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림 대한간호협회 회장
신경림 대한간호협회 회장

올해는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탄생 200주년이자 세계보건기구(WHO)가 처음으로 지정한 세계간호사의 해이다. 나이팅게일이 전쟁터 야전병원으로 달려가 수많은 목숨을 구한 것처럼 우리나라에서도 또 다른 나이팅게일들이 코로나19 사태의 최전선인 대구·경북 지역으로 달려가 기적을 만들어냈다. 매년 5월 12일은 국제간호사의 날로 나이팅게일 탄생일이다. 세계간호사의 해인 만큼 간호계로서는 올 국제간호사의 날이 뜻깊을 수밖에 없다. WHO가 간호사를 인류의 보편적 건강 보장을 위한 핵심이라는 것을 공식화했기 때문이다.

2%의 기적

국제간호사의 날을 앞두고 지난 5월 4일 신경림 대한간호협회 회장을 만났다. 코로나19와의 전쟁에서 헌신한 간호사들을 향한 박수가 쏟아지고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지만 그 뒤에는 간호계가 풀어야 할 숙제들도 많다. 이제는 전염병의 불안이 일상화된 시대가 됐다. 메르스의 학습이 코로나19 대응으로 이어졌듯, 이번 사태를 복습하고 문제들을 찾아 준비해야 한다.

신 회장 방에 들어서자 한쪽 화이트보드에 대형 코로나19 상황판이 붙어 있었다. 전국 확진자 현황, 대구·경북 감염병 전담병원 현황 등이 빼곡히 기록돼 있었다. 눈에 띄는 것은 현장에 자원한 간호인력 현황이었다. 지난 3월 한 달 동안 자원한 간호사는 3959명이었다.

60세 안식년을 반납하고 대구로 달려간 김미래씨, 세 아이를 두고 대구 동산병원에 자원했다 확진 판정을 받고 한 달 넘게 전북대 음압병동에 입원 중인 대전 보훈병원 김성덕씨, 신혼의 단꿈도 내려놓고 자원한 전남대 오성훈씨, 태국에서 고국의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단숨에 지원한 김경미씨 등이 그들이다. 부산의 한 간호사는 “2년 전 위암 판정을 받고 치료를 끝냈다. 코로나19의 심각성을 보니 그냥 손놓고 있을 수가 없다. 대구로 가겠다”는 편지를 협회에 보내 협회 사람들을 울리기도 했다.

“간호협회에 회비를 내는 간호사가 21만명입니다. 그중에 4000명 가까이 자원을 했으니 활동 간호사의 2%가 손을 든 겁니다. 아직 불안은 남아 있지만 어쨌든 코로나19를 극복한 것은 이들 2%가 만든 기적입니다. 24시간 환자들 곁에서 전사처럼 싸워준 간호사들이 눈물 나도록 고맙고 자랑스럽습니다.” 신회장의 말이다.

신 회장은 지난 2월 말 대구에서 31번 확진자가 발생한 이후 급박하게 돌아가던 대구·경북 지역을 돌았다. 당시 현장은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거점병원인 동산병원 상황실에 가보니 간호사들이 환자 대응 매뉴얼대로 리허설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백의의 천사가 아니라 백의의 전사들이었다.

“필요한 것은 뭐든 해주자”

“눈이 반짝반짝해서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는데 가만 보니 얼굴이 일회용 반창고 투성이예요. 고글 때문에 피부가 벗겨지고 난리가 아니었어요. 다들 불러놓고 사진이나 찍자고 했죠. 그렇게 찍은 사진이 여기저기 언론에 공개됐어요. 파견 간호사들은 숙소가 나오지만 해당 병원 간호사들은 숙소가 안 나와요. 감염 위험 때문에 집에도 못 가고 바쁘니까 병원 임시숙소에서 잔다고 해요. 숙소를 가 보니 장례식장 조문객 받는 곳에서 이불 깔고 잔다는 겁니다. 큰 방 한가운데서 간호사 두 명이 빵을 먹고 있는데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그나마 국공립병원, 의료원은 사정이 나았다. 미처 준비가 안 된 병원을 가 보니 음압병실도 없는 곳에서 이제 막 면허를 딴 간호사들이 투입돼 일하고 있었다. 방호복이 부족해 2시간이면 땀에 흠뻑 젖는데 3~4시간씩 입고 김밥 먹으면서 버티고 있었다.

“피로누적으로 면역력이 떨어지면 감염 위험이 더 높아질 텐데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어요. 제일 시급한 것이 뭐냐고 물어 보니 마스크가 부족하다고 그래요. 서울 올라오자마자 마스크 1만개를 사서 대구·경북 지역에 내려보내고 보건복지부에 부탁해서 또 1만개를 보냈어요.”

그뿐만이 아니다. 고글 착용으로 생긴 상처를 위해 상처치료용 밴드(습윤드레싱밴드)를 사서 보내고, 매일 메뉴를 바꿔가며 간식을 배달했다. 수술복 800여벌을 보내고 부족한 물품들을 해결해줬다. 필요한 것은 뭐든 해주자는 생각으로 협회가 벌인 성금 운동에 후원금이 쏟아졌다.

백의의 전사들을 위한 후방 지원부대 역할에 전력해온 협회는 ‘국제간호사의 날’ 행사는 축소했다. 올해는 나이팅게일 탄생 200주년에다 세계간호사의 해인 만큼 특별한 축제가 기대됐지만 코로나19 사태로 전부 온라인 행사로 대체됐다. 이날 코로나19와의 전쟁에서 사투를 벌인 간호사들 중 ‘간호 영웅’을 선정해 발표한다. 이번 사태로 국민들에게 간호사의 역할에 대한 인식을 확실히 심어줬지만 신 회장은 앞으로가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앞으로 전염병은 더 자주 옵니다. 코로나19 사태에서 공부한 것을 바탕으로 지금 준비해야 합니다. 간호사는 24시간 환자의 곁을 지키는 국민 생명의 보루입니다. 그들이 제대로 일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국민 생명을 지키는 일입니다. 이 기회에 확실한 체계를 구축해야 합니다.”

제2의 코로나19 사태를 준비해야

신 회장이 꼽은 간호계 현안 중 첫 번째는 간호사의 근로환경 개선이다. 우리나라 간호면허증 소지자는 40여만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1위이다. 그러나 활동 간호사는 21만여명에 불과하다. 일을 못 견뎌서 그만두거나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특히 임신해서 근무할 수 있는 ‘모성보호’ 환경이 전혀 갖춰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현행법대로면 간호사 2명당 환자 5명을 보게 돼 있습니다. 3교대와 휴가를 감안하면 1명당 12명이 나옵니다. 그나마 법대로 지켜지면 다행이지만 대부분 20명에서 많게는 50명까지 보는 곳도 있습니다. 살인적 노동입니다. 벌금이 낮다 보니 법도 소용이 없습니다.”

병원 표준화 시스템도 시급한 과제다. 예를 들면 의사의 경우 ‘요양급여 적정성 평가 항목’이 표준화돼 있어서 약물, 장비, 검사 등에 대한 용어나 매뉴얼이 어느 병원이나 동일하다. 그런데 간호사의 경우 표준화가 돼 있지 않다 보니 병원마다 용어부터 제각각이다. 이번처럼 비상사태로 파견 간호사가 지원을 나가도 시스템 적용하느라 정작 간호 업무에 투입하기 힘든 상황이다.

신 회장은 감염병 전담간호사 도입도 제안했다. 전문 인력을 만들어 상시 전담 체계를 만들어놓으면 비상사태 때 즉각 대응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특히 감염에 취약한 요양시설은 감염 전문 인력을 의무화해야 한다고 했다.

신 회장은 의료원 등 국공립병원의 경우 1등급 기준의 간호 인력 확보도 필요하다고 했다. 여유 인력을 확보하고 평상시에 전 직원을 대상으로 감염관리 교육을 하면 어떤 전염병이 와도 대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 간호사들의 ‘모성보호’도 가능하다. 여유 인력이 있으니 다른 사람에게 일의 부담을 주지 않고도 출산휴가나 육아휴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신 회장은 이 모든 문제의 키는 ‘간호법 개정’이라고 말했다. 70년 된 낡은 의료법으로는 더 이상 간호사의 활동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요즘 코로나19의 숨은 영웅 간호사들에게 응원이 쏟아지고 있다. 의료진을 위한 ‘덕분에 챌린지’ 프로젝트가 이어지고 협회에는 간호사들에게 보낸 감사편지가 쏟아진다. 신 회장은 지금 간호사들에게 보내는 응원을 간호계의 오랜 숙원인 간호법 개정에 모아달라고 부탁했다.

황은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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