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승무원의 10%가 넘는 600여명이 코로나19에 감염돼 작전을 중단하고 괌에 긴급입항한 미 핵추진항모 루스벨트함. ⓒphoto 조선일보
전체 승무원의 10%가 넘는 600여명이 코로나19에 감염돼 작전을 중단하고 괌에 긴급입항한 미 핵추진항모 루스벨트함. ⓒphoto 조선일보

“캡틴 크로지어! 캡틴 크로지어!”

지난 4월 3일 괌에 정박한 미 핵추진 항모 루스벨트함의 격납고에 모여 하선을 준비하고 있던 수백 명의 승조원들이 함장 이름을 소리 내어 외쳤다. 이들은 브렛 크로지어 함장이 묵묵히 짐을 챙겨 배를 떠나는 모습을 보고 이렇게 경의를 표하며 연호한 것이다.

크로지어 함장은 승조원 5000여명을 태운 루스벨트함에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급격히 확산하자 지난 3월 30일 상부에 “지금은 전시(wartime)가 아니다. 승조원들이 배 안에서 이렇게 죽어갈 이유는 없다”는 내용의 5쪽짜리 서한을 보내 하선을 요청했다. 이 내용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여론의 관심이 고조되자 결국 하선 명령이 떨어졌다. 하지만 토머스 모들리 미 해군장관 대행은 크로지어 함장에 대해 “지나치게 솔직하거나 멍청한 사람”이라고 비난했고, 결국 미 해군은 지난 4월 2일 그를 경질했다. “군 규율을 어기고 지휘 계통을 벗어나 편지를 유출했다”는 이유에서였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까지 나서 “핵 동력으로 움직이는 거대 항공모함의 수장이 편지를 통해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된다. 그가 편지를 쓴 것은 끔찍한 일이었다”고 비난했다. 이렇게 승조원들의 생명을 구하고 경질된 함장이 이들의 감사인사를 받으며 떠나는 장면을 담은 동영상은 순식간에 인터넷을 달궜다.

전격 경질돼 불명예 퇴진을 하는 듯했던 크로지어 함장은 이내 ‘영웅’ 호칭을 들으며 대반전 드라마가 펼쳐지고 있다. 크로지어를 비난하고 경질했던 모들리 해군장관 대행은 지난 4월 7일 사임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전 대통령의 증손자는 크로지어를 ‘영웅’으로 칭했다. 그는 지난 4월 4일 뉴욕타임스의 ‘크로지어 함장은 영웅’이라는 기고문에서 “증조할아버지도 크로지어 함장의 판단을 지지했을 것”이라며 “많은 이들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큰 용기를 보여주는 것은 희망적”이라고 밝혔다. 크로지어의 복귀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이어지고 있다. 한 청원 사이트에는 몇 시간 만에 6만7000명이 그의 복귀 청원에 서명했다. 정치권에서는 민주당 상원의원들이 이번 인사 조치에 대한 진상 조사를 요구하고 나섰다.

이 같은 대반전 드라마는 비록 논란이 있었지만 코로나19 확산에 대한 크로지어의 조치가 옳았고 미 해군 수뇌부의 대응이 잘못됐다는 것을 보여준다. 윤석준 한국군사문제연구원 연구위원의 ‘중국 COVID-19와 미 핵항모 함장 해임’ 분석에 따르면 코로나19는 과거와 다른 상황이었으며, 코로나19의 루스벨트함 유입 차단에 실패한 미 해군 지휘부가 함장을 속죄양으로 삼았을 수 있다는 것이다. 윤 위원은 “남중국해 등에서 첨예한 미·중 간 군사경쟁을 벌이는 현 시국에 미 해군성이 너무 작전 성과에만 집착해 함장에게 지휘책임을 물었다”며 “평시 작전 수행 중 발생한 코로나19 확산 책임에 메모 유출을 명분으로 함장을 해임한 것은 미 해군 지휘부의 면피용 행위라는 지적이 나온다”고 밝혔다.

코로나19에 감염된 부하들의 목숨을 구하려다 해임된 브렛 크로지어 미 핵추진항모 루스벨트함 함장. ⓒphoto 조선일보
코로나19에 감염된 부하들의 목숨을 구하려다 해임된 브렛 크로지어 미 핵추진항모 루스벨트함 함장. ⓒphoto 조선일보

모들리 미 해군장관 대행은 지난 4월 2일 자 미 해군성 보도자료에서 ‘미 해군성은 함장에게 필요로 하는 모든 조치를 하고자 했으며, 메모 공개 이후 7함대사령관, 태평양함대사령관, 해군참모총장 간 화상회의를 통해 방안을 강구했다’며 ‘루스벨트함 크로지어 함장은 이를 저평가하여 승조원의 불안을 증가시키는 역효과를 발생시켰다’고 비난했다. 반면 상당수 군사 전문가들은 코로나19가 전 세계로 확산돼 가는 상황하에 미 해군 수뇌부가 작전적 영향과 파장을 우려하여 함장이 제기한 루스벨트함 내 코로나19 확산 문제에 대해 안이하게 대응하다가 일이 크게 확대되자 함장을 속죄양으로 삼았다고 비판했다. 일각에선 미 해군 지휘부가 트럼프 대통령처럼 극히 비과학적 접근을 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군사 전문가들은 특히 지난 3월 4일 루스벨트함이 베트남 다낭에 입항했을 때는 이미 코로나19가 전 세계로 확산하는 추세였음에도 미 해군성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루스벨트함의 다낭 방문을 강행토록 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아무튼 루스벨트함 사례는 전염병에 의해 미 군사력의 상징인 초대형 핵추진 항모가 사실상 무력화된 최초의 사례여서 충격을 주고 있다. 루스벨트함 감염자는 4월 15일 현재까지 600여명으로 늘어난 상태다. 문제는 루스벨트함 외에도 다른 미 항모에서 코로나19 환자가 속속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 폴리티코 등 외신은 지난 4월 7일 복수의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지난주 미 해군 니미츠함에서 코로나19 확진자 한 명이 발생했다”고 전했다. 이로써 승조원이 양성 판정을 받은 미 해군 항모는 모두 네 척으로 늘었다. 니미츠함은 미 태평양 연안 워싱턴주 브레머턴이 모항이다. 일본에서 정비 중인 로널드 레이건함에서도 확진자가 2명 발생했으며, 워싱턴주 북서부 퓨젓사운드에서 정비 중인 칼빈슨함에서도 확진자가 한 명 발생했다.

확진자가 발생한 항모는 모두 미 항모 주력인 니미츠급 핵추진 항모다. 미 해군이 운용 중인 11척의 핵추진 항모 중 10척이 니미츠급으로 배수량은 9만~10만t에 달한다. FA-18 E/F ‘수퍼 호넷’ 전투기, EA-18G ‘그라울러’ 전자전기, E-2 조기경보기 등 80여대의 각종 함재기를 탑재하고 있다.

문제는 이들 항모가 모두 태평양에 배치돼 있는 것이라는 점이다. 태평양에 배치된 5척의 항모 중 80%인 4척에서 코로나19 환자가 발생한 것이다. 루스벨트함처럼 코로나19가 확산돼 작전이 어려워질 정도로 악화되면 유사시 북한이나 중국에 대한 대응에 차질이 빚어질 수 있다. 특히 미 7함대 소속인 레이건함은 북한 핵실험이나 장거리 미사일 발사 등 한반도 위기 때마다 동해상으로 출동하곤 했다. 괌에 정박 중인 루스벨트함은 지난 1월 모항인 샌디에이고를 출발, 지난 3월 초 남중국해에서 대규모 해상훈련을 실시했으며, 올해 림팩(환태평양) 훈련과 동맹국과의 다양한 연합훈련에 참가할 예정이었다.

미국은 2017년 11월 북한 핵·미사일 위협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매우 이례적으로 동해상에 레이건함, 루스벨트함, 니미츠함 등 3척의 핵추진 항모를 한꺼번에 출동시켜 고강도 대북 무력시위를 벌였다. 공교롭게도 이 3척의 항모에서 모두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한 셈이다. 중국은 이런 미 항모들의 전력 공백을 틈타 보란 듯이 랴오닝함과 수상 함정들이 대만 근해 등을 항해하며 미국을 자극하고 있다. 미국뿐 아니라 프랑스 유일의 핵추진 항모인 샤를드골함에서도 50명의 승조원이 코로나19에 감염된 것으로 나타나 작전을 중단하고 항구로 향했다.

최근 루스벨트함 사례는 아무리 강한 첨단무기도 결국 사람이 움직이는 것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새삼 일깨워주고 있다. 무기를 움직이고 군을 지휘하는 사람들을 무력화할 수 있는 생화학무기의 위협도 재평가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군 소식통은 “최근 코로나19 사태로 세계가 마비 상태에 빠진 상황은 핵무기 10여발이 터진 것보다 더 큰 피해를 초래하고 있다”며 “유사시 생화학무기 위협에 대한 우리 정부와 군의 대응 태세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점검하고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유용원 조선일보 논설위원·군사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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