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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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인(境界人): 둘 이상의 이질적인 사회나 집단에 동시에 속하여 양쪽의 영향을 함께 받으면서도, 그 어느 쪽에도 완전하게 속하지 아니하는 사람’.

“윤석열이라고 인터넷에 쳐보면 이런 사건 할 때는 이쪽 진영, 또 이런 사건을 수사할 때는 이쪽 진영에서 입에 담을 수 없는 그런 비난을 했지만….”

지난 10월 17일 대검찰청에서 열린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윤석열 검찰총장이 가장 목에 힘을 주며 말한 대목이다. 국정감사 며칠 전인 10월 11일 한겨레신문은 윤 총장이 건설업자 윤중천으로부터 별장 접대를 받았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기사를 보도했고, 윤 총장은 즉각 이 기사를 쓴 기자를 고소했다. 그리고 며칠 뒤 열린 국정감사에서 민주당 금태섭 의원과 대안신당 박지원 의원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이미 드러났으니 고소를 취하하라. 검찰총장이 고소·고발 주체가 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지적하자 윤 총장이 목소리를 높이며 한 말이다. 윤 총장은 “나는 인터넷과 유튜브에서 어마무시한 공격을 받았지만 고소 한번 해본 적 없다”며 “해당 언론사가 같은 지면(1면)에 공식 사과한다면 고소를 재고해보겠다”라고 말했다.

당시 국회의원들이 윤 총장에게 던진 질의의 핵심은 한겨레의 ‘별장 접대’ 의혹 보도와 이에 대한 윤 총장의 고소였지만, 한편으로는 윤 총장이 ‘어느 진영에서도 욕먹어온’ 자신의 신세를 강조한 장면이 눈길을 끌었다. 그의 고백처럼 윤 총장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굵직한 사건을 수사할 때마다 수사 대상들의 ‘편’으로부터 공격을 받아왔다. 반대로 그 대척점에 있는 이들로부터는 ‘진정한 검사’ 같은 호평을 받았다. 윤 총장을 둘러싼 여론의 ‘영웅화’ 역시 그의 표현처럼 ‘이쪽 사건 때는 저쪽으로, 또 저쪽 사건 할 때는 이쪽으로’ 넘나들었다.

2016년 말 한직을 떠돌고 있던 윤 총장이 박영수 특검의 수사팀장으로 임명된 후 박근혜 정권 인사들이 줄줄이 구속되자 당시 보수 일각에서는 그를 향해 ‘한풀이 수사’를 한다고 힐난했다. 정권 교체 이후 그가 서울중앙지검장으로 파격 임명됐을 때는 ‘보수를 궤멸시키려는 문재인 정권의 코드 인사’라는 비판이 일었다. 그랬던 이들이 지금은 윤 총장을 향해 “절대 물러서지 마라”며 응원의 메시지를 보낸다.

지난 7월 그가 검찰총장으로 지명된 후 인사청문회가 열리자 민주당 법사위 위원(표창원·박주민·백혜련·송기헌·김종민·정성호 의원)들은 그의 임명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며 “헌법에 충실한 적임자”라고 칭찬했다.

같은 날 자유한국당 소속 법사위원(주광덕·이은재·김도읍·김진태·정점식)들은 윤 총장의 자진사퇴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윤 총장을 임명한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7월 25일 청와대에서 윤 총장에게 임명장을 주며 “우리 총장님”이라고 칭했다. 하지만 불과 한 달여 뒤 조국 전 장관에 대한 검찰의 강도 높은 수사가 이어지자 민주당 의원들은 윤 총장을 향해 “과거 정치 검찰의 가장 잘못된 악습을 반복하고 있다”(이인영 원내대표), “검찰 개혁에 대한 거부 의사 표시를 하고 있다”(박주민 의원)며 비판했다. 대통령 역시 “절제된 검찰권 행사를 하라”며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다. 이제 이 정권 지지자들은 윤 총장을 ‘윤짜장’ ‘윤춘장’이라고 부른다. 조국 전 장관 자택에 대한 압수수색 당시 검찰 관계자들이 ‘짜장면’을 시켜먹었다는 가짜뉴스 탓이다.(당시 중식을 시켜먹은 건 조 전 장관 가족들과 변호인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2013년 10월 국가정보원 대선 개입 사건의 특별수사팀장이었던 당시 윤석열 여주지청장은 수사외압 및 의사결정 과정을 둘러싸고 지휘 책임자인 조영곤 서울중앙지검장과 정면 충돌했다. ⓒphoto 연합
2013년 10월 국가정보원 대선 개입 사건의 특별수사팀장이었던 당시 윤석열 여주지청장은 수사외압 및 의사결정 과정을 둘러싸고 지휘 책임자인 조영곤 서울중앙지검장과 정면 충돌했다. ⓒphoto 연합

문 대통령이 임명한 검찰총장의 집무실 앞으로 이 정권 지지자들은 ‘엿’ 택배를 보냈고 보수 시민들은 ‘힘내세요’라고 적힌 화환을 보냈다. 임명된 지 50여일 사이에 완전히 뒤바뀐 상황이다. 이러한 여론의 ‘역전’은 광장으로 전이됐다. 지난 정권을 탄핵시켰던 광화문 광장에서 이제는 보수우파 시민들이 ‘문재인 탄핵’을 외쳤다. 그 광장에서 촛불을 들었던 이 정권 지지자들은 서초동에 모여 ‘윤석열 사퇴’와 ‘조국 수호’를 외쳤다.

공정과 정의를 외쳐온 조국이라는 인물의 민낯에 많은 국민이 분노했다. 딸의 부산대 의학전문대학원 재학 중 장학금 수령, 외국어고등학교 1학년 재학 시절 병리학 논문 제1저자 기재 논란과 부인 정경심 교수가 자신이 재직하던 동양대 총장 표창장을 위조해 딸에게 줬다는 의혹에서 성난 민심이 폭발했다. 이 의혹들은 모두 그가 사연(私緣)으로 사익(私益)을 추구했다는 데 방점이 찍혀 있다.

최근 드러나고 있는 유재수 전 부산시 경제부시장에 대한 감찰무마는 조 전 장관이 ‘윗선’의 권력에 굴복했다는 사실까지 드러낸다. 이 대목에서 윤 총장의 지난 7월 검찰총장 취임사는 여운을 남긴다. “형사법 집행은 국민으로부터 부여받은 권력이고 가장 강력한 공권력입니다. 국민으로부터 부여받은 권한이므로 오로지 헌법과 법에 따라 국민을 위해서만 쓰여야 하고, 사익이나 특정세력을 위해 쓰여서는 안 됩니다.”

이제 대결 양상은 ‘문재인 정권 대(對) 윤석열 검찰’의 구도가 되다시피 했다. 조국 사태를 기점으로 유재수 전 부산시 경제부시장 감찰무마 의혹, 청와대 선거개입 의혹, 우리들병원 1400억원 불법대출 의혹 등 정권 말기에나 터질 법한 권력형 비리가 쏟아졌다. 이 사건들은 ‘정권 vs 검찰’의 구도를 심화시켰다. 검찰은 청와대와 국무총리실 별관을 잇따라서 압수수색했다. 윤 총장은 자신에게 칼을 쥐여준 이들의 턱밑으로 그 칼을 겨누고 있다.

윤석열이 살아있는 권력을 향해 칼을 겨눈 건 노무현 정부와 박근혜 정부에 이어 세 번째다. 윤 총장은 2003년 불법 대선자금 수사와 관련해 평검사로 수사팀에 참여했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던 안희정 전 충남지사와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 민주당 이상수 사무총장을 구속기소했다. 2013년 박근혜 정권 때는 채동욱 전 검찰총장과 함께 국가정보원 댓글 수사를 맡았다. 이때 그는 국정감사장에서 수사 외압을 폭로하며 검찰 선배인 조영곤 전 서울중앙지검장과 설전을 벌였다. 이날 그의 폭로는 많은 이들의 머릿속에 ‘윤석열’이라는 이름을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폭로를 불편하게 여긴 당시 여당(새누리당) 의원이 “사람(채동욱 전 총장을 의미)에 충성하는 것 아니냐”고 묻자 윤 총장이 “저는 사람에 충성하지 않기 때문에 오늘 이런 말씀도 드리는 거다”라고 답하는 장면은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이리저리 얽힌 연으로 작동하는 우리 사회에서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그의 말은 생소하고도 신선했다.

2019년은 어느 때보다 경계인 윤석열이라는 이름이 가장 뜨겁게 오르내린 한 해였다. 파격적인 기수 파괴를 무릅쓰고 그가 검찰총장직에 지명될 때부터 조국 일가와 친문(親文) 핵심 인사들에 대한 최근의 수사까지 그의 행보 하나하나가 우리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 사이 그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는 ‘정권의 칼잡이’에서 ‘정권의 대항마’로 바뀌었다.

윤 총장에 대해 비판적인 이들은 그가 오로지 검찰 집단의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검찰주의자’라고 규정한다. 윤 총장을 잘 아는 인사들은 그를 ‘원칙주의자’라고 부른다. 윤 총장은 스스로를 ‘헌법주의자’라고 표현한다. 그가 어떤 주의자든 간에 윤석열은 그냥 윤석열의 길을 가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극심한 진영 대결 사회는 그를 매번 다른 이름으로 호출하고 있다. 향후 그 수식이 어떻게 바뀌느냐에 따라 한국 사회는 또 한 번 요동칠 전망이다.

곽승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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