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이선민 학술기자는 이영훈 전 교수가 ‘반일 종족주의’에서 ‘태정관지령’(메이지 10년·1877)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사실을 지적하며 이 전 교수의 독도 관련 주장을 반박했다.(주간조선 2019년 8월 26일자) 이에 이 전 교수는 주간조선에 실린 반론을 통해 “그 문서는 한국 측이 국제사회에 제시할 독도 고유영토설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며 ‘태정관지령’의 가치를 평가절하했다. 하지만 ‘태정관지령’에 대한 이 전 교수의 주장은 국제법 판례 등을 전혀 알지 못하고 하는 주장이다. 국세청에서 근무하며 국제조세협약 등의 업무를 오래하다 퇴직 후부터 독도 문제를 공부해온 필자가 보기에 ‘태정관지령’은 독도영유권의 역사적 근거로 결정적이다. 조선 숙종 때(1690년대) 벌어진 안용복 사건의 외교교섭 결과에 근거한 ‘태정관지령’은 약 180년이 지난 메이지 10년(1877) ‘독도가 일본 땅이 아니라는 것’을 한 번 더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상대국 조선과의 교섭 결과에 근거하였기 때문에 바꿔 말하면 ‘독도가 조선 땅’이라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태정관지령’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오카다 다카시(岡田卓己)는 2012년 논문에서 ‘태정관지령’에 대해 ‘한·일 시민의 우호를 위해 역사가 준 훌륭한 선물’이라고 표현했다. 독도의 영유권 귀속을 명백히 해 분쟁의 소지를 없앨 수 있는 결정적인 문서로 본 것이다. 국제법 판례상으로도 해당 정부 고위 관계자의 자국에 불리한 진술이나 사실 인정은 특별한 증명력을 부여한다는 것이 판례에 정통한 국제법학자의 연구에 의해 밝혀졌다. 필자는 이영훈 전 교수의 독도 관련 인식, 그중에서도 사실관계 인식에 적지 않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이 전 교수가 ‘반일 종족주의’와 유튜브 동영상(2019월 3월 6일 게시)에서 밝힌 주장 중 사실관계 인식에 문제가 있는 부분을 반박하고자 한다.

# 이영훈 전 교수 “조선시대에는 독도에 관한 인식이 없었다. 독도 인식은 대한민국 성립 이후 지난 20년 사이에 급하게 반일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반일 종족주의’ 151쪽)

조선시대 숙종 때 ‘우산도’라는 이름으로 독도를 조선 땅으로 인식하였다는 것은 ‘숙종실록’을 통해 알 수 있다. 1696년(병자) 9월 25일자 ‘숙종실록’에는 안용복 일행의 증언을 인용하여 왜인이 말하는 ‘송도는 우산도로서 이 역시 우리 땅이다(松島卽子山島 此亦我國地)’라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는 조선시대에 독도를 ‘우산도’라 하여 조선 땅으로 인식한 중요한 근거 중 하나이다.

안용복은 1693년 울릉도에서 일본으로 납치되었다가 풀려난 3년 후인 1696년 여수 흥국사승 뇌헌 외 4명을 포함한 일행 11명과 함께 일본에 가서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했다. ‘숙종실록’에는 안용복 일행의 증언 내용이 자세히 실려 있다. ‘안용복 사건’에서는 안용복 혼자서 모든 것을 다 한 것처럼 알려져 있으나, 최근 학계에서는 일본에서 ‘금오승장’을 자칭하면서 울릉도와 독도 영유권이 조선에 있음을 주장한 것으로 추정되는 소장(訴狀) 작성을 주도한 뇌헌의 역할이 주목받고 있다.

‘숙종실록’ 이후 왕명으로 편찬된 ‘동국문헌비고’(1770), ‘만기요람’(1808) 등에는 “울릉도, 우산도는 모두 우산국 땅이다. 우산도는 왜가 말하는 송도다(輿地志云 鬱陵于山皆于山國地 于山則倭所謂松島也)”라고 보다 간단명료하게 ‘우산도’, 즉 독도가 우리 땅이라고 돼 있다.

독도에 대한 인식이 대한민국 성립 이후 지난 20년 사이에 ‘반일 종족주의’의 상징으로 급하게 만들어졌다는 주장 역시 사실과 전혀 다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인 1948년 6월, 미군의 독도 폭격으로 어민 14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 사건은 제헌국회에서도 논의되었다. 당시 조선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 서울신문 등 주요 일간 신문에 ‘우리 땅 독도에서 어부들이 폭격을 당했다’고 대서특필되었다. 당시 신문에 이런 내용이 크게 다뤄졌다는 것은 정부 수립 이전에도 독도를 우리 땅으로 분명하게 인식한 근거로 충분하다.

해방 후 기록상으로는 1947년 6월 20일자 대구시보에서부터 ‘독도’라는 지명이 등장하고 있다.(정병준·‘독도 1947’ 98쪽) 1947년 8월에는 과도정부와 조선 산악회의 울릉도, 독도 공식 조사 활동을 통해 많은 기록을 남겼다. 그런데 어떻게 정부 수립 이전에는 독도 인식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 이영훈 전 교수 “연구자들은 우산도를 가리켜 독도라고 했지만, 그것은 떠도는 환상의 섬이었다.”(‘반일 종족주의’ 159쪽)

“독도로 비정해도 좋을 만큼 근사한 방향과 위치에 우산도를 그린 지도는 단 한 장도 없다. 다시 말해 조선왕조는 독도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했다.”(‘반일 종족주의’ 160쪽)

우산도는 떠도는 환상의 섬이 아니라 ‘왜인이 말하는 송도가 우산도(松島卽子山島)’라고 위치를 분명히 하여 ‘숙종실록’에 울릉도와 함께 ‘이 역시 우리 땅(此亦我國地)’으로 기재돼 있다. 당시 일본에서는 독도를 마쓰시마(松島)라고 불렀다. 필자가 계속 언급하고 있는 ‘동국문헌비고’ ‘만기요람’에도 우산도는 ‘왜인이 말하는 송도(倭所謂松島也)’로서 울릉도와 함께 우산국 땅(鬱陵于山皆于山國地), 즉 조선 땅으로 기록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대한제국 칙령 1년 전인 1899년 당시 유력 일간지 황성신문(9월 23일자) 별보에 실린 ‘울릉도 사황’이라는 제목의 한 면 전체 기사에서도 ‘우산도는 죽도와 함께 울릉도에 부속된 섬’, 즉 독도로서 분명하게 기록되었다. 1907년 장지연이 쓴 ‘대한신지지’에도 우산도는 울릉도의 동남에 재(在)한다고 방향을 분명히 하여 기록되어 있다.

울릉도의 북단에서 2㎞ 떨어진 죽도(댓섬)를 독도로 혼동했다든가, 혹은 우산도와 울릉도의 위치를 혼동한 지도가 있다고 해서 공적문서상의 기록을 무시한 채 그 지도만 갖고 우산도가 떠돌아다니는 환상의 섬이라고 하는 것은 지나친 논리의 비약이다. 우산도가 공적문서에서 독도로서 뿌리를 견고하게 내리고 있는 이상, 곁가지에 불과한 지도가 조금 다른 데로 뻗어나더라도 그것을 가지고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지도는 국제사법재판소 판례에 의하면, 원칙적으로 공적문서에 부속된 것이 아니면 효력을 인정받기 어렵다. 이 전 교수는 공적문서는 배제하고 지도만 가지고 논리를 펴고 있는데, 이는 자료 인용의 자의적인 취사선택으로, 연구윤리와도 관련된 것이다. 독도가 일본 이름 마쓰시마(松島)로서 조선에서 우산도(于山島)로 불렸다는 것은 일본의 ‘인번지(因幡志)’(1795)에도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 이영훈 전 교수 “울릉도뿐 아니라 일본이 송도라고 부르는 섬, 다름 아니라 오늘날의 독도도 조선의 영토라고 주장합니다. 안용복은 그 근거로 그가 소지한 강원도 지도를 제시합니다.… 그런데 일본은 안용복을 상대하지 않고 조선으로 추방했습니다.”(‘반일 종족주의’ 161쪽)

1696년 안용복 일행의 일본에서의 행적과 주장은 조선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여러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중간 기착지인 오키섬(隠岐島) 관리가 상세히 기록한 안용복 일행의 주장이 2005년에 공개되었고(‘원록각서’), 백기주(伯耆州)에서 안용복을 불러 필담을 나눈 후 동선사(東禅寺)에서 숙소를 제공하고, 돗토리성(鳥取城)에서는 가마와 말을 보내 안용복 일행을 맞이했다는 등의 내용도 ‘인부연표’에 기록돼 있다. ‘원록각서’와 ‘인부연표’ 이외에도 ‘인번지’ ‘죽도고’ 등 일본의 여러 문헌에 안용복 관련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안용복을 상대하지 않고 추방한 것이 아니고, 안용복의 주장을 모두 듣고 주고받은 대화를 기록한 다음(정중한 대우), 안용복 일행이 정식 외교경로인 대마도를 경유하지 않은 것을 알고 추방한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일본이 안용복을 상대하지 않고 추방했다면, 안용복의 주장이 조선·일본 양측의 고문헌에 그렇게 많이 기록되었겠는가.

이 전 교수는 ‘반일 종족주의’에서 “일본 어민이 그 섬을 송도라 부르면서 자기네 영토로 간주하는 것을 보고, 안용복이 ‘아니야, 그건 우리의 우산도야’라고 주장했다”면서 조선왕조는 안용복의 그런 주장에 하등의 관심을 표하지 않았다고도 주장했다. 하지만 조선왕조는 안용복의 주장에 하등의 관심을 표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정사(正史)인 ‘숙종실록’(1696년 9월 25일자)에 우산도, 즉 독도에 관해서 아주 자세하게 기록했다. 또한 안용복의 인물 됨됨이에 대해서도 당대의 영의정 남구만(‘약천집’)부터 후대의 국왕 정조까지 호걸스러운 인물로 높이 평가했다.(‘홍재전서’)

# 이영훈 전 교수 “1904년 일본은 독도를 자국의 영토에 편입하였다. 2년 뒤 1906년 그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 울릉군수가 ‘본군 소속의 독도가 일본으로 편입되었다’고 보고하지만, 중앙정부는 그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반일 종족주의’ 169쪽)

이런 주장이야말로 사실과는 전혀 다른 주장에 불과하다. 당시 대한제국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이 아니라 사실상 거국적으로 항의했다. 게다가 일본이 불법편입을 결정한 연도도 1904년이 아니라 1905년이다. 이는 독도 전문가에게는 상식이다. 1905년 11월 외교권이 박탈당하고(을사늑약), 1906년 2월에는 일제 통감부가 설치되어 국정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대한제국의 지방정부와 중앙정부는 신속한 보고와 나름대로 최대한의 항의 조치를 취했다.

일본 시마네현(島根県) 시찰단으로부터 일본이 독도 불법편입을 결정한 사실을 1년 후에 전해들은 울도군수 심흥택은 ‘본군 소속 독도(獨島)가 일본 영지가 됐다고 한다’라고 즉각 보고(1906년 3월 29일)했다. 이에 참정대신 박제순은 ‘전혀 근거가 없다(全屬無根)’ ‘다시 조사해서 보고하라’고 지령을 내려보내(1906년 5월 20일) 독도가 조선 영토임을 분명하게 주장하고 항의 의사를 표명하였다.

또한 내부대신 이지용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다(必無其理)” “아연실색할 일이다(甚涉訝然)”라면서 독도 영유권 주장과 일본에 대한 항의 의사를 분명하게 표명한 후 언론에도 이를 보도하게 하였다. 내부대신 이지용의 지령은 1906년 5월

1일자 대한매일신보와 제국신문에 게재되어 일반 국민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5월 9일자 황성신문은 ‘울쉬 내부 보고’라는 제목으로 울도군수 심흥택의 보고 내용을 게재했다. 대한제국이 이러한 지령을 내려보내고 언론 기관으로 하여금 보도하게 한 것은, 외교적 항의 수단이 봉쇄된 상황하에서 당시 대한제국을 사실상 지배한 일제 통감부에 대한 항의인 동시에 일본에 대한 항의가 되는 것이다.

일반 국민도 항의에 가세하였다. 경술국치(1910년) 직후 자결·순국한 우국지사 황현은 그의 문집 ‘매천야록’과 ‘오하기문’에서 ‘왜인이 옛날부터 울릉도에 속하는 섬 독도를 그의 영지라고 억지로 칭하고 심사하여 갔다’면서 독도가 고유영토임을 주장하고, 일본의 독도 불법편입에 대한 부당함을 지적하였다. 외교권이 박탈된 상황에서도 중앙정부, 지방정부, 언론기관, 학자 등이 거국적으로 항의했다고 보는 것이 사실에 가깝다.

# 이영훈 전 교수 “한국 정부가 독도가 역사적으로 그의 고유한 영토임을 증명하기 위해 국제사회에 제시할 증거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실정이다.”(‘반일 종족주의’ 169 쪽)

이 주장 역시 근거 없는 주장이다. 국제사법재판소의 판례(니카라과 사건과 망끼에·에끄레오 사건)에 의하면 자국에 대한 정부 고위관리의 ‘불리한’ 성명·진술·사실 인정에는 특별한 증명력을 부여하고 있다.(박현진·2007년 논문) ‘태정관지령’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태정관지령’은 일본의 최고 국가기관인 태정관이 ‘독도가 본래부터 조선 땅’이라고 일본에 불리하게 사실인정을 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태정관지령’이 독도 영유권에 관한 결정적 증거로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일본 정부가 샌프란시스코조약 비준 과정에서 조약의 부속지도로 국회에 제출(1951년 10월)한 지도인 ‘일본영역참고도’ 역시 독도를 한국 영역으로 표기했다는 점에서 국제사법재판소 판례상 일본이 당시 독도의 한국 영유권을 인정한 결정적인 증거가 될 것이다.

# 이영훈 전 교수 “‘러스크서한’은 읽으면 등골이 서늘할 정도로 정확한 대답이었다. 독도, 다른 이름으로는 다케시마 혹은 리앙쿠르암으로 불리는 것과 관련하여, 우리 정보에 따르면, 통상 사람이 거주하지 않은 이 바윗덩어리는 한국의 일부로 취급된 적이 없으며, 1905년 이래 일본 시마네현 오키섬 관할하에 놓여 있었다. 한국은 이전에 결코 이 섬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다.”(‘반일 종족주의’ 170 쪽)

‘러스크서한’에 있는 내용은 ‘정확한’ 대답이 아니라, ‘거짓된 사실에 근거한 잘못된’ 대답이었다. ‘러스크서한’(1951년 8월 10일)은 샌프란시스코조약 당시 독도를 한국령으로 명시해달라는 한국의 요청을 미국이 국무부 러스크 차관보 명의로 거부한 비밀문서를 말한다. 그런데 이 전 교수의 책에서는 ‘러스크서한’의 번역부터 정확하게 되어 있지 않다. 특히 마지막 문장을 단정적으로 번역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원문은 ‘The island does not appear ever before to have been claimed by Korea’인데, 정확한 번역은 추정적으로 ‘한국은 이전에 이 섬에 대한 권리를 주장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가 될 것이다. 그만큼 일본에 유리하게 잘못 번역된 것이다.

러스크서한은 결정적으로 미 국무부의 두 가지 사실인식에 대한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 첫째는 미국이 가진 정보에 의하면 ‘독도는 한국의 일부로 취급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 오류는 ‘한국이 독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다’라고 하는 것이다. 1905년 외교권이 박탈되고 사실상 일제 통감부의 지배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도 1906년 중앙정부의 의정부 참정대신, 내부대신, 지방정부의 강원도관찰사와 울도군수, 대한매일신보·제국신문·황성신문 등의 언론, 학자 황현 등 거국적으로 일본의 독도 불법편입 결정에 대해 항의한 사실과는 맞지 않는다.

우리에게 불리한 내용을 설명할 때는 그에 대응하여 우리에게 유리한 내용도 같이 설명해야 그 형평이 맞다. 러스크서한을 무력화(無力化)시킨 것이 바로 덜레스 미 국무장관의 전문(1953년 12월 9일)인데, 이 전 교수는 덜레스 미 국무장관의 전문(電文)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재작년 자칭 ‘양심적인 독도학자의 시민강연’에서, 어느 시민단체 대표가 러스크서한만 장황하게 설명하고 왜 덜레스전문은 언급하지 않느냐는 항의성 질문을 해서 결국 소송으로까지 이어진 웃지 못할 사건이 있었다. 그만큼 덜레스전문은 중요한 것이다. 그 시민단체 대표 겸 노학자는 자칭 양심적인 독도학자에 의해 형사고소당한 줄도 모른 채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 노학자가 타계하기 직전에 쓴 유고논문은 그후 학술지 ‘독도연구’ 24호에 실렸는데, 논문 제목이 바로 ‘러스크서한을 번복시킨 덜레스 장관의 조치 검토’였다.

덜레스 미 국무장관의 전문에 의하면, 러스크서한은 일본에도 알리지 않았고, 또한 러스크서한에 명시된 미국의 입장은 여러 조약서명국(48개국) 중 한 나라의 의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하자면 러스크서한을 가지고 영유권을 주장하거나 판단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것을 국제법 전문가인 덜레스 미 국무장관이 전문으로 분명히 밝힌 것이다. 그런데도 이 전 교수는 러스크서한만 설명하고, 덜레스전문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이 전 교수는 그의 책과 동영상, 칼럼을 통해 소신과 진실, 양심, 세계인으로서의 공정 등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주장과 정반대되는 모습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전 교수가 책과 칼럼에서 인용한 일본 연구자 이케우치 사토시(池内敏)의 성향에 대해서도 문제제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케우치는 한때 양심적인 독도 연구자로 평가받았으나, 지금은 일본 우익 쪽으로 거의 기울었다. 이케우치는 공정한 학자인 양 민족주의를 배격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안용복사건은 현재의 독도 영유권 문제와는 무관하다” “대한제국칙령의 석도는 독도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등 일본 우익의 입장에 치우친 주장을 하여 비판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결론적으로 ‘반일 종족주의’ 주장의 학술적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이 전 교수는 그의 책과 동영상에서 독도 문제에 대한 주장을 하면서 결정적으로 중요하고 일본에 불리한 자료는 거의 전부 누락시키고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태정관지령’ ‘일본영역참고도’ ‘숙종실록’ ‘동국문헌비고’ ‘만기요람’과 황성신문의 울릉도사황, 덜레스전문 등이 누락됐다. 만약 의도적으로 그랬다면 연구윤리에도 위배되는 것이다.

둘째, 한쪽의 주장에 대해서만 일방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이는 이 전 교수가 주장하는 세계인으로서의 공정성을 지키지 않은 것이 된다. 그 비판 대상이 상대국이 아닌 자국인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일본의 억지주장에 대하여는 시종일관 침묵하면서 논란의 여지가 있거나 일본 측에 유리하거나 지엽적인 것을 가지고 엄격한 비판의 잣대를 갖다대며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즉 고지도에서의 우산도 위치, ‘삼국사기’ ‘세종실록지리지’ ‘대한제국칙령’ ‘러스크서한’ 등만을 중점적으로 거론, 비판하고 있다.

셋째,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주장이 많다는 것이다. 어떤 주장이 사실에 근거해야 한다는 것은 학자로서의 연구활동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지켜야 할 기본적인 도덕률이다.

지금과 같이 감정적인 반일을 해서도 안 되지만, 일본의 주장에 대해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은 더더욱 안 될 일이다. 독도는 ‘반일 종족주의’의 상징이 아니라 영토를 지키려는 정당방어의 상징이다. 또한 독도 문제는 민족주의 이전에 학문적인 진실을 밝히고 알리는 문제이기도 하다. 학문적인 진실을 밝히면 독도의 영유권 귀속은 자명해질 것이다.

키워드

#논쟁
정태상 인하대 고조선연구소 연구교수ㆍ‘태정관지령이 밝혀주는 독도의 진실’ 저자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