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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회/르포
[2589호] 2019.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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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특집]베네치아에서 띄운 편지, 공화국 1100년의 교훈

▲ 1100년간 지중해 해양대국으로 군림했던 베네치아 역사의 중심이자 증거인 산 마르코 광장. photo 뉴시스
12월 24일 밤 10시, 베네치아 산 마르코(San Marco) 광장에 섰다.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곳이지만, 해가 넘어가는 저녁 5시부터는 정적만이 감도는 어둡고도 쓸쓸한 공간이다. 697년 베네치아공화국 초대 총독(Doge)을 선출한 이래 무려 1100년간 지중해 해양대국으로 군림했던 베네치아 역사의 중심이자 증거가 산 마르코 광장이다. 파도, 바람, 갈매기 소리에 섞여 영광과 권위가 광장 전체에 넘실댄다. 실낱 같은 달빛 아래 퍼져가는 영혼의 울림도 느껴진다.
   
   도시국가였던 베네치아공화국의 최후는 1797년 10월 18일이었다. 나폴레옹이 주도한 캄포포르미도(Campoformido)조약에 따라 오스트리아가 베네치아의 정복자로 등장했다. 베네치아 전성기를 기준으로 할 때 오스트리아는 야만 미개국에 불과한 존재였다. 그러나 유럽의 파워 경쟁에 뒤처진 베네치아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에 굴복한다.
   
   18세기부터 100여년간 역사의 주된 무대는 바다가 아닌 육지였다. 비약적으로 발전한 대포 덕분이었다. 아무리 큰 배라도 대포 한 방이면 끝장이 났다. 그러다 철갑 함선이 등장하면서 다시 바다의 시대가 도래했다. 하지만 바다의 황제로 불리던 베네치아도 결국 18세기 말 유럽의 패권자였던 나폴레옹과 오스트리아 간의 전리품으로 추락했다. 오스트리아 군인들이 밀려들 당시, 베네치아를 지키던 전투 함대는 전부 합쳐 11척에 불과했다. 그나마 육군은 크로아티아 용병 수천 명이 전부였다. 전성기 베네치아는 수천 척의 상선과 전함을 가진 나라였다. 인류 최초의 조립식 조선 기법 덕분에 매일 수천t급 배를 한 척씩 만들어냈다. 11척 배로 최후를 맞이한 베네치아.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던 참담하고도 비극적인 종말이었다.
   
   
   모두에게 열린 도시였던 베네치아
   
   흥망성쇠는 삼라만상의 진리다. 올라갈 때가 있으면 내려갈 때가 있다. 예외는 없다. 베네치아의 역사는 그 같은 진리의 본보기 중 하나다. 그러나 베네치아의 어제를 살펴보면 볼수록 흥과 성을 이어가려 노력했던 남다른 지혜에 주목하게 된다. 최전성기 인구 30만에 불과했던 중규모 공화국이었지만, 평화와 번영을 지키려는 탁월한 노력과 전략전술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시민 모두가 일치단결해서 외부는 물론 내부의 적에 대응한 것은 기본이다. 시민의 이익에 반할 경우 로마 교황에게도 정면으로 대들었다.
   
   한때 아침 드라마 제목이었던 ‘있을 때 잘해’라는 말이 있다. 정상에 있을수록 머리를 숙이고 세상을 겸허하게 대하라는 의미일 듯하다. 베네치아의 어제를 보면 ‘있을 때 잘해’는 기본이다. 한발 더 나아가 ‘없을 때 더 잘해’라는 행동과 사고방식이 베네치아 유전자의 특징이다. 베네치아인은 결코 교만하지 않았다. ‘문화대국’으로 불리는 프랑스처럼 콧대 높은 자존심도 안 보였다. 베네치아에서만 통하는 특별한 예법이나 문화, 문명적 기준도 없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리스어와 무관한 세계는 무조건 ‘야만인’이라 불렀다. 간단히 말해 베네치아의 법과 세금을 따를 경우 누구나 ‘특별한 조건 없이’ 베네치아인이 될 수 있었다. 모두에게 열린 도시였다고나 할까.
   
   그렇다면 법 이전에 베네치아를 규정한, 베네치아에서만 통하는 ‘기본상식’은 무엇일까. ‘있을 때 잘하고, 없을 때 더 잘하라’는 베네치아 의식구조의 출발점은 무엇이었을까. 여러 각도에서 살펴볼 수 있겠지만 평화와 번영에 기초한 생존이 공통분모로 모아진다. ‘평화·번영·생존’이 보장되는 환경과 상황이라면 특별한 편견 없이 전부를 받아들인 곳이 베네치아였다. 옳고 그르냐의 문제나, 세계를 호령한 문화문명과 세계관에 기초한 자기 자랑이 아니었다. 오직 ‘평화·번영·생존’이 1100년 해양대국을 관통한 현실인식이자 전략전술로서의 상식이었다. 아무리 거창하고 아름답고 옳은 것이라도 ‘평화·번영·생존’에 어긋날 경우 무용지물이었다.
   
   
▲ 16세기 지중해 패권을 놓고 벌어졌던 오스만투르크제국과 베네치아 간의 전쟁을 묘사한 그림. photo 위키피디아

   생존을 위한 교활·기만·불신의 DNA
   
   ‘교활·기만·불신’은 근대 이전 유럽에서 통하던 베네치아의 이미지였다. 상대적이긴 하지만 같은 해양대국 제노바(Genova)의 이미지였던 ‘믿음·약속·충정’과 비교되는 면모다. 제노바는 1453년 비잔틴 대제국이 망하기 직전 현지로 달려간 최후의 기독교 구원부대였다. 반면 베네치아는 차일피일 미루다 생색용으로 소규모 지원만 해줬다. 자국의 ‘평화·번영·생존’을 위해서라면 훔치고 속이고 겁박하는 것이 베네치아의 상식이었다. 어제의 적이라도 오늘 당장 필요하다면 친구로 삼았다.
   
   산 마르코 광장 중심에 선 바실리카 교회는 베네치아의 그런 유전자가 어떤 것인지를 알려주는 증거다. 교회 정문에 베네치아 수호 성인 산 마르코 관련 모자이크가 장식돼 있다. 산 마르코 유해가 묻혀 있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베네치아로 옮겨지는 과정이 자세하게 표현돼 있다. 이슬람 교도가 싫어하는 돼지고기 속에 산 마르코를 숨겨 들어오는 장면이다. 수호 성인을 지키기 위해 피할 수 없는 방법이었겠지만 이집트에서 ‘속이고 훔쳐서’ 반입한 것이 산 마르코 유해다.
   
   예수의 제자 산 마르코의 유해가 베네치아에 옮겨진 것은 828년이다. 이후 바실리카 교회 건립과 함께 국력이 하늘로 치솟기 시작한다. 바실리카 교회는 베네치아가 약탈한 전리품 전시관으로 변해간다. 산 마르코 모자이크와 더불어 비잔틴, 콘스탄티노플에서 약탈한 물건들이 교회 외벽에 전시된다. 십자군전쟁을 핑계로 기독교 성지 콘스탄티노플 약탈에 나선 장본인이 바로 베네치아였다. 교회 종탑 주변의 네 마리 청동말(馬)은 산 마르코 광장 관광객의 촬영 명소다. 그 무거운 청동말을 어떻게 옮겼는지 궁금하지만, 13세기 콘스탄티노플 약탈 때 통째로 떼어내 훔쳐온 전리품이다. 밖에서 보면 ‘교활·기만·불신’의 화신이 베네치아다. 그러나 안에서 보면 ‘평화·번영·생존’의 DNA가 공화국을 1100여년간 유지해줬다.
   
   
   콜럼버스 신대륙 발견 이후 이어진 생존력
   
   역사적으로 보면 판 자체가 뒤바뀌는 대전환기가 주기적으로 찾아온다.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같은 것은 인류사 대전환기의 본보기 중 하나다. 지중해 무역으로 먹고살던 해상대국 베네치아의 ‘평화·번영·생존’을 도태시킨 최대의 요인이었다. 중세를 지배한 종교적 압제로부터의 자유도 콜럼버스의 대발견에서 시작됐다. 이슬람권과 아시아에 한참 뒤처져 있던 유럽 문명 수준이 한순간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전 세계 식민지 종주국으로 발돋움한 배경도 신대륙 발견에 있었다.
   
   놀랍게도 15세기 말 베네치아는 신대륙 발견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유럽 제국이 아프리카 희망봉 대항해를 통해 인도·중국 물건들을 직접 수입할 경우 베네치아가 누리던 ‘독점적 상권’이 한순간 사라질 것이라 내다봤다.
   
   원래 운명이라면 베네치아는 신대륙 발견 직후인 16세기에 이미 끝났어야 할 나라다. 그러나 콜럼버스 이후에도 무려 300여년간 ‘평화·번영·생존’을 근근이 이어나간다. 지중해 무역을 독점하던 ‘있을 때’ 잘하던 공화국으로서만이 아니라 유럽에 상권을 빼았긴 17세기, 18세기의 ‘없을 때’ 더 잘하는 교활한 도시국가가 베네치아였다. 아시아 무역에 직접 뛰어든 포르투갈·네덜란드·스페인·영국과 같은 강력한 상대들을 만나면서도 18세기 말까지 ‘평화·번영·생존’을 지켜나갔다.
   
   놀랍게도 베네치아 생명력의 기반이 된 곳은 이슬람 대제국 오스만투르크다. 십자군전쟁에 앞장선 베네치아였지만 이교도의 생활용품, 나아가 술탄(Sultan) 초상화까지 특별제작해 바친 나라가 베네치아였다. 지금도 남아있지만 오스만투르크 상인들을 위한 건물은 지금도 베네치아에서 가장 큰 건축물 중 하나다.
   
   베네치아는 ‘결코’ 한순간에 추락하지 않았다. 불리한 환경에 적응해나가면서 지혜를 하나로 모아 최선을 다해 대응해나갔다. 베네치아 무라노(Murano)의 유리공예품, 부라노(Burano)의 수제 레이스는 해양대국 추락 이후 시작된 국가부흥 프로젝트의 대표적인 본보기다. 인도와 중앙아시아에서 싣고 온 향신료 거래가 끊기면서 베네치아 자체 수출품으로 키운 것이 유리공예품과 수제 레이스다. 연봉 수백만 달러 월스트리트 브로커가 주식시장 폭락 후 수제 원조 만두가게를 연 것에 비교될 수 있다. 지중해 강국으로서의 ‘자존심·명예·역사’ 같은 화려한 명분을 버리고 전적으로 ‘평화·번영·생존’에 매달린 발 빠른 변신이다. 관련 기술이 외부로 유출되지 않도록, 공화국에 몰래 들어와 사는 무허가 이민자들은 사형으로 엄벌에 처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콜럼버스 이후의 300여년이지만, 대전환기의 의미를 파악하고 행동으로 실천한 베네치아의 지혜가 돋보인 시기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 역사와 달리 베네치아 역사가 주는 교훈의 핵심은 흥(興)이 아닌 망(亡)의 시기에 있다. 쇠락기·추락기를 어떻게 버티며 살아나갔는가가 포인트다.
   
   베네치아를 교훈으로 삼을 때 2020년 한국은 어떨까. 최근의 한국은 안팎을 구별하기 어려운 어정쩡한 상태에 빠져 있다. 내부의 ‘평화·번영·생존’을 지키기 위해 밖으로는 ‘교활·기만·불신’도 감수했던 베네치아와 정반대 상황이 한국의 모습이라 느껴진다. 내부는 ‘교활·기만·불신’으로 채워진 전면 불통 사회다. 거꾸로 밖은 상대 기분에 맞춰 하루하루 눈치로 연명하는 것이 한국의 일상이다. 당장 발등의 불인 북핵 문제만 해도 나라 안에서만 본다면 ‘교활·기만·불신’이 판을 친다. 쏟아내는 말들을 들어 보면 서울인지 평양인지 구별이 안 된다. 나라 밖에서 보면 미국·중국·러시아 입맛에 맞는 말들을 쏟아낸다. 여기저기 맞추다 보니 모순되는 발언들도 이어진다. 거짓말이 더 큰 거짓말을 낳는 식이다. 결과적으로 안에서와 마찬가지로 밖에서도 통하지 않는 고립무원, 자가당착 상태다. 콜럼버스 신대륙 발견의 의미를 이해한 베네치아의 300년 안목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지금 당장에 대한 현실인식과 상황판단이 너무도 천박하다.
   
   
▲ 지난 2월 열렸던 베네치아 카니발에서 시민들이 곤돌라를 타고 수상 퍼레이드를 벌이고 있다. photo 뉴시스

   이념·편견·과거사에 사로잡힌 한국
   
   주기적 비극이랄까, 대전환기 때 한국 역사의 대부분은 실기(失機)로 채워져 있다. 객관적·상식적 차원에서 판단할 때 오른쪽 길이 분명한데, 별 희한한 명분과 편견하에 왼쪽으로 간다. 멀리는 임진왜란, 가까이는 한말과 광복 전후 상황만 봐도 알 수 있다. 실기의 이유는 여러 배경에서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베네치아를 교훈으로 삼아 살펴보면 분명한 답을 찾을 수 있다. 대전환기에 내려진 판단기준이 ‘평화·번영·생존’이 아니라 ‘이념·편견·과거사’에 있었다는 것이 주된 이유일 듯하다. 오늘과 내일이 아니라 어제가 판단기준이었다는 말이다.
   
   ‘원숭이 관상’이라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경멸하고 일본 전체를 경시하다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이어졌고, 이미 끝나가는 명(明)나라를 붙잡고 대륙의 주인공 청나라를 배척한 결과가 정묘호란이었다. 지도자들이야 명분도 살리고 정신적 우월감에 도취했겠지만, 당시 민초들이 겪었던 고통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되고 있다. 만약 베네치아 지도자가 조선 대전환기 결정자라면 어떤 방식으로 대했을까. 만약 베네치아 지도자가 21세기 한국의 운명을 책임진다면 과연 어떤 식의 전략전술로 싸워나갈까.
   
   21세기 베네치아는 200여년 전 사라진 공화국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다. 상주 인구 5만명의 한국 중소도시 정도로 추락한 고도(古都)지만 ‘평화·번영·생존’에 주목하는 유전자는 변치 않고 남아 있다. 베네치아가 몰디브, 방글라데시, 알바니아, 중국인으로 채워지고 있다는 점은 그 방증이다. 찬란한 베네치아의 어제가 아니라 오늘 당장, 그리고 내일의 ‘평화·번영·생존’이 한층 더 중요하다. 노인과 어린이를 위한 도우미, 레스토랑 주방의 요리사, 바다와 육지를 오가는 배와 열차를 청소하는 인력은 이미 외국인으로 다 채워졌다. 1797년 베네치아공화국이 사라질 당시 육군의 주력이었던 크로아티아 용병의 현대판이라 볼 수 있다. 베네치아는 베네치아인만이 아니라 세금과 법에 기초한 인류 모두의 도시다. 중요한 것은 ‘평화·번영·생존’이다.
   
   21세기 베네치아의 모습은 현대판 용병만이 아니라 어제의 영광인 역사와 문화 세계로까지 확장되고 있다. 무라노 유리공예 솜씨를 선보이는 흑인 예술가, 외국인 곤돌라 사공들은 대표적인 증거다. 이미 시작됐지만 베네치아 내 이슬람사원 건립도 논의 중이다. 작지만 인종백화점으로 진화하고 있는 이곳의 학교는 ‘평화·번영·생존’의 출발점이다. 베네치아 대학생의 3분의 1은 유럽이나 다른 대륙에 가서 공부를 한다. 돌아오지 않고 아예 현지에 정착하는 청년들도 많다. 국제결혼도 다반사다. 아름다운 도시 베네치아를 두고 왜 황량한 먼곳까지 가서 고생을 하는지 궁금하지만 13세기 마르코 폴로의 유전자는 21세기에도 변함없는 듯하다.
   
   해양강국 1100년 권위는 초대형 이벤트나 슬로건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있는 듯 없는 듯, 그러나 보통 시민에게 가장 중요한 ‘평화·번영·생존’에 집착하는 결과물이 베네치아 역사의 흔적이다. ‘베네치아에서의 죽음(Death in Venice)’은 토마스 만의 소설로, 1971년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이 영화로 만들었다. ‘이념·편견·과거사’를 위한 장렬한 죽음이 아니라 개인의 평화와 사랑에 모든 것을 바치는 아름다운 영화다. 인류의 영원한 문화유산으로, 앞으로 또 다른 1100년 역사를 창조해낼 도시, 2020년 한국이 배우고 실천해야 할 역사적 교훈이 베네치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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