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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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번방 사건을 수사하는 경찰 발표에 모든 언론이 주목하고 있을 때, ‘주홍글씨’라 불리는 텔레그램방에선 n번방 사건의 주요 공범으로 강훈(닉네임 ‘부따’)의 이름이 이미 거론되기 시작했다. 경찰이 강훈의 신상을 공개한 것은 지난 4월 17일. ‘주홍글씨’방에 강훈의 이름이 거론된 것은 이보다 20여일 빨랐던 3월 26일이었다. 이날 ‘주홍글씨’방에는 강훈이 조주빈의 n번방 운영을 도왔다는 공범자들의 진술 등이 그의 고교 시절 사진과 함께 올라왔다. 주홍글씨방에는 그밖에 n번방의 주요 핵심인물로 거론되는 사람들의 신상정보도 다수 올라왔다. 최근 핵심 공범으로 지목된 거제시청 소속 8급 공무원의 신상은 이미 주홍글씨방에서 거론되고 있던 터였다. 유료회원 가입 의혹이 제기된 MBC 소속 기자 신상의 경우 경찰 발표 즉시 프로필 사진과 리포팅 모습, 기자 페이지 등으로 낱낱이 공개됐다.

텔레그램 주홍글씨방에서 특정인을 지목하는 방법을 보면 일정한 패턴이 있다. 이름과 나이, 얼굴 사진, 주민등록번호, 직업, 휴대폰 번호, 집주소와 같은 개인 신상을 캡처화면 등으로 공개하는 것부터 시작해 n번방 참여 경위, 역할과 같은 나름의 혐의까지 정확히 적시한다. 인터넷상에선 이를 ‘신상박제’라고 일컫는다. 신상공개, 신상털기보다 한발 더 나아가 개인의 신상을 포착해 대중의 뇌리 속에 각인시키는 방법이다. 한동안 유행했던 ‘네티즌수사대’보다 업그레이드된 정보를 네티즌에게 전파하는 셈이다. 현재까지 텔레그램 주홍글씨방에 신상박제된 이들은 200명이 훌쩍 넘는다. 경찰 수사가 진행 중인 최근까지도 일주일에 평균 10명 내외의 ‘신상’이 새롭게 ‘박제’되고 있다.

이를 주도하는 건 스스로를 ‘자경단’이라 칭하는 20여명의 일반인들이다. 주홍글씨 운영진은 자신들을 “텔레그램 강력범죄에 대한 신상공개 및 범죄자의 경찰 검거를 돕기 위해 텔레그램 및 온라인상 어디에서든 활동하고 있다”며 “텔레그램 3대 강력범죄(페도·지능·판매)자들에 대해 언제든 제보를 받고 있다”고 소개했다. 실제로 이들은 자신들이 운영하는 텔레그램 방에서 유료회원 등으로 확인된 ‘○○○ 관련 제보를 받습니다’란 식의 글을 띄우고, 그렇게 전달받은 제보를 바탕으로 퍼즐을 맞추어나가는 작업을 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공권력 부정, 불법 여지 다수”

이들은 신상박제 외에도 ‘범죄자 청문회’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이 찾아낸 의심자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사과를 받아내고 이를 음성파일로 공유하기도 한다. 공유 파일에 등장한 한 유료회원은 “정말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10여차례 반복하며 신상박제 중단을 부탁하기도 했다. 이런 활동이 가장 활발한 건 구독자수 1만1900여명인 주홍글씨방이지만 아카츠키방(구독자 6200여명) 등 여타 소셜미디어에서도 비슷한 활동을 이어가는 그룹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다.

이런 온라인 자경단(自警團)의 활동에 대해서는 일반인과 전문가의 의견이 뚜렷하게 엇갈린다. 일반 시민들 사이에선 이를 두고 “경찰보다 낫다” “이들 조직이 현실적인 대안” “비상하다”는 평이 나오지만 법조계 등 일각에선 무분별한 신상 공유가 2차 피해를 가져오지 않겠느냐는 우려의 시선도 보낸다. 이들이 지목한 인물이 실제 n번방 운영진, 유료회원이 아닐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 주홍글씨방엔 가해 의심자들의 신상만 거론될 뿐 법적으로 이들을 유죄라고 할 만한 근거는 공유되지 않고 있다. n번방 운영진으로 추정되는 이들과의 카카오톡 대화 내용 캡처사진 등이 유일한 증거다.

김재련 법무법인 온세상 변호사는 “이들의 활동과 취지는 공감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법치주의다. 특정 행위의 도덕성을 비판하는 건 표현의 자유라는 권리하에 충분히 행해질 수 있지만 범죄 행위에 대한 시시비비를 가리고 처벌하는 건 법에 정해진 요건, 절차 내에서 이뤄져야 한다. 그래야 부작용도 없다. 이들 행위는 이를 모두 무시하고 공권력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거다. 취합한 정보는 공개하지 않고 곧바로 수사기관에 넘겼어야 했다”고 평가했다.

경찰 측에선 이런 이유 등으로 자경단에 대한 수사도 돌입한 상황이다. 경찰청 관계자는 “불법 여지가 다수 있다”며 “자경단에선 수사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정보를 경찰에 준다고 하는데 그들 자체가 수사 대상인데 어불성설이다”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주홍글씨 운영진이 과거 n번방을 운영해오다 경찰 수사가 시작되자 돌연 성격을 바꿔 검거를 돕는 것이란 주장도 있다. 경찰은 이에 대한 수사도 진행할 것으로 보인다. 당장 법조계 등에선 자경단이 명예훼손, 무죄추정의 원칙 위반, 피의사실 공표죄 혐의 등을 적용받을 여지가 클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해외에서도 ‘네티즌수사대’ 논란

사실 시민들의 이런 자발적 활동과 이에 대한 적절성 논란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1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네티즌수사대’ ‘누리꾼수사대’라는 이름으로 이와 유사한 집단행동 등이 적지 않게 나타나곤 했다. 이들은 각종 포털에 남겨진 정보를 조합해 신상을 공개하거나 특정 사건을 재구성해왔다.

2012년 닉네임 ‘자로’ 등의 네티즌수사대가 국정원 대선개입 혐의 입증자료로서 국정원의 비밀 트위터 계정, 각종 포털 사이트 아이디를 직접 찾아내 여론에 공개한 것이 대표적 예다. 이들 자료는 결국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선거법 위반 혐의를 입증하는 주요 증거로 활용되기도 했다. 2016년 최순실게이트 관련 청문회 당시엔 한 커뮤니티 회원들이 박영선 당시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에게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검증 청문회’ 영상을 제보하면서 “최순실을 본 적도 없고 전혀 알지도 못한다”는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발언이 위증임을 밝히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이밖에도 각종 살인이나 자살, 유괴 사건 해결 등에 자발적으로 참여해 사건의 실마리를 제공한 경우가 적지 않은데 이때마다 이들이 제시한 자료의 근거, 신빙성, 권한 등을 근거로 이 행위가 적절하냐는 논란이 뒤따랐다.

해외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아동범죄를 감시하는 영국의 ‘레츠고 헌팅(Letzgo Hunting)’, 불법 성매매를 포착하는 미국의 ‘변태적 정의(Perverted Justice)’, 각종 불법 행위를 단죄하는 중국의 ‘인육검색엔진(Human Flesh Search)’ 등이 대표적인 해외 네티즌수사대로 꼽히는데 이들이 주로 행하는 함정수사 방식에 대해선 “인권 존중 측면에서 최선의 수단인가”라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2013년 보스턴마라톤 폭탄 테러 사건 당시엔 현장에 있던 시민들이 동영상, 사진들을 수사기관에 제공, 용의자를 쫓는 것을 돕는 듯했지만 그 과정에서 무고한 시민들이 용의선상에 올라 질타를 받기도 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정부와 공권력이 한계를 갖는 측면이 있다. 이때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는 사태 해결에 도움을 준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공공질서 유지 등을 위해 개인의 권리 등이 무시되는 경우도 생겨나고 있다. 인터넷상에서 더 도드라지게 나타나는 모습인데 이에 대한 균형을 잘 유지하는 게 필요하다”라고 평가했다.

남궁현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은 자신의 연구 논문을 통해 “수사기관이 이 같은 활동을 수동적으로 방관하기보다는 인터넷 서비스 제공업자와의 협동으로 이를 선도할 필요가 있다. 특정 사건과 관련한 정보가 대량으로 유통되는 포털 관리자 등과 주기적으로 소통하며 사실이 왜곡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라며 “인터넷상에서 새롭게 발생하고 있는 시민들의 자발적·자생적인 경찰 활동에 대한 연구와 개념정리가 필요할 때다. 이들이 왜 자신의 시간과 지식을 투자해 공공선을 실현하려는 것인지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고 분석했다. 바꿔 말하면 국가가 이를 적절히 포용해나갈 수 있는 방안도 고민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성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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