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의왕 현대로템 연구실에 ‘휴마’(오른쪽)를 비롯한 웨어러블 로봇 시제품이 진열돼 있다. ⓒ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경기도 의왕 현대로템 연구실에 ‘휴마’(오른쪽)를 비롯한 웨어러블 로봇 시제품이 진열돼 있다. ⓒ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웨어러블 로봇’을 대중에 알린 영화 ‘아이언맨’이 개봉한 것이 2008년이다. 초소형 원자로로 작동하는 웨어러블 로봇을 입고 악당들을 물리치는 젊은 군수사업가 토니 스타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분)의 활약은 전 세계 군(軍) 관계자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아이언맨’이 등장한 지 2년 후인 2010년, 경기도 의왕에 있는 현대로템 방산사업부도 웨어러블 로봇 개발에 착수했다. 현대로템은 IMF 외환위기 때 현대정공을 비롯 대우중공업과 한진중공업 철도차량 3사(社)가 통합 출범한 회사로, 우리 육군의 K-1, K-2 전차와 장갑차 등을 생산하는 국내 대표 방산사업체다. 현대로템이 개발에 착수한 웨어러블 로봇도 일종의 군수품. 국방부의 의뢰로 국방과학연구소(ADD)와 함께 병사 개개인이 가진 신체능력을 극대화해 전투력을 끌어올리는 프로젝트에 착수한 것이다. 그로부터 약 9년이 흐른 지금, 현대로템은 연내 웨어러블 로봇 양산을 눈앞에 두고 있다.

최근 경기도 의왕의 현대로템 본사와 연구소를 찾았다. 국내 철도물류의 중심인 의왕 ICD(내륙컨테이너기지)와 가까운 이곳은 현대차 중앙연구소를 비롯해 현대로템, 현대모비스, 현대위아 등의 각종 연구시설이 밀집해 있는 현대차그룹의 ‘두뇌’와 같은 곳이다. 지난 10월 18일 의왕에 있는 ‘웨어러블 로봇’ 개발 연구소를 찾았을 때는 출입절차부터 까다롭기 그지없었다. 고도의 보안을 요하는 현대로템 방산사업부 아래 속해 있는 터라 수일 전 국방부 등에 출입허가를 요청하고도, 보안서약서를 작성한 뒤 보안검색기를 통과하는 데만 30분 넘는 시간이 소요됐다.

보안검색대를 뚫고 들어가자 연구소 1층에 있는 허름한 작업실 한편에는 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웨어러블 로봇들이 줄지어 도열해 있었다. 현대로템 관계자는 “2010년부터 10년 가까이 만든 시제품”이라고 소개했다. 인체를 닮은 로봇에는 각종 유압식 호스와 전선, 배터리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보기만 해도 우주에서 온 괴물 로봇 같았다.

엉덩이에 의자를 단 것 같은 ‘첵스’

하지만 10년 가까운 연구개발 끝에 얻은 결론은 ‘아이언맨’처럼 괴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웨어러블 로봇이 능사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괴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하려면 신체에 착용하는 장비의 무게도 무거워질 수밖에 없다. 국방부의 요구에 따라 제작한 초창기 시제품은 신체에 착용하면 막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체 무게만 60~80㎏, 최대 100㎏에 달하는 것도 있었다. 오히려 무거운 장비를 착용한 병사들이 먼저 지쳐 쓰러질 수도 있었다. 유압식 호스와 전기모터, 배터리 등이 웨어러블 로봇 곳곳에 치렁치렁 달려 있어 움직임도 거추장스럽기 이를 데 없어 보였다. 이 같은 ‘무식한’ 웨어러블 로봇을 입고 장시간 근무를 설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방향을 튼 것은 신체에 완벽하게 달라붙어 착용감이 좋고 가벼워 휴대하기도 편한 웨어러블 로봇이었다. 웨어러블 로봇의 무게를 최소한도로 줄이기 위해 유압식 호스와 전기모터, 배터리 등의 각종 거추장스러운 부품들을 모조리 떼어냈다. 그 결과 인체의 움직임을 최대한 반영해 스프링 등의 가벼운 부품으로만 작동할 수 있는 로봇 같지 않은 웨어러블 로봇이 탄생했다.

올해 안에 양산을 앞두고 있는 웨어러블 로봇은 다리의 힘을 보강해 주는 ‘첵스(CEX)’와 팔과 허리의 힘을 더해주는 ‘벡스(VEX)’다. 사실 첵스와 벡스는 일반인들이 상상하는 ‘웨어러블 로봇’과는 전혀 다른 아주 간단한 기계장치 혹은 보조도구에 불과하다. 하지만 실제 작업 현장에서 쓰임새는 효과만점이라고 한다. 첵스와 벡스의 자체 무게는 각각 1.5㎏과 2.5㎏에 불과해 휴대하고 다니는 데도 전혀 문제가 없다.

첵스의 경우 허벅지와 종아리에 장착하는 것만으로도 장시간 서서 근무하거나, 앉았다 섰다 동작을 반복해야 하는 작업자들의 신체 부담을 확연히 덜어준다. 첵스를 다리에 부착하고 앉으면 마치 엉덩이에 의자를 달고 있는 것과 같은 효과를 볼 수 있다. 다리에 힘을 쭉 빼도 스스로의 힘으로 앉을 수 있다. 작업자의 몸무게가 두 다리와 첵스로 골고루 분산되기 때문이다.

현대차그룹에 속한 자동차공장, 중장비공장, 현대제철 제철소 등에는 이런 자세로 장시간 노동을 반복해야 하는 근로자들만 줄잡아 수만 명이다. 첵스는 120㎏의 무게를 견딜 수 있게 설계돼 몸무게 100㎏이 넘는 거구의 외국인 근로자들도 사용에 전혀 문제가 없다. 현대로템의 한 관계자는 “현대차 앨라배마 공장과 기아차 조지아 공장 등 미국 현지 공장 근로자들의 요구사항을 반영해 설계한 것”이라고 했다.

연내 상용화를 앞둔 ‘벡스’(위)와 ‘첵스’(아래). ⓒ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연내 상용화를 앞둔 ‘벡스’(위)와 ‘첵스’(아래). ⓒ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팔과 허리힘 키워주는 ‘벡스’

상반신에 장착하는 ‘벡스’는 등과 허리, 팔에 착용하는 것만으로도 작업자의 힘을 분산할 수 있다. 팔을 머리 위로 치켜들고 장시간 작업해야 하는 작업자들을 위해 만든 웨어러블 로봇이다. 전동 드라이버나 그라인더 같은 무거운 공구를 최대 6㎏까지 드는 데 문제가 없다. 벡스는 자동차 조립라인에서 무거운 전동공구를 들고 볼트나 너트를 반복적으로 풀고 조이는 근로자에게 유용할 것으로 기대된다.

첵스와 벡스의 연내 양산 소식이 전해지면서, 현대차그룹 계열사뿐만 아니라 다른 업체에서도 첵스와 벡스의 양산 시기를 알려달라는 문의가 쇄도하고 있다. 산업체에서 웨어러블 로봇의 양산 소식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것은 근로자 개개인의 능력을 극대화해 인건비를 절감하려는 의도도 있지만, 산업재해로 인한 유무형의 손실을 줄이려는 목적이 더 크다고 한다.

무리한 작업을 하다 근로자가 산업재해라도 당하면 회사에서 유무형으로 부담하는 손실은 막대하다. 근로자 개개인에게 ‘웨어러블 로봇’을 지급해 산업재해를 막고, 근골격계 질환을 미리미리 예방하면 회사로서도 손해볼 것이 없다는 판단이다. 현대로템의 한 관계자는 “현행 산업안전 관련 법규에는 15㎏ 이상의 물건을 들 때는 협업을 하라는 규정도 있다”고 소개했다.

연내 양산 및 개발 단계에 있는 웨어러블 로봇의 다양한 쓰임새는 산업현장뿐만 아니라 무궁무진하다. 당초 개발목적인 국방 용도는 물론 대형마트의 계산원이나 논밭에서 일하는 농부들을 위해서도 쓰일 수 있다. 노약자나 장애인들의 재활 치료나 등산이나 낚시꾼들을 위한 레저 용도로도 쓰임새가 다양할 것으로 기대된다.

개발 단계에 있는 ‘에이라드(ALAD)’ 혹은 ‘H프레임’ 같은 웨어러블 로봇도 기대된다. 이 제품에는 양팔에 연결하는 두 줄의 와이어가 달려 있는데 팔에 걸리는 무게를 골고루 분산하는 기능이다. 와이어 하단에는 ‘기역(ㄱ) 자’ 모양의 꺾쇠가 달려 있는데, 이 꺾쇠를 상자 하단에 걸면 무거운 상자를 들 때 손가락에 가해지는 힘 역시 골고루 분산할 수 있다. 제철소 용광로 속에서 무게 40~50㎏의 내화(耐火)벽돌을 교체하는 근로자, 무거운 상자를 반복적으로 취급하는 물류센터 근로자에게 요긴하게 쓰일 것으로 기대된다.

가령, 육군 전차병이 ‘에이라드’를 착용하고 근무하면 개개인의 전투력을 극대화할 수 있다. 우리 육군의 주력 탱크인 K-2 전차에 탑재되는 전차포탄 한 발의 무게는 대략 20㎏인데, K-2 전차에는 이런 포탄만 40여발이 들어간다. 기자가 현대로템 연구소에서 전차포탄의 샘플을 직접 들어보니 무게가 만만치 않았다. ‘에이라드’를 착용하면 포탄을 탱크로 실어 나르고 장착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부상을 최소화할 수 있다. 무거운 개인화기를 들 때도 마찬가지 효과를 낼 수 있다. 현대로템의 한 관계자는 “개개인의 신체능력에 따라 다르지만 약 20~50㎏ 정도는 충분히 들 수 있다”고 말했다.

농어촌 작업에서도 인기 끌 듯

첵스와 같은 웨어러블 로봇은 의외로 농어촌에서도 인기를 끌 것으로 보인다. 고령화가 심한 농촌에서는 밭매기 등 장시간 반복적인 자세로 작업을 하는 일이 많아, 소위 ‘골병’을 호소하는 농부들로 정형외과나 한의원은 늘 문전성시를 이룬다. 고령의 농부가 다리에 첵스를 착용하고 작업을 하면, 쭈그리고 앉아서 일하는 동작을 반복할 때 의자에 앉아서 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거둘 수 있다.

과수농가 작업자가 상반신에 벡스를 착용하면 팔과 어깨에 가해지는 부담을 경감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하루 종일 서서 나뭇가지를 자르고 과실을 따야 하는 과수원 작업은 팔과 허리, 어깨 등에 적지 않은 부담이 가해진다. 현대로템의 한 관계자는 “일본의 포도농가에서는 비슷한 형태의 기어를 착용하고 포도 수확 작업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장애인이나 노약자 역시 첵스를 착용하면 다리 근력을 강화해 계단을 오르내리거나 등산할 때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강태공들 역시 다리에 첵스를 부착하면 별도의 접이식 낚시 의자를 들고 다닐 필요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다리에 100㎏ 이상을 견딜 수 있는 휴대용 의자를 붙이고 다니는 것과 마찬가지 효과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첵스와 벡스를 시작으로 현대로템 측은 영화 ‘아이언맨’에 보다 가까운 웨어러블 로봇을 개발해나갈 계획이다. 다리에 착용할 수 있는 ‘휴마(HUMA)’와 같은 웨어러블 로봇은 작업자가 착용하고 러닝머신(트레드밀) 위에서 시속 12㎞의 속도로 뛸 수 있을 만큼 개발을 완료했다. 성인남성의 보행속도가 대략 시속 4㎞ 정도인데 약 3배에 달하는 속도다. 휴마의 경우 인체의 평균적 움직임을 기준으로 약 5시간 동안 지속할 수 있다고 한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은 지난 10월 22일, 서울 양재동 현대차그룹 본사에서 열린 사내 타운홀미팅에서 미래 비전과 관련해 “현대차는 자동차 50%, PAV(개인용 항공기) 30%, 로보틱스 20%인 회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연내 양산을 앞둔 웨어러블 로봇을 시작으로, 영화 ‘아이언맨’이 현실화될 날도 머지않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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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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