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2017년 11월 29일 이동발사대에서 화성-15형을 세우고 있다. ⓒphoto 노동신문
북한이 2017년 11월 29일 이동발사대에서 화성-15형을 세우고 있다. ⓒphoto 노동신문

“제네바합의는 북한의 시간 끌기용 기만극이었다. 제네바로 협상을 떠나는 강석주에게 김정일이 내린 지침은 ‘우리에게 필요한 건 시간이다. 시간을 벌어라’였다. 애초부터 김정일은 합의를 지킬 마음이 전혀 없었고 시간만 벌자는 전략이었다. 북한은 대외적으로 ‘우리의 목표는 조선반도 비핵화이지 핵 개발이 아니다’라고 선전해왔지만 내부적으로는 완전 반대였다. ‘무조건 핵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공사가 저서 ‘3층 서기실의 암호’에서 미국과 북한의 1994년 제네바 협상 당시의 상황을 밝힌 내용이다. 당시 미국과 북한은 ‘제네바합의(Geneva Agreed Framework)’를 도출했다. 이 합의에 따르면 미국은 북한에 대해 핵 개발 동결 대가로 1000㎿급 경수로 2기와 대체에너지로 연간 중유 50만t을 제공하고,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 완전 복귀와 모든 핵시설에 대한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 허용, 핵 활동의 전면 동결 및 기존 핵시설의 궁극적인 해체를 약속했다. 양측은 또 쌍방의 수도에 연락사무소 설치,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의 이행과 남북 대화의 재개에도 합의했다.

하지만 제네바합의는 2003년 북한이 비밀리에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을 통해 핵무기를 개발해왔다는 사실이 미국에 발각되면서 깨졌다. 제임스 켈리 동아태 차관보는 2002년 10월 조지 W 부시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방북해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과 회담 과정에서 HEU 개발 의혹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강 제1부상은 “미국이 대북 적대시 정책을 포기하고 북한 체제 안전을 보장해준다면 HEU를 통한 핵 개발 계획은 물론 미국의 안보상 우려 사항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IAEA가 2003년 1월 6일 북한에 HEU를 해명하라는 결의안을 통과시키자 북한은 NPT에서 탈퇴했다. 태 전 공사가 저서에서 지적한 것처럼 북한 정권은 처음부터 미국과의 제네바합의를 지킬 마음이 전혀 없었다.

연말 시한 제시하며 미국 압박

북한 정권이 연말까지 시한을 제시하면서 지난해 6월 12일 싱가포르 제1차 미·북 정상회담의 합의를 지키라고 미국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북한 정권은 싱가포르 합의에 따라 핵·미사일 실험 중단, 미군 유해 송환 등의 조치를 취했지만 미국 정부는 여전히 제재를 강화하고 있으며 한·미 연합훈련도 계속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북한 정권은 지난 10월 5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미국 정부와의 비핵화 실무협상에서 ‘성의 있는 조치’를 해야만 본격적인 비핵화 논의에 들어갈 수 있다고 통보했다. 북한 정권이 요구하는 성의 있는 조치는 한·미 연합훈련 중단과 미국의 전략자산 한반도 전개 금지, 제재 완화 약속 등이다. 북한 외무성은 지난 10월 6일 담화에서 “우리 인민의 생존권과 발전권을 저해하는 대조선 적대시 정책을 완전하고도 되돌릴 수 없게 철회하기 위한 실제적인 조치를 취하기 전에는 협상을 할 의욕이 없다”고 분명하게 강조하기도 했다. 북한 정권은 미국 정부가 요구사항을 수용하지 않을 경우 김정은이 신년사에서 언급한 것처럼 ‘새로운 길’을 갈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북한 정권이 이처럼 강경한 입장을 보이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북한 정권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내년 미국 대선에서 재선에 성공하려면 자신들의 도발을 막아야 하기 때문에 강경하게 대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는 듯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동안 자신의 대북 외교 업적으로 북한의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발사 중지를 거론해왔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 정권의 속셈은 연말까지 미국에 시한을 주면서 핵실험과 ICBM 시험발사 재개 등으로 트럼프 대통령을 몰아붙이면 핵을 동결하는 수준에서 제재 해제와 맞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북한 정권은 지난 10월 2일 동해에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인 북극성-3형을 시험발사해 트럼프 대통령의 속내를 떠보았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본토와 해외 주둔 미군을 직접 위협할 수 있는 북한의 SLBM 발사에 대해 침묵했다. 그러자 북한 정권은 더욱 강경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김정은이 백두산에 백마를 타고 올라가 “중대 결심을 할 수 있다”고 미국 정부에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는가 하면 금강산 관광지구를 방문해 한국이 설치한 시설들을 모두 철거하라고 일방적인 지시까지 내렸다.

북한이 2012년 12월 서해 위성발사장에서 은하-3호 로켓을 발사하고 있다. ⓒphoto 노동신문
북한이 2012년 12월 서해 위성발사장에서 은하-3호 로켓을 발사하고 있다. ⓒphoto 노동신문

전형적인 시간 벌기 수법

북한 정권의 이런 행태는 지난 30여년간 보여온 전형적인 수법이다. 제네바합의에서 보듯이 북한 정권은 핵 개발을 위해 시간 벌기를 해왔다. 북한 정권은 핵 개발을 계속하면서도 겉으로는 핵을 포기하는 듯한 제스처를 보임으로써 미국 등 국제사회의 제재조치를 완화시켰고, 핵 개발 사실이 들통나자 거꾸로 합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면서 적반하장으로 합의를 깨는 행위를 해왔다. 핵 개발이 어느 정도 완성된 지금 북한 정권과 김정은의 목표는 미국으로부터 핵 보유를 인정받는 것이다. 때문에 김정은은 이를 위해 트럼프 대통령과의 2차례 정상회담과 1차례 회동 등을 통해 비핵화 의지가 있는 척하면서 핵 동결 정도로만 양보하려는 전략을 구사해왔다. 김정은이 진정 비핵화를 하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미국 정부가 요구해온 핵무기와 관련 시설 신고·검증·폐기 등의 조치를 밟았어야 했다. 이를 통해 완전한 비핵화의 대가로 평화협정 체결과 수교 등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모습을 보여야만 했다. 하지만 김정은이 완전한 비핵화를 하겠다고 공언한 적은 없다.

심지어 김정은은 친서를 통해 트럼프 대통령을 속이려는 의도까지 보였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전기 작가인 더그 웨드는 11월 26일 발간 예정인 ‘트럼프의 백악관 안에서(Inside Trump’s White House)’라는 저서에 트럼프 대통령 맏사위인 재러드 쿠슈너 백악관 선임고문이 자신에게 김정은의 친서를 보여주면서 “김정은의 아버지 김정일이 그에게 절대 핵무기를 포기하지 말라고 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고 밝혔다. 김정은은 지난해 3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 등 공식 발언에서 “비핵화가 할아버지 김일성과 부친 김정일의 유훈”이라고 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를 통해선 김정일이 안보를 위해 핵을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유훈을 남겼다는 사실을 알린 셈이다. 쿠슈너 고문은 웨드 작가에게 “친서의 내용을 볼 때 김정은이 트럼프 대통령과 친해지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면서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에게) 새로운 아버지 같은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쉽지 않은 전환”이라고 밝혔다. 김정은으로선 이미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유훈 대신 트럼프 대통령을 믿고 핵무기를 포기하는 것이 힘든 일이라는 뜻이다. 워싱턴타임스가 입수해 공개(10월 22일)한 웨드 작가의 저서 요약본 내용을 보면 김정은이 마치 트럼프 대통령을 아버지처럼 생각한다는 제스처를 보였다는 것이다. 김정은이 김정일의 유훈까지 공개한 것은 비핵화 의지를 강조하려는 의도라고 볼 수 있지만, 트럼프 대통령을 새 아버지처럼 생각한다는 것은 일종의 기만전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백두혈통을 자처하는 김정은이 트럼프 대통령을 아버지와 같은 존재로 생각한다는 것은 북한 체제상 상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트럼프를 아버지처럼 생각?

북한 정권은 모친상을 당한 문재인 대통령에게 김정은이 조의문을 전달했다는 사실을 청와대가 공개한 지 3시간 만인 지난 10월 31일 최대 사거리 370여㎞인 초대형 방사포를 시험발사하면서 무력시위까지 벌였다. 북한 정권은 2009년 5월 노무현 대통령 서거 때도 김정일 명의의 조전을 보낸 지 4시간 만에 핵실험을 감행한 적이 있다. 북한 정권의 이런 도발은 김정은이 선언할 새로운 길을 앞두고 명분을 축적하려는 의도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이 바라는 대로 연말 제3차 미·북 정상회담을 가질 생각은 없는 듯하다. 트럼프 대통령으로선 김정은과의 회담에서 ‘노 딜(No Deal·결렬)’이나 ‘배드 딜(Bad Deal·나쁜 합의)’을 했다가는 오히려 대선에 도움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크리스토퍼 힐 전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는 “트럼프 대통령이 내년 대선 때까지 미·북 관계가 현상 유지되기를 바란다”고 내다봤다. 토머스 허버드 전 주한 미국대사도 “탄핵 국면을 맞은 트럼프 대통령이 과거와 같이 선뜻 김정은과의 만남을 성사시킬 수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렇다면 김정은이 제3차 미·북 정상회담이 성사되지 않을 경우 앞으로 선택할 새로운 길은 무엇이 될 것인가.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들 대부분은 김정은의 새로운 길은 싱가포르 합의를 파기하고 핵실험과 ICBM 시험발사를 재개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게리 새모어 전 백악관 대량살상무기정책 조정관은 “북한은 미국이 연말까지 대북 제재를 해제하고 트럼프 대통령이 평양에서 정상회담을 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으면 새해에는 핵실험과 ICBM 시험발사를 재개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마크 피츠패트릭 전 국무부 비확산 담당 부차관보는 “북한은 지난 1년 가까이 상당히 지속적으로 ‘시한’에 대해 위협해왔다며, 이를 북한이 제시한 실제 ‘시한’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면서 “북한은 내년에 2017년의 ICBM 시험발사와 핵실험과 같은 공격적이고 도발적인 행동에 나설 수 있다”고 전망했다. 로버트 아인혼 전 국무부 비확산 담당 차관보는 “김정은이 주장하는 새로운 길은 ICBM 시험발사와 추가 핵실험, 혹은 추가로 생산되거나 배치될 수 있는 미사일 시스템 발표일 수 있다”면서 “연말 시한이 지나면 북한이 바로 도발적인 행보를 취할지, 또는 내년 1월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직 명확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정 박(한국명 박정현) 브루킹스연구소 한국 석좌는 “과거 행태로 볼 때 북한이 싱가포르 합의를 일방적으로 파기할 가능성이 있다”고 강조했다. 로버트 갈루치 전 국무부 북핵 특사는 “북한이 거듭 연말 시한을 언급하는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면서 “트럼프 대통령이 현재 상태를 유지하고 싶지만, 김정은으로서는 그런 입장이 아닐 것”이라고 지적했다.

지난해 6월 1일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이 싱가포르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공동성명서에 서명하고 있다. ⓒphoto 백악관
지난해 6월 1일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이 싱가포르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공동성명서에 서명하고 있다. ⓒphoto 백악관

‘연말’ 시한 언급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김정은의 새로운 길은 과거에도 답습해온 ‘낡은 길’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조슈아 폴락 미들버리국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김정은이 핵실험과 ICBM 시험발사를 재개한다면 이는 2014년부터 2017년까지 북한 정권이 걸었던 낡은 길과 동일하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김정은이 앞으로 미국 정부와 트럼프 대통령을 압박할 수 있는 카드로는 핵실험과 ICBM 시험발사 재개 및 인공위성 발사밖에 없다. 피츠패트릭 전 부차관보는 “미국과의 전쟁을 원치 않다는 북한의 셈법에는 미국이 북한과의 전쟁을 더 꺼린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면서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트럼프 대통령이 강경 대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 북한이 모험에 나설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북한 정권이 꺼내들 수 있는 이런 카드들은 김정은의 오판이 될 수도 있다. 자칫하면 트럼프 대통령의 분노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싱가포르 정상회담 이후 입만 열면 내세워왔던 외교적 업적이 북한의 핵실험과 ICBM 시험발사 중단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재선을 위해 이런 업적을 자랑해왔지만 북한이 싱가포르 합의를 깨고 핵실험과 ICBM 시험발사를 재개한다면 국민들에게 단호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군사적으로 대응할 수도 있다.

김정은이 새로운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궁극적인 이유도 있다. 김정은의 야심은 북한을 ‘핵강국’으로 우뚝 서도록 하는 것이다. 김정일이 제네바합의로 미국을 속여 핵보유국이 되려 했듯이 김정은은 싱가포르합의에 이어 또 다른 합의로 트럼프 대통령을 기만해 핵강국이 되려는 것이다. 북한 정권이 핵강국이 되려면 핵실험과 ICBM 시험발사를 계속해야 확실하게 핵무력을 완성할 수 있다. 북한 정권이 이런 목표를 달성하려면 지난 2년간 은밀하게 개발에 박차를 가해온 핵폭탄과 ICBM 능력을 실험을 통해 입증해야만 한다. 김정은이 ‘백두산 백마쇼’를 벌인 것도 핵무력 완성의 최종 단계를 조만간 보여주려는 의도라고 볼 수 있다. 당시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10월 16일자에서 “동행한 일군들은 모두 (김정은의) 위대한 사색의 순간들을 목격하며 또다시 세상이 놀라고 우리 혁명이 한걸음 전진될 웅대한 작전이 펼쳐질 것이라고 확신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북한 정권이 핵실험을 재개할 경우 가장 못마땅하게 여길 사람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다. 중국 정부는 북한의 핵실험 재개로 동북 3성이 환경적으로 영향을 받을 것에 민감한 반응을 보일 것이 분명하다. 또 미국과의 무역전쟁 때문에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국 정부로선 국제사회의 강력한 비판이 제기될 수 있는 핵실험을 북한이 재개하지 않기를 바랄 것이다. 폴락 연구원은 “중국의 반발을 염두에 둔 북한이 핵실험 재개라는 강수를 둘 가능성은 낮다”면서 “북한이 ICBM과 인공위성을 발사할 것으로 보인다”고 내다봤다. 북한의 서해 동창리 위성 발사장은 언제든지 가동이 가능한 상태다. 물론 위성과 ICBM 발사는 사실상 똑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무튼 북한 정권이 새로운 길이라는 벼랑 끝 전술을 구사할 것에 대비해 트럼프 정부와 문재인 정부는 한·미 연합훈련 재개 등 ‘플랜 B’를 가동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 안보는 1%의 가능성에도 대비해 만전을 기해야 하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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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훈 국제문제애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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