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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회/르포
[2582호] 2019.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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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독도 반박에 대한 이영훈의 재반박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이승만학당 교장)·‘반일 종족주의’ 대표저자 겸 편집자 

이 글은 홍성근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이 지난 10월 14일자 주간조선에 실은 ‘이영훈의 독도를 반박한다’에 대한 필자의 반론이다. 홍 위원은 우산도에 대한 조선왕조의 영유 인식을 증명하는 자료로서 1694년 울릉도 수토관(搜討官) 장한상의 다음과 같은 보고를 들고 있다. “서쪽으로는 구불구불한 대관령의 모습이 보이고 동쪽으로 바다를 바라보니 동남쪽에 섬 하나가 희미하게 있는데 크기는 울릉도의 3분의 1이 안 되고 거리는 300여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장한상이 성인봉에 올라 사방을 관찰한 기록이다. 필자는 이 기록을 내용 그대로 신뢰하지 않는다. 짐작건대 그가 성인봉에 오른 것은 해가 중천에 있을 시간이다. 독도를 보기 위해 성인봉에 오른 사람은 누구나 경험하는 일이지만, 중천에 독도를 관측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무성한 나무와 주변 봉우리에 막힌 가운데 하늘과 닿아 있는 먼바다를 흐릿하게 볼 수 있을 뿐이다. 울릉도에서 독도의 관측은 대개 해발 200m 고도에서 조양과 석양의 맑은 햇살을 배경으로 해서만 가능하다. 그것도 해무가 완전히 걷혀 수평선이 선명히 드러난 특별한 기상조건에 한해서이다. 2008~2009년 동북아역사재단이 현지 관측한 547일 가운데 독도가 수평선에 손톱만 한 크기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56일에 불과하였다. 그런 행운을 중천에 성인봉에 오른 장한상이 누렸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울릉도에서 강원도 육지를 관측함도 마찬가지여서 간혹 맑은 석양에 어렴풋이 그 윤곽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는 서쪽의 육지 방향에 산형(山形)으로 낮게 드리운 구름을 보고 대관령이라 착각하였다. 마찬가지로 동남 해상에 형성된 해무를 보고 우산도를 연상하였다. 실제로 봤다면 손톱 크기의 독도를 울릉도의 근 3분의 1이라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홍 위원은 장한상과 동행한 사람이 많아서 그의 우산도 관측이 널리 알려져 갔을 것으로 추측하지만, 이후 전개된 역사는 그와 달랐다. 16년 뒤 1710년 울릉도를 수토한 박석창은 울릉도 지도를 그린 최초의 사람이다. 박석창은 울릉도 동쪽에 근접한 어느 섬을 가리켜 “바닷가에 길게 죽전(竹田)이 있는데, 소위 우산국이라 한다”라고 적었다. 그렇게 그는 오늘날의 죽도를 우산도로 비정하였다. 죽도라는 섬 이름은 사실상 박석창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이후 19세기 중엽까지 여러 울릉도 수토관이 그린 지도도 공통으로 죽도를 우산도로 지목하였다.<지도1 참조>
   
   
▲ <지도1> 팔도여지도의 울릉도와 우산도.(18세기 중엽)

   ‘우산도는 없는 섬’ 인식 확산
   
   이상이 한 가지 흐름이라면, 다른 한 가지 흐름은 우산도란 실제로는 없는 섬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어간 것이다. 이케우치 사토시(池內敏) 교수의 지도 분석에 의하면, 우산도의 위치는 1694년 이후 울릉도 서에서 동으로 나아가 북동으로 옮겨가는 추세를 보였다. 그런 가운데 아예 우산도를 그리지 않은 지도의 수도 증가하였다.
   
   예컨대 전국도(全國圖)나 강원도도(江原道圖)에서 우산도가 없는 지도는 17세기만 해도 20장 가운데 2장(10%)에 불과하였다. 그랬던 것이 18세기 지도 42장 가운데는 6장(14%), 19세기 지도 46장 가운데는 18장(39%)이나 되었다. 19세기의 유명한 지리학자 김정호가 그 좋은 예이다. 1834년 그가 그린 청구도(靑丘圖)에서 우산도는 울릉도에 붙은 죽도를 가리켰다. 그런데 그가 1861년에 완성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서 우산도는 그 모습을 감추었다.
   
   홍 위원이 1694년 이후 조선왕조의 우산도 영유 인식이 확고해졌다면서 들고 있는 사료는 1770년의 ‘동국문헌비고’와 1808년의 ‘만기요람’이다. 두 역사책은 “울릉도와 우산도는 모두 우산국의 땅”이라면서 “우산도는 일본에서 말하는 송도(松島)”라고 하였다. 이 말이 과연 홍 위원의 주장대로 해석될 수 있는지 의문이지만, 설령 그렇다 치더라도 이상과 같이 18~19세기 걸쳐 여러 갈래로 전개된 우산도 인식 중의 한 갈래에 불과함을 지적해두고 싶다.
   
   그리하여 1882년 다시 울릉도를 개척할 때 조선왕조의 울릉도와 우산도에 관한 인식은 큰 혼란을 면치 못하였다. 국왕 고종은 울릉도 검찰사 이규원을 파견하면서 “송도, 죽도, 우산도가 울릉도 근방에 있는데 그 거리가 얼마인지 살펴라”라고 명하였다. 그에 대해 이규원은 “우산도는 즉 울릉도이며, 우산은 옛 국도(國都)의 이름입니다”라고 하면서 우산도란 원래 없는 섬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자 고종은 ‘여지승람’이란 지리서를 언급하면서 “혹은 송도, 죽도, 우산도 세 섬을 통칭하여 울릉도라고 하니 그 형편을 검찰하라”고 지시하였다.
   
   이후 울릉도 검찰을 마치고 돌아온 이규원은 울릉도외도(鬱陵島外圖)란 지도를 그려 바쳤다. 이규원은 역대 수토관이 “소위 우산도”라 했던 그 섬을 아예 ‘죽도(竹島)’라고 이름하였다. 오늘날 죽도의 명칭이 이렇게 확립하였다. 그리고선 인근의 또 한 섬을 가리켜 ‘도항(島項)’이라 하였다. 실은 그전부터 이어져온 인식이지만, 이로써 울릉도 주변에 두 섬이 있다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그런데 1899년 대한제국 학부에서 제작한 대한전도(大韓全圖)는 울릉도 북동에 붙은 죽도를 가리켜 우산이라 하였다. 이규원에 의해 죽은 우산이 다시 살아난 것이다.
   
   이처럼 조선왕조의 울릉도와 부속도서에 대한 인식은 1899년까지도 큰 혼란을 면치 못하였다. 그때까지의 긴 세월에 울릉도 동남 87㎞ 해상의 바위섬, 곧 오늘날의 독도를 우산도로 특정한 지도는 단 1장도 그려지지 않았다. 홍 위원은 여러 지도에서 울릉도 동쪽에 붙은 우산도가 바로 그것이라고 강변하지만, 울릉도 수토관이 남긴 여러 지도에서 그것은 오늘날의 죽도임이 명확하다. 홍 위원의 주장은 이 같은 지도의 역사를 무시하고 있다.
   
   
   ‘석도→돌섬→독섬’은 근거 없어
   
   이어서는 석도(石島)를 둘러싼 논쟁이다. 1900년 대한제국은 울릉도를 울도군으로 승격하면서 죽도와 석도를 부속도서로 지정하였다. 필자는 석도를 오늘날의 관음도(觀音島)로 비정하고 있다. 홍 위원은 필자의 석도=관음도설을 비판하면서 오래전부터 잘 알려져온 학계의 주장을 반복하고 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일정기에 울릉도의 조선인은 독도를 가리켜 ‘독섬’이라는 향명(鄕名), 곧 소리명칭으로 불렀다. 1880년대 이래 울릉도에 들어온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전라도 사람이 다수를 이루었다. 전라도의 방언에서 ‘돌’은 ‘독’으로 발음된다. 따라서 ‘독섬’을 뜻으로 표현하면 ‘석도(石島)’가 되고, 음으로 표시하면 ‘독도(獨島)’가 된다. 이에 1900년 울릉도의 부속도서로 지정된 석도는 오늘날의 독도라는 논리이다.
   
   필자는 우리 정부와 학계가 독도 고유영토설의 가장 유력한 근거로 내세우는 이 같은 논리를 납득하지 못한다. 이미 ‘반일 종족주의’에서 그 일단의 이유를 피력했지만, 여기서는 상이한 실증 자료를 제시한다.
   
   이 글을 쓰기 위해 필자는 1916년 조선총독부 육지측량부가 제작한 5만분의 1 전국 지도에서 나타난 모든 섬의 이름을 조사하였다. 당시 육지측량부는 전국의 모든 종류의 지명을 한자로 표기된 문자명칭과 더불어 일본 가나로 표기된 소리명칭의 두 가지로 적었다. 물론 소리명칭은 측량에 동원된 현지 조선인으로부터 청취한 것이다. 1916년의 전국 지도만큼 전통적 소리명칭의 실태를 잘 드러내는 자료는 없을 터이다.
   
   조사 결과는 다음과 같다. 1910년대 전국 해상에 분포한 ‘石島(석도)’는 모두 8개이다. 전라도에 3개, 충청도에 1개, 경기도에 2개, 황해도에 1개, 평안도에 1개이다. 전라도 3개 석도의 소리명칭은 ‘돌섬’이 2개, ‘석섬’이 1개이다. 다른 도 5개 석도의 소리명칭은 ‘돌섬’이 3개, ‘석도’가 2개이다. 이처럼 전국에 분포한 8개 석도의 소리명칭은 ‘돌섬’ ‘석섬’ ‘석도’의 세 가지인데, 그중 ‘돌섬’이 가장 일반적이었다. 전라도 추자군도에는 아예 국자(國字)로 표기된 ‘乭島(돌도)’란 섬이 있는데, 소리명칭이 ‘돌섬’이었다. 다시 말해 홍 위원의 주장대로 석도의 소리명칭을 ‘독섬’으로 부른 곳은 전라도에서는 물론 전국 어디에도 없었다.
   
   전국 해상에 분포한 ‘獨島(독도)’는 모두 2개이다. 전라도 고흥군 금산면에 1개, 전라도 해남군 산이면에 1개이다. 전자의 소리명칭은 ‘독도’이고 후자의 소리명칭은 ‘독섬’이다. 매우 흥미롭게도 해남군 산이면 독도의 북동 4㎞ 해상에 영암군 곤이종면에 속한 석도가 있다.<지도2 참조>
   
▲ <지도2> 전라도 해남군의 독도와 영암군의 석도.(1916년)

   이 사실은 독도와 석도는 상이한 뜻의 두 문자명칭임을 확실히 해주고 있다. 뜻이 다른 만큼 소리명칭도 달랐다. 전자는 ‘독섬’이고 후자는 ‘돌섬’이다. 다시 말해 문자명칭에서나 소리명칭에서 독도는 엄연히 ‘홀로 있는 섬’이며, 석도는 어디까지나 ‘돌로 된 섬’이었다. 필자는 지금까지 수많은 독도 연구자들이 이 같은 상식을 무시하고, 전라도 방언이나 국어학자의 막연한 해석에 빙자하여 ‘독섬’은 ‘돌섬’이니 그 문자명칭은 ‘석도’요, 그 소리명칭은 ‘독도’라는 식의 논리를 개발, 교육해온 것에 탄식을 금치 못한다.
   
   독도라는 섬 이름이 최초로 확인되는 것은 1904년 9월 25일 일본 해군함 니다카(新高)의 ‘행동일지’에서다. 동 일지는 “리안코르드 바위를 실제로 본 일본인으로부터 정취한 정보”라 하면서 “한국인은 이를 獨島라고 쓴다”고 하였다. 뒤이어서는 잘 알려진 대로 1905년 2월 일본이 독도를 자국령으로 편입한 뒤 이를 인지한 울도군수 심흥택이 1906년 4월 강원도 관찰사에 올린 보고문 가운데 나오는 “본군 소속의 독도”라는 구절이다. 요컨대 홍 위원이 필자를 비판하기 위해 제시한 사실, 곧 울릉도 주민이 독도를 ‘독섬’이란 소리명칭으로 불렀다는 사실은 1904년경 독도라는 문자명칭이 성립한 뒤의 그것을 가리킨 것이지, 대한제국이 울릉도의 부속도서로 지정한 석도를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
   
   1880~1890년대 울릉도 주민이 독도를 무엇이라 불렀는지는 알 수 없으며, 그에 관한 일본 측 사료에 의하면 그들 역시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독도를 ‘리얀코’ 또는 ‘얀코’라고 불렀을 뿐이다.
   
   
   석도는 왜 이름이 사라졌나
   
   그렇다면 1900년 대한제국이 울릉도의 부속도서로 지정한 석도는 이후 왜 그 이름이 사라졌는가. 역대 울릉도 수토관과 검찰사는 울릉도에 부속한 섬으로 두 개의 섬을 지목해왔다. 19세기 중엽의 어느 지도는 두 섬을 가리켜 대우도(大于島)와 소우도(小于島)라 하였다. 우산도를 연상한 이름이었다. 1882년 검찰사 이규원은 이들을 ‘죽도’와 ‘도항’으로 명기하였다.
   
   필자는 이러한 지도의 전통에 따라 1900년 대한제국이 지목한 석도는 소우도와 도항의 계통을 잇는 오늘날의 관음도라고 비정한다. 달리 지목할 다른 섬이 없기 때문이다. 이규원이 붙인 도항(島項)은 소리명칭이 ‘섬목’으로서 실은 울릉도로 넘어가는 나루의 이름이었다. 1916년의 5만분의 1 지도에서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해 1900년까지 그 섬에는 사람이 살지 않은 가운데 마땅한 이름이 없었던 셈이다. 석도는 1900년 중앙에서 내려온 대한제국의 관리가 임의로 작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현지에서 자연 발생한 것도 아니고, 또 널리 유포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1910년대 총독부의 지방행정제도 개편과 육지측량을 맞아 관음도라 개명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필자는 지난 9월 24일자 주간조선의 글에서 1905년 일본이 독도를 자신들의 영토로 편입할 때까지도 대한제국의 독도 인식은 불투명했다고 지적하였다. 필자의 지적에 불괘감을 느낄 분이 많겠지만, 역사의 법정에서 관련 증거를 해석, 채택, 기각함에 감정이 깃들어서는 곤란하다. 이성에 기초한 냉혹한 추리와 토론만이 허용될 뿐이다.
   
   그렇다고 필자가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1952년 이승만 대통령의 독도 편입을 두고 역사적 문헌에서 그 근거를 찾는 것은 일종의 난센스이다. 이 대통령의 결단에 관한 필자의 입장은 이미 이승만TV나 주간조선에서 충분히 피력하였다. 독자 여러분의 불필요한 오해가 없기를 부탁드린다.
   
   1903년 이래 일본의 어민은 독도에다 일장기를 꽂았다. 자국령으로 편입한 1905년 2월 이후는 일본 시마네(島根)현이 일장기를 꽂았을 터이다. 그럼에도 1906년 4월 통보받을 때까지 울도군수는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독도에 대한 정기적 순시를 포함한 영유체제가 성립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통보를 받은 뒤에도 울도군수는 독도를 찾지 않았다. 그저 들은 대로 상부에 보고하였을 뿐이다.
   
   1906년 5월 일본의 독도 편입을 보고받은 의정부 참정대신 박제순의 대응에서도 그가 그때까지도 독도의 존재와 그 실태를 알지 못했음을 읽을 수 있다. 이후 대한제국의 항의를 받은 통감부가 대한제국 내부에게 울도군의 연원에 대해 질문하였다. 그에 관한 내부의 답변이 1906년 7월 13일자 황성신문에 실렸다.
   
   요약하면 1900년 울도군으로 승격한 이 섬이 관할하는 섬은 죽도와 석도이며, 동서가 60리(24㎞), 남북이 40리(16㎞)라는 것이다. 1900년의 칙령 41호 그대로이다. 독도의 소속을 두고 분쟁이 벌어져 있는데 “석도란 곧 독도입니다” 식의 한마디 해명이나 주장이 없다. 제시된 울릉도의 범역은 동남 해상 87㎞에 소재한 독도와 무관하다. 이미 지적한 대로 울릉도에 대한 조선왕조의 관심은 농업국가의 그것을 넘지 못하였다. 필자는 여러 연구자가 이 신문 기사에서 대한제국의 독도 수호 의지를 읽어내는 것에도 심한 무리를 느낀다.
   
   끝으로 홍 위원이 필자가 발굴한 1911년경의 울릉도 지도에서 필자가 ‘돌도’로 읽은 것을 ‘울도’로 고쳐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에 대해 언급한다. 이 지도를 안 지난 수년간 필자는 관련 두 글자를 의심의 여지 없이 ‘돌도’로 읽어왔으나 이번에 홍 위원의 지적을 받고 다시 살피니 그의 주장에 일리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여전히 ‘돌도’일 가능성이 없지 않으나 ‘울도’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그 점을 지적해주신 데 대해 홍 위원에게 감사드린다. 이미 인쇄된 책을 어찌할 수는 없으나 추후 수정할 기회가 있을 터이다. 그렇지만 그 지도 하나로 필자의 독도 이해에 손상이 가는 것은 아니다. 그 점에 대해선 전후한 필자의 글을 세밀히 읽은 독자라면 누구나 쉽게 동감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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