대해 아무런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다. 현재 울릉도의 부속도서로는 독도 외에 죽도(竹島), 관음도(觀音島) 등이 있다. 석도는 독도가 아니라고 전제해놓고, 칙령 제41호에 죽도가 따로 있으니 관음도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관음도가 ‘석도’ ‘돌도’로 불린 적은 없었다. 1900년대 그리고 그 후에도 관음도는 관음도라는 지명 외에는 관음기(觀音崎), 깍개섬(깍새섬) 등으로 표기되거나 호칭되었을 뿐이다.
   
   그러면 왜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는 ‘독섬’을 ‘석도’로 표기했을까. 이는 당대의 저명한 국어학자였던 방종현 교수가 일찍이 ‘독도=독섬=석도=돌섬’으로 설명한 바 있다. 해석건대 독섬은 돌섬을 의미하고 석도와 독도는 같은 어원을 갖고 있다는 주장이다. 즉 ‘석도(石島)’는 ‘독섬(돌섬)’을 그 뜻을 따라 표기한 것이고, ‘독도(獨島)’는 그 음을 따라 표기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1966년 대한제국 칙령 제41호가 공개되기 이전에 나온 것이기에 더욱 설득력이 있다.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는 1900년 정부에서 파견한 울릉도 시찰위원 우용정의 보고서 등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여기서 석도는 울릉도 주민들이 독도를 부르는 ‘독섬’을 그 뜻을 따라 표기한 것이다. 한편 1906년 심흥택 울도군수의 보고서에 나오는 ‘독도’는 음을 따서 명명한 것이다. 방종현 교수의 설명과 정확히 일치한다.
   
   
▲ 1911년 미국에서 간행된 이승만의 ‘독립정신’ 초간본에 들어 있는 ‘죠션디도’의 울릉도 부분. ‘울릉도’라는 글자의 왼쪽에 있는 글자와 큰 섬 아래 표시된 작은 섬 두 개에 대한 해석이 엇갈린다. 오른쪽은 같은 지도의 제주도 부분.

   ‘죠션디도’의 두 섬은 죽도와 독도로 봐야
   
   글을 마무리하면서 이영훈 교수가 석도가 독도와 무관함을 증명할 지도라며 제시한 ‘죠션디도’에 대한 필자의 소감을 적고자 한다. 이영훈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11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교민들이 출간한 이승만의 ‘독립정신’이란 책에 실려 있는 ‘죠션디도’입니다.… 울릉도 바로 남쪽에 ‘돌도’가 붙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돌도’가 곧 석도입니다. 다만 울릉도 동북에 있어야 할 섬을 남에다 그린 것은 착오라고 하겠습니다. 어쨌든 칙령 제41호 중의 석도가 동남 87킬로미터 해상의 독도가 아님은 이 지도의 발견으로 더없이 명확해졌다고 생각합니다.’ (‘반일 종족주의’ 168쪽)
   
   이영훈 교수는 그 지도에서 울릉도 왼쪽에 표기된 글자를 ‘돌도’라고 읽었다. 그리고 그 ‘돌도’가 곧 ‘석도’라는 것이다. 그 돌도, 곧 석도는 울릉도 동남쪽 ‘87킬로미터’에 위치하지 않고 울릉도 본섬에 바로 붙어 있으니 독도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필자는 그 지도상의 표기를 ‘돌도’가 아니라 ‘울도’로 읽었다. 글자가 조금 뭉개져서 명확하지 않은 면이 있어 해상도가 좀 더 높은 지도를 보았지만 더 한층 ‘울도’로 읽혔다. 1904년 이승만이 ‘독립정신’을 저술할 당시 울릉도의 행정지명은 ‘울도군’이었다. ‘죠션디도’에 표기된 다른 지명을 보면 ‘군(郡)’이라는 글자를 제외하고 행정지명을 표기하고 있다. 제주도를 보면 섬의 명칭인 ‘졔쥬섬’과 행정지명인 ‘졔쥬’를 함께 쓰고 있다. 또한 1907년 ‘대한전도’를 보면 울릉도에 한자로 행정지명인 ‘鬱島(울도)’를 표기하고 있다.
   
   이영훈 교수는 이 지도의 ‘돌도’가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 나오는 ‘석도’이고 오늘날의 ‘관음도’라고 주장했다. ‘죠션디도’의 울릉도 왼쪽 표기를 ‘돌도’로 읽는다면 울릉도 남쪽의 두 개 섬 중 어느 것이 ‘돌도=석도=관음도’에 해당하는가. 오히려 필자는 이 두 섬이 칙령 제41호의 죽도와 석도로 대섬(죽도)과 독섬(독도)을 표기한 것으로 봐도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관음도는 울릉도 육지에서 100m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 있어 조선전도에 표시할 정도의 규모는 되지 않는다.
   
   이영훈 교수는 그 섬이 울릉도 동남쪽 ‘87킬로미터’ 해상에 그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독도가 아니라고 했다. 그는 방향에 대해서는 ‘울릉도 동북에 있어야 할 섬을 남쪽에다 그린 것’은 ‘착오’라며 수용하면서도 위치에 대해서는 ‘87킬로미터 해상의 독도가 아니다’라며 거부했다. 이것은 매우 자의적인 이중 잣대이다.
   
   다른 사람들도 “독도가 울릉도에서 87.4㎞ 떨어져 있는데 울릉도 바로 옆의 섬을 독도라고 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 않느냐”며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물론 지도상 지면의 공간 부족에도 원인이 있지만 그렇게 표기하는 것은 사람의 인식 체계와도 관련이 있다. 말하자면 그 섬에 대한 존재 인식과 영유 의사를 보다 분명하게 나타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위성항법장치(GPS)와 같은 측량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오늘날에도 그런 일은 일어나고 있다. 오늘 저녁에도 TV의 뉴스 끝에 하는 기상예보를 보면 독도는 죽도(대섬)가 있는 자리에 그려져 있다. 마치 조선시대 고지도의 우산도를 보는 것과 같다. 기상캐스터에게 “울릉도 옆 동쪽 또는 동북쪽에 있는 그 섬은 어떤 섬입니까”라고 물으면 ‘독도’라고 대답할 것이다. 아마도 그 섬을 ‘죽도(대섬)’라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울릉도 바로 옆에 그려진 ‘어제의 우산도’와 ‘오늘의 독도’는 독도에 대한 존재 인식과 영유 의사를 보다 분명하게 표현하고자 한 의식이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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