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12월 3일 임창열 당시 경제부총리(가운데)가 IMF 구제금융 양해각서에 서명하고 있다.
1997년 12월 3일 임창열 당시 경제부총리(가운데)가 IMF 구제금융 양해각서에 서명하고 있다.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역사 바로 세우기’ 재판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던 1997년 1월 나는 홍콩 특파원으로 발령받았다. 그런데 홍콩으로 떠나기 4일 전인 1월 11일, 조선일보 경제면 머리기사로 ‘한보 부도 위기설’이 보도됐다.

‘한보가 작년(1996) 가을에 4000억원의 긴급 구제금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SOS를 쳐 제일은행과 산업은행이 1월 초 1300억원을 추가로 지원했는데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격이 됐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결국 터졌구나…. 기사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1993년 6000억원이던 한보철강 부채가 1996년 말에는 무려 4조원을 넘어서, 부채비율이 자기자본(2000억원)의 20배를 초과했다. 3년 새 부채가 3조여원이나 더 늘어난 것이다. 이런 엉터리 대출과 재무 상태는 사상 유례가 없었다. 도대체 그 많은 돈은 어디로 흘러 들어갔을까.

그로부터 12일 후인 1월 23일, 한보철강은 5조원의 부채를 지고 도산했다. 세계 경제력 11위까지 올라간 ‘주식회사 한국’의 벌거벗은 실상이 만천하에 드러난 첫 사건이자 ‘IMF 위기’로 향하는 시발점이 됐다.

당시 홍콩은 흥청망청했다. 주권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넘어가기 5개월여 전인데 홍콩 경제는 엄청난 거품에 휩싸여 있었다. 중산층이 사는 66㎡(20평) 아파트값이 100만달러가 넘었다. 당시 한국은 그 5분의 1 수준이었다.

홍콩에 진출한 한국 금융기관들도 흥청망청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소위 YS의 ‘세계화 정책’에 따라 국제금융에 대한 고삐가 풀리면서 무려 83개 금융사들이 난립하고 있었다. 이들은 선진국 수준의 체재비와 판공비를 쓰고 있었지만 영업활동은 후진적이었다. 동남아·남미·러시아 등의 고수익·고위험 정크 본드(junk bond)를 거래하고 있었다.

홍콩에 부임한 나는 외국 언론들이 연일 한보사건을 집중 보도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한보사건을 계기로 한국 경제는 외국 언론에 거의 ‘엉망 수준’으로 보도되고 있었다. 뇌물이 횡행하고, 노조는 거칠기 짝이 없으며, 권력자와 결탁만 하면 안 되는 일이 없는 나라가 한국이었다. 아시아 지역 최고경영자 3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한국은 1997년에 투자하지 말아야 할 최악의 나라이자 사회적 불안이 가장 우려되는 곳으로 나타났다.

3월 들어 김영삼 대통령의 아들 현철씨에 대한 비리 수사가 집중 보도됐다. 5월 이후, 아시아 각국의 독재 정치와 금융 부실이 본격적으로 도마에 올랐다. 한국에 빌려준 돈의 회수가 본격화하면서 한국 금융기관과 기업은 돈이 마르고 도산이 시작됐다. 홍콩의 주권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넘어간 다음 날인 1997년 7월 2일, 태국 바트화(貨) 가치가 폭락하면서 동남아 전역으로 금융위기가 번져나갔고 8월 하순에는 홍콩마저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이런 세계적 위기에도 한국의 대응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YS는 아들 현철씨 구속 이후 사실상 ‘식물 대통령’이 돼버렸고, 정치권은 오로지 대선에 올인하고 있었다. 홍콩에서 아무리 외환위기 기사를 송고해도 여론은 이회창 대선후보의 아들 병역 문제에만 집중했다. 정부는 더욱 한심했다. 9월 홍콩에서 열린 국제통화기금(IMF) 총회에 온 강경식 경제부총리는 “한국 경제의 기초체력은 강하다. 분담금을 더 내겠다”며 오히려 IMF 회비 증액 로비에 열중했다. 불과 2개월 뒤 국가부도 위기를 맞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말이다. 당시 총회에 참석한 미국의 ‘큰손’ 조지 소로스는 일본 관리들에게 “금융위기 다음 타깃은 한국”이라고 귀띔했다.

10월 말, 한국 주가는 결국 500선이 붕괴됐다. 11월 들어 세계 유수 언론들은 약속이나 한 듯 “한국이 위험하다”고 연일 보도했지만 재경부와 한국은행은 “오보”라며 외신에 항의하는 소동을 빚었다.(요즘 우리 정부의 언론대응과 비슷하다.)

상황이 더욱 급박해진 11월 12일, 당시 베트남 하노이에 있던 나는 미국 CNN, 영국 BBC, 싱가포르의 ABN TV 방송을 보면서 거의 절망적 느낌을 가졌다. 보도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한국이 국가 부도상황에 돌입하는 것은 시간 문제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중앙은행인 한국은행 노조가 한은법 개정에 반발, 거리로 나와 시위를 시작했다. 일국의 중앙은행 관계자들까지 저 모양이니 정말 한국에 긍정적인 면은 하나도 없는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오히려 YS 임기 중에는 IMF 구제금융을 받지 않겠다며 외환보유고를 바닥 상태까지 끌고 갔다. 마침내 우리 외환시장과 증시가 붕괴 상황에 이른 11월 21일 저녁, 정부는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겠다고 발표했다. 돌이켜보면 이때가 1950년 6·25전쟁 이후 최고의 위기 상황이었다. 그동안 피땀 흘려 이룩해 놓은 ‘한강의 기적’이 일순간 거덜날 뻔했기 때문이다.

훗날 YS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변명했다.

“우리나라 어떤 학자나 연구기관, 언론에서도 나에게 IMF로 가야 할 정도의 위기 상황임을 사전에 말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김영삼 대통령 회고록’ 하 351쪽)

그러나 이는 명백한 책임회피였다. 연일 국내외 언론에 보도됐으며,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국가적 위기 사태를 맞아 통치자는 무지했고, 그런 징후를 제대로 보고한 부하도 없었다. 나라는 표류하고 있었다.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낸 김인호씨는 최근 펴낸 외환위기 회고록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기업은 차입경영으로 치달았고, 금융제도는 낙후했으며, 정부 역시 고도성장에 취해 있었다.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것이 ‘나쁜 정치’다. 대통령은 아들 구속 이후 레임덕에 빠져 위기 대응에 무력했으며 오로지 ‘퇴임 후 안전보장’이 최고의 관심사였다. 여야 대통령 후보는 나라는 뒷전에 놔둔 채 오로지 선거를 위해 막중한 경제현안마저 정치적으로 악용했다.”

국가적 위기가 발생했을 때 대통령에게 모든 책임을 돌려선 안 되지만 외환위기에 관한 한 YS의 책임은 크다. YS는 20대 의원 시절부터 국민들로부터 가장 사랑받았던 대표적인 정치인이자 성공한 야당투사였다. 그러나 대통령으로서는 성공하지 못했다. 재임 중에 일어난 외환위기는 한국 사회에 너무 많은 상처와 그늘을 가져다주었고 그 폐해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듬해인 1998년 1월 19일 홍콩에서 발행되는 영자지 홍콩스탠더드는 한보사건을 ‘한국의 IMF 사태뿐 아니라 아시아 금융위기의 시발점’으로 규정했다.

함영준 마음건강 길 대표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