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닌텐도
ⓒphoto 닌텐도

사람들이 ‘동물의 숲’에 모여들고 있다. 닌텐도 스위치용 게임 ‘모여봐요 동물의 숲’(이하 동숲) 얘기다. 지난 3월 20일 출시 이후 4월 5일 기준 일본에서만 300만장 이상 판매된 이 게임의 인기는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품귀 현상 탓에 네티즌들이 구매할 수 있는 곳을 공유하는 순간 그 매장은 품절이 될 정도다.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한창일 때도 출시일에 게임을 구입하려 길게 줄을 선 인파가 뉴스를 타기도 했다. 닌텐도사(社)의 게임 및 하드웨어 국내 유통을 맡고 있는 대원미디어는 지난 4월 14일 종가를 기준으로 ‘동숲’이 국내에 출시된 이후 주가가 56.8% 급등했다.

동숲은 갑자기 튀어나온 신작이 아니다. 이전에도 닌텐도의 게임기인 닌텐도64, 닌텐도DS, Wii 등을 거쳐 꾸준히 출시된 바 있는 19년 전통의 시리즈다. 이번에 ‘닌텐도 스위치’라는 발전한 플랫폼의 성능에 맞게 그래픽과 UI를 일신하긴 했지만, 게임의 정체성은 그대로다. 동숲 안에서 게이머는 무인도를 개척하는 마을의 대표다. 마을과 집을 가꾸고 동물 주민을 섬으로 초대하고 그들과 함께 목가적인 일상을 즐긴다.

오래된 게임이 왜 지금 이례적 인기를 얻게 된 것일까. 흔히 코로나19 사태가 촉발한 비대면 소비, 언택트(Untact)와 ‘집콕’ 트렌드가 동숲의 인기로 이어졌다고 분석한다. 동숲은 최근 출시된 게임 중 대표적인 힐링 게임이자 잘 만들어진 게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순히 코로나19만을 이유로 삼기엔 부족하다.

동숲의 인기는 ‘무언가’의 부재에서 온다. 동숲의 세계에는 실패도 경쟁도 목표도 없다. 그리고 이 공백을 채워주는 건 무궁무진한 가능성의 일상이다. 어린 시절 방학 내내 할머니댁에서 여물 먹는 소처럼 먹고 놀고 자던 기억처럼, 무엇이든 해도 되고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일상은 그 자체로 노스탤지어(향수)다.

어릴 적 할머니집 같은 노스탤지어의 공간

동숲 밖의 세계는 생존을 위해 경쟁하는 세계다. 경쟁 끝에 승리 혹은 패배가 냉혹하게 결정되는 세계다. 현실은 말할 것도 없고 게임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남을 밟아야 내가 올라선다. 누군가의 쓰라린 패배는 나의 영광스러운 승리를 의미한다. 나의 위상은 현실에서는 연봉이나 직위로, 게임 속에서는 범접할 수 없는 캐릭터 레벨로 정의된다. 롤(리그 오브 레전드) 등급을 올리기 위해 대리 게임도 불사하는 게이머가 나오는 까닭이다. 1972년에 출시돼 상업용 게임의 원조로 일컬어지는 아타리사(社)의 게임 ‘퐁’(1972)을 떠올려 봐도 비디오게임은 상대와 대결해 점수로 승패를 가르는 디지털 스포츠로 출발한 셈이다.

원초적인 대결을 넘어 스토리텔링이 중시된 게임에서도 냉혹한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게이머가 조작하는 주인공 캐릭터는 온갖 고초를 겪으며 거대한 악의 세력과 맞서 싸우거나 불가항력의 재난 속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죽고 죽이고 떨어지고 다치고 소중한 이를 잃는다. 비극이 깊고 가파를수록 극복했을 때의 카타르시스는 빛나는 법이니까.

각박한 현실에서 고개를 돌려 모니터 속을 바라봐도 날 반기는 건 또 다른 경쟁과 생존인 셈이다. 게임 세계란 ‘금수저’ 없이 모두가 1레벨에서 출발해 실력으로 증명하는 ‘공정한 무대’라고 생각해 보지만, 그마저도 녹록하지 않다. ‘금손’과 ‘똥손’은 결코 같을 수 없고 무과금(온라인게임 등에서 유료 서비스를 결제하지 않고 이용하는 것)은 과금을 이기기 어렵다. 그 격차는 현실보다 더 가혹하고 냉정하다.

동숲에선 게이머가 온전히 세계의 주인공이 된다. 그 과정은 최소한의 노력과 노동만 요구한다. 나무를 흔들어 떨어지는 나뭇가지를 줍고, 잡초를 뽑고 잠자리채로 곤충을 잡는 것만으로도 내 몸 누일 곳이 생기고 척박한 무인도는 점차 주민들이 북적거리고 생기가 도는 마을로 변신한다. 실패란 없다. 가장 큰 실패라고 해봤자 왕거미(타란툴라)에게 물려 잠시 기절하거나, 사고 싶은 옷이 너무 비싸 못 사는 정도다. 다양한 개성의 동물 주민들은 만날 때마다 “대단해, 네 덕분에 섬이 점점 더 살 만해졌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오늘도 아무 일 없는 행복한 하루’

경쟁도 없다. 남들과 함께하는 온라인 요소가 있긴 하지만, 상대방의 섬에 놀러가는 정도다. 레벨이란 개념도 존재하지 않아 ‘고(高)렙’과 ‘저(低)렙’으로 나뉘지도 않는다. 그저 게임을 오래 즐긴 사람이라면 좀 더 다양한 가구와 꾸미기 용품을 갖출 수 있는 정도다. 이마저도 ‘만지작’이라는 간단한 방법을 통해 다른 게이머와 제작 레시피를 공유할 수 있다. 아이템을 얻기 위해 뺏고 뺏기지 않아도 되는 시스템은 게이머들을 상호 호혜적인 관계로 만든다. 인터넷 커뮤니티에 ‘그랜드 피아노 만지작할 사람 줄 서세요’ ‘레시피 나눔 할게요’ 같은 호혜적인 글이 줄지어 올라오는 이유다.

목표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게임 속 캐릭터가 던져주는 그때그때의 과제는 있지만, 독촉도 페널티도 없어 그저 내켰을 때 하면 그만이다. 엔딩 시점은 생각보다 빠르지만 하나의 이벤트일 뿐이다. 엔딩 장면이 지나도 살고 싶은 섬을 만들어 나가고 그 안에서 즐기도록 유도하는 동숲의 재미는 결코 끝나지 않는다.

일본 전통 화투를 만들어 팔다가 비디오게임사(史)의 거목으로 자라난 닌텐도(任天堂)는 가장 오랜 세월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유서 깊은 게임 제작사다. 30년 이상 인기를 끌고 있는 장수 IP(지적재산권) 시리즈만 해도 ‘마리오’와 ‘젤다의 전설’ 시리즈가 있고 포켓몬스터 역시 20년째 현역으로 활약 중이다. 닌텐도 게임의 매력은 ‘단순하고 쉽다’는 점이다. 4대 사장 이와타 사토루(岩田聰)가 내세운 닌텐도 게임의 모토이기도 하다. 그는 화려하고 생생한 그래픽과 복잡한 시스템, VR 같은 첨단 장비를 갖춘 다른 게임들과 경쟁하는 대신 비디오게임에 관심 없는 사람들을 게임의 본질적인 재미에 끌어들이고자 했다.

동숲 역시 닌텐도의 철학에 부합하는 게임이다. 느긋하고 자유도 높지만 정교하게 설계된 게임 디자인은 게이머에게 무의미한 지루함 대신 의미 있는 기다림을 제공한다. 동화적인 세계로 채워 놓은 섬세한 디테일도 일품이다.

겪어보지 못한 과거에 대한 노스탤지어는 힘이 세다. 쫓기듯이 살아온 우리는 시골 할머니집에 대한 추억이 있건 없건 조용하고 평화로운 세계의 소중함을 안다. 동숲 안에서는 그 소중한 세계가 펼쳐진다. 대단치 않은 일상이 켜켜이 쌓여 떠나고 싶지 않은 세계를 이룬다. 악당을 무찌르지 않아도, 대단한 부를 쌓아 올리지 않아도 친절한 동물 주민들은 친구인 내게 언제나 먼저 와 말을 걸어준다. 실패도 경쟁도 목표도 없는 동숲은, 겪어보지 못한 과거에 대한 향수로 가득 차 있다.

습관처럼 게임에 접속해 봤다. 마을 주민인 산토스가 내 이름을 부르며 다가왔다. “오늘도 아무 일이 없구나. 이렇게 아무 일도 없이 행복한 하루가 계속되면 좋겠어.” 나의 세상이, 지금 막 1도 정도 따뜻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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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윤 매일경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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