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시 양남면 나아리에 위치한 월성원자력발전소 전경. ⓒphoto 연합
경북 경주시 양남면 나아리에 위치한 월성원자력발전소 전경. ⓒphoto 연합

천년고도 경주가 또다시 핵폐기물 처리·저장시설을 두고 들끓고 있다. 정부가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리장에 이어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임시저장시설까지 경주에 설치하기로 해서다. 지난 1월 10일 원자력안전위원회(원안위)는 월성원자력발전소 내 핵폐기물 임시저장시설인 맥스터(MACSTOR·Moudular Air Cooled Storage) 건립을 승인했다. 이번 조치는 월성원전이 지금까지 경주 양남면 나아리에 쌓아온 방사성폐기물의 절반을 더 쌓을 수 있도록 허가한다는 의미다. 주민들은 정부가 탈원전 정책을 바탕으로 안전한 에너지 사용을 목표한다면 임시저장시설을 세울 것이 아니라 핵폐기물 최종처분 등 중장기적인 관리정책부터 세웠어야 하는데, 이번 조치는 정부 로드맵과는 맞지 않는 주먹구구식 처방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지난해 문재인 정부는 산업부 산하에 ‘사용후핵연료 관리정책 재검토위원회’를 조직했지만 핵폐기물 최종처분 시설부지나 관련 기술, 주민 의견수렴 방안 등을 제대로 논의하지 못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가 추진한 원전 정책의 한계를 보완하겠다며 출범한 조직인데 전문성 미흡, 산업부 눈치 등으로 제 역할을 못한다는 질타만 받는 실정이다. 안전과 건강 위험성을 우려한 원전 인근 주민들의 반발은 거세지는 상황이다.

원안위가 이번에 승인한 맥스터는 원전이 발전연료로 사용하고 남은 사용후핵연료, 즉 고준위 방사성폐기물을 저장하는 건식저장시설이다. 발전소 내 습식저장시설에서 보관, 냉각된 연료는 이곳에 다시 저장된다.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은 월성원전에서 사용하는 건식저장시설인 캐니스터 300기(16만2000다발)와 맥스터 7기(16만8000다발)가 2021년 11월에 포화될 것을 우려해 2016년부터 맥스터 7기(16만8000다발) 추가 건립을 요구해왔는데, 원안위가 이를 들어준 것이다.

“한 집 건너 한 집 갑상선 환자”

이번 맥스터 증설 승인에 가장 큰 우려의 시선을 보내는 이들은 월성원자력발전소가 위치한 경북 경주시 양남면 나아리 인근 주민들이다. 주민들은 6년 전 ‘월성원전 인접지역 이주대책위원회’를 구성해 매주 집회를 열며 맥스터 추가 건립 등을 반대해오던 터였다. 신용화 이주대책위원회 사무국장은 “같은 공간에서 한 사람이 담배 피우는 거랑 서너 명이 담배 피우는 거랑은 다르지 않나. 맥스터 건립도 마찬가지다. 위험성은 더 커지고, 이곳 주민들은 점점 사지로 들어가는 거다”라고 지적했다.

더군다나 주민들은 이미 기존 원전과 핵폐기물 등이 발생시키는 방사선으로 건강 이상증세를 겪고 있다. ‘월성원전방폐장 민간환경감시기구’가 2015년 나아리 마을 주민을 대상으로 실시한 방사성물질 삼중수소 소변검사 결과에 따르면, 주민들은 리터당 평균 9.93베크렐(Bq)의 삼중수소가 검출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삼중수소는 백혈병이나 암 등을 유발할 수 있는 물질로, 원전에서 30㎞ 이상 떨어진 경주 시내 주민들에게선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35년째 이 마을에 거주 중인 황분위씨는 “주민들이 겪는 주된 질환은 갑상선암이다. 한 집 건너 한 집마다 있다. 나를 포함해 갑상선 수술을 받은 이들이 적지 않다. 특히 물가에서 일하는 해녀 어머니들의 건강은 더 나쁘다. 원전 방사선 때문이다. 한수원은 안전하다지만 우리 몸이 그렇지 않음을 증명한다. 맥스터가 추가로 들어서면 건강은 더 나빠질 수밖에 없다”고 푸념했다.

주민들은 이 맥스터가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최종처분시설이 아닌 임시저장시설이라는 점에서 더 큰 걱정이 든다고 한다. 이번 맥스터 추가 건립으로 향후 30여년간은 발전소에서 나오는 방사성폐기물을 저장할 수 있지만, 그 이후엔 또다시 맥스터 같은 임시저장시설을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대안 없이 지역 내에 핵폐기물량만 늘리는 조치라는 이야기다.

더군다나 경주시의 경우 이미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리장이 2015년 준공돼 운영돼 오고 있다. 1986년부터 시작된 국내 방사성폐기물 처리시설 부지 확보 사업이 각 지역 주민 반발 등으로 난항을 겪으면서, 2004년 방사성폐기물을 고준위 폐기물(원전에 사용된 사용후핵연료)과 중·저준위 폐기물(작업복·일회용 신발·폐수지 등)로 나누고,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리장부터 우선 확보하겠다는 원자력위원회 방침에 따른 조치였다. 경주시는 2005년 주민투표 등을 거쳐 중·저준위 방폐장 설립부지로 선정됐다.

앞서의 황씨와 이웃인 성혜중씨는 “당시 중·저준위 방폐장을 들여오는 조건으로 고준위 방폐장은 설치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이번 맥스터 설립 승인은 이를 어긴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경주시 나아리 인근 주민들은 매주 월성원자력홍보관 앞에서 맥스터 건립 반대 집회를 벌인다. ⓒphoto 월성원전인접지역 이주대책위원회
경주시 나아리 인근 주민들은 매주 월성원자력홍보관 앞에서 맥스터 건립 반대 집회를 벌인다. ⓒphoto 월성원전인접지역 이주대책위원회

재검토위원회, 총선 의식 요식행위 반복?

사용후핵연료 저장시설 포화는 월성원전만의 일이 아니다. 한국방사성폐기물학회 연구용역 결과에 따르면, 국내에서 운영 중인 한빛원자력발전소 사용후핵연료 저장시설의 포화 시점은 2029년, 한울은 2030년, 고리는 2031년, 신월성은 2042년, 새울은 2065년으로 예상되고 있다. 그렇다 보니 경주시 나아리 인근 주민 등을 포함한 각 원전 인근 지역주민들은, 방사성폐기물 임시저장시설 건립에 나설 것이 아니라 최종처분시설 건립 등 근본 대안부터 강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이것이 당장의 원전 가동 중지보다 더 중요하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이와 관련한 정부 논의는 진척을 보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해 5월 ‘사용후핵연료 관리정책 재검토위원회’를 출범시킨 바 있다. 2016년 박근혜 정부가 수립한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 기본계획’을 재검토해, 중장기적인 사용후핵연료 관리정책을 수립할 것을 목표한 조직이었다. 당시 문제로 지적받던 기존 계획안의 ‘원전 가동 지역 내에 사용후핵연료 임시저장시설을 건립한다’는 내용을 손보고, 시민사회 의견수렴 확대에도 주의를 기울이겠다고 약속했다.

신용화 사무국장은 “하지만 현 정부는 지난 정부의 과오를 되풀이 중”이라며 “맥스터 건립이 이뤄지기 전에 사용후핵연료 처분에 대한 청사진부터 그렸어야 했는데, 재검토위는 출범 후 6개월이 지나도록 사용후핵연료를 어떤 방식으로 처리하고, 관련 시설은 어디에 둘지 등에 대한 논의를 전혀 안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산업부 고시에 따라 재검토위의 활동 기한은 올 5월까지이다. 기간이 짧으니 이에 대한 논의는 애초부터 심도 있게 이뤄질 수 없었으며 일정 따라가기에 급급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재검토위는 주민 의견수렴을 위해 원전이 위치한 지역별 실행기구를 구성하겠다고 밝혔지만, 현재까지 이를 갖춘 곳은 경주시뿐이다. 그렇다 보니 원전 인근 주민들이 서울로 상경해 “재검토위가 밀실 공론화를 이어간다”며 벌인 집회도 다수다.

올 1월엔 재검토위가 운영하는 전문가 검토 그룹 34명 중 11명이 공동 탈퇴하는 일도 발생했다. 당시 전문가 위원들은 “재검토위가 사용후핵연료 문제가 안고 있는 사회적 중량감과 복잡성을 다루기엔 논의 내용이 부실하며, 요식적인 절차만 밟고 있다”고 지적했다. 현 정부가 탈원전을 국정과제로 내세우며 안전한 에너지 사용을 목표로 하지만, 정작 내실 있는 행정을 이어가진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2018년 사용후핵연료 관리정책 재검토위원회 출범을 준비한 재검토준비단 구성위원 중 한 명은 지금의 상황이 예견된 일이었다고 평가한다.

“준비단은 재검토위가 앞으로 어떻게 활동할지 설계하는 일을 했다. 하지만 시간제약 등으로 모든 걸 다 설계하지 못했고, 의견수렴 방안도 완성하지 못했다. 그러니 잡음이 생길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지금 재검토위를 이끄는 15명 위원들의 전문성이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인문사회, 법률과학, 소통갈등, 조사통계 분야 의원들로 핵 산업계나 지역에서 추천받은 인사들은 없다.”

그는 준비단 활동 당시 산업부 관계자들이 총선을 의식했다고도 귀띔했다. 그는 “2020년 4월 총선 전에 결과가 어떻게 나든 간에 공론화 결실을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 많았다. 공론화 과정이 지지부진해지면 원전 중지나 가동에 대한 불똥이 정부로 튈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라고 말했다. 맥스터 건립이 먼저 추진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이와 관련해 재검토위 측은 일정대로 관련 계획 등을 수립 중이라는 입장이다. 재검토위 지원단 운영팀 관계자는 “방사성폐기물 최종처분시설 건립을 위한 주민들 의견수렴 방안을 논의 중이다. 국민, 원전 인근 주민들과 소통하는 노력도 지속, 확대하고 있다. 필요시 활동 기간을 연장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5월 ‘사용후핵연료 관리정책 재검토위원회’가 출범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최근 재검토위는 제 역할을 못한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photo 뉴시스
지난해 5월 ‘사용후핵연료 관리정책 재검토위원회’가 출범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최근 재검토위는 제 역할을 못한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photo 뉴시스

재검토위, 독립기구로 거듭나야

시민사회단체 등에선 재검토위가 제 역할을 하려면 정부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산업부는 원활한 발전소 운영으로 안정적인 전력 공급을 목표로 하는 부처인데, 재검토위가 산업부 산하에서 사용후핵연료 처분 등과 관련한 중장기적인 계획을 제대로 세울 수 있겠냐는 이유에서다. 이들은 정부가 영국 사례를 참고할 것을 권유한다.

영국은 1970~2000년대 환경부 산하 방폐물관리자문위원회(RWMAC)와 국영 원자력사업자 산하 방폐물관리집행기구(NIREX)를 통해 방폐장 부지 선정을 수차례 시도했지만 한국처럼 실패만 거듭했다고 한다. 이에 영국 상원은 1999년 “폐쇄적이고 일방적인 방폐물관리정책 의사결정 체계가 문제”라며, 독립적인 의사기구를 설립할 것을 권고했다. 영국 환경농림부는 이를 수용해, 2003년 독립기구인 ‘방폐물관리위원회(CoRWM)’와 의사결정 결과를 집행할 ‘원자력해체기구(NDA)’를 설립했다. 기존 RWMAC는 해체하고 NIREX는 NDA와 통합해, 현재 영국은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공론화를 추진 중이다.

이와 관련해 임익성 한국원자력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정책적 판단과 논의의 대상을 ‘사용후핵연료’가 아닌 ‘국민’으로 두고 ‘무엇을 이해하는가’에서 ‘누가 이해하는가’로 관점을 전환할 필요도 있다”고 평가했다.

이성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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