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한 대형병원 간호사인 A씨는 1년 전부터 한 가지 버릇이 생겼다. 시간이 날 때마다 주변을 둘러보는 버릇이다. 지난해 늦여름, 한 50대 남성 B씨가 A씨가 근무하는 곳으로 진료를 받으러 오면서 시작된 일이다.

“솔직히 그분이 진료받았던 일이 기억이 안 나요. 하루에도 수백 명 환자를 보는 입장에서 어느 한 환자만을 차별 대우하는 일은 없죠. 그런데 그분은 제가 자신을 특별 대우 해줬다고 생각하시더라고요. 한 달에 한 번씩 진료를 받으러 올 때마다 ‘나 기억 안 나느냐’면서 계속 말을 걸어왔어요.”

겨울 무렵부터 B씨는 A씨에게 ‘선물’을 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과자 같은 것을 줬었는데 나중에는 목도리를 주더라고요. 과자든 목도리든 받을 수 없다고 딱 잘라 안 받았는데 그 이후로는 편지를 한 움큼씩 써서 놓고 가기 시작했어요.”

B씨는 간호사 A씨에게 편지를 전해주기 위해 수시로 병원을 찾았다. 그러고는 환자 대기석에 앉아 A씨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심할 때는 거의 매일, 이틀에 한 번씩 나타나 저를 빤히 쳐다보곤 했어요. 언젠가부터는 제 근무 패턴까지 파악한 것 같더라고요. 제가 ‘오프’면 B씨도 오지 않는다고 해요.”

지난 3월부터는 A씨가 자취하는 오피스텔 건물까지 따라오기 시작했다.

“경찰에 신고해 봤자 소용없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싶어서 경찰에 신고해 봤어요. 하지만 출동한 경찰관 분들이 정말 안타까워하면서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어서 속상하다’고 하더군요. 순찰을 더 많이 돌겠다고는 했지만 제 퇴근시간마다 순찰을 돌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결국 A씨는 자취하던 오피스텔을 떠나 대중교통으로 1시간 반 거리에 있는 부모님 집으로 돌아갔다.

“많이 알아봤는데 그분이 저를 따라다니기만 하는 상황에서는 저에게 도움이 되는 어떤 방법도 없더군요. 그분이 병원에 오는 날이면 근무시간을 조정해달라고 동료들에게 부탁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방법이 없다’고 말하는 A씨의 말은 사실이다. 스토킹 범죄를 당하더라도 피해자가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다. 법적 조치를 취할 수 있게 된 것도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2013년에 들어서야 개정된 경범죄처벌법 제3조 1항 41호에 ‘지속적 괴롭힘’ 항목이 추가됐다. 여기에서 말하는 지속적 괴롭힘을 저지르는 사람이란 ‘상대방의 명시적 의사에 반하여 지속적으로 접근을 시도하여 면회 또는 교제를 요구하거나 지켜보기, 따라다니기, 잠복하여 기다리기 등의 행위를 반복하여 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이 경우 ‘10만원 이하의 벌금, 구류 또는 과료의 형’에 처할 수 있다. 동일한 형에 처할 수 있는 ‘경범죄’로는 물품강매·호객행위, 광고물 무단부착, 노상방뇨, 구걸행위 같은 것들이 있다.

스토킹 범죄 평균 벌금액 9만4000원

실제 통계를 보자. 스토킹 범죄를 처벌할 수 있게 된 2013년에는 검거 건수가 312건이었다. 6년 뒤인 2019년에는 배 가까이 늘어 583건이 되었다. 신고 건수 5466건의 10%도 되지 않는 수치다.

처벌은 미미하다. 2013년부터 지난해까지 8년간 스토킹 범죄로 처벌받은 사람이 낸 평균 벌금액은 10만3000여원에 불과하다. 그마저도 지난해만 따지고 보면 평균 9만4000원만을 냈다.

이러니 스토킹 범죄 피해자들은 자구책을 마련할 수밖에 없다. 지난 5월 15일 프로바둑기사 조혜연 9단을 1년 넘게 스토킹한 혐의로 구속기소된 C씨의 사례는 스토킹 피해자인 조씨가 직접 이끌어낸 결과다. 조씨는 지난 4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을 통해 직접 피해 사실을 알렸다. ‘흉악한 스토커를 두려워하는 대한민국 삼십대 미혼여성입니다’라는 글에서 조씨는 이미 세 차례 스토킹 가해자를 경찰에 신고했지만, 벌금 5만원을 처분받는 데 그쳤다며 강력한 처벌을 요구했다.

원래대로라면 가해자 C씨에 대한 처벌은 조씨가 이미 밝힌 바처럼 경범죄처벌법에 의해 가벼운 벌금형으로 그쳐 다른 스토킹 범죄처럼 피해가 지속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씨의 청원이 화제가 되자 경찰은 C씨를 긴급체포했고 검찰은 C씨의 스토킹 행위를 적극적으로 해석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C씨의 스토킹 행위 중 ‘신고에 대한 보복 행위’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발견한 것이다. 경범죄처벌법보다 법정형이 무거운 특정범죄가중처벌법 등에 관한 법률을 적용하고 나서야 C씨의 스토킹이 멈췄다. 검찰은 이를 두고 “현재의 법령으로는 ‘경범죄처벌법’만 적용돼 피해자가 신고를 꺼리고 가해자에 대한 적절한 처벌도 어려운 상황”이라며 “스토킹처벌법이 조속히 제정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스토킹 범죄에 취약한 여성 1인가구

스토킹 범죄는 단순히 정신적 스트레스만을 주는 범죄가 아니다. 매우 다양한 유형의 피해를 이끌어내는 데다 피해자 본인을 비롯해 주변에까지 영향을 주는 복합적인 범죄다.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처장이 2017년과 2018년 상반기 한국여성의전화 상담 사례를 종합해 조사해본 결과 스토킹 범죄의 피해는 정서적 폭력부터 신체적·성적·경제적 폭력까지 광범위하게 드러났다. 폭언과 협박, 감시와 공포감 조성은 아주 흔한 피해 유형이다. 주변인을 위협하기도 하고, 폭력을 휘두르며 피해자를 납치·감금한 사례도 많다. 강간이나 성추행 같은 성적 폭력이나 돈을 갈취하고 빚을 지우는 일도 상당수 있었다. 그로 인해 피해자들은 대인관계가 단절되고 학교·직장 생활을 이어나가지 못하게 되거나 아예 상해를 입는 경우도 많았다.

스토킹 범죄는 다른 범죄의 단초가 되기도 한다. 한민경 한국형사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이 연구한 바에 따르면 스토킹 피해 경험이 있는 경우 성폭력 범죄 피해가 발생할 위험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13배나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 2018년 10월에 서울 강서구에서 전 남편 김종선에 의해 살해당한 D씨는 스토킹 범죄의 피해자였다. D씨는 25년 동안 결혼생활 내내 가정폭력에 시달리다가 2014년 김종선과 이혼했다. 이후 4년 동안 김종선은 D씨를 끈질기게 스토킹했다. 법원으로부터 받은 접근금지명령도 소용이 없었다. 김종선은 D씨의 차량에 GPS(위치정보시스템) 탐지장치까지 달아가며 스토킹하다 결국 D씨를 살해했다.

2019년 4월 경상남도 진주에서 일어난 방화·살인 사건, 일명 ‘안인득 사건’에도 스토킹 범죄가 얽혀 있었다. 안인득에게 목숨을 잃은 고등학생 E씨는 안인득의 스토킹에 시달리다 못해 집 앞에 CCTV를 설치하기도 했다. E씨와 E씨 가족은 안인득을 여러 차례 경찰에 신고하기도 했지만 소용없었다. 실제 상해를 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건을 접수하는 것조차 반려당하고 한 달 후 안인득은 E씨를 비롯해 5명을 살해했다.

특히 스토킹 범죄가 위험한 이유는 스토킹 범죄 최대 피해자인 청년여성(20~39세) 1인가구가 날로 늘어가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청년여성 1인가구가 겪는 취약한 안전 문제는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돼 왔다. 그중에서도 주거 문제는 스토킹 범죄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상당수의 청년여성 1인가구는 ‘덜 안전한 곳’에 거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통계청의 자료에 따르면 청년여성 1인가구 중 주택 이외의 거처에 사는 가구 수만 18만가구에 달한다.

지난해 5월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서 벌어진 사건이 주목을 받은 적이 있었다. 한 30대 남성이 귀가하던 여성을 쫓아가 여성이 거주하던 건물까지 따라 들어갔다가 CCTV 녹화 영상을 통해 피해자가 이를 알리면서 체포됐던 사건이다. 강지현 울산대 경찰학과 교수가 발표한 논문 ‘1인가구의 범죄 피해에 관한 연구’를 보면 33세 이하 청년 1인가구는 성인 1인가구나 65세 이상 노인 1인가구에 비해 범죄 피해율이 확연히 높았다. 그중에서도 청년여성 1인가구가 범죄 피해를 당할 가능성은 청년남성에 비해 2배 높게 나타났다.

스토킹 범죄 유형 열거가 필요

스토킹 범죄의 심각성을 몰랐던 것이 아니다. 오래전부터 스토킹 범죄를 강력히 선제적으로 처벌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돼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돼 왔다. 첫 움직임은 1999년 15대 국회에서 있었다. 김병태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의원 등 의원 13명이 ‘스토킹 처벌에 관한 특례법안’을 발의했지만 별 소득 없이 폐기됐다. 이후 스토킹처벌법은 16대·17대·18대 국회에서도 1건씩 발의되었고 19대 국회에서는 3건, 지난 5월 29일에 임기를 마친 20대 국회에서는 5건이나 발의되었지만 모두 국회 문턱을 넘어서지 못했다. 21년간 12개의 법안이 발의되기만 했을 뿐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한 것이다.

외국의 사례를 보면 스토킹처벌법이 제정되고 시행되더라도 시행착오를 거쳐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 번째 문제는 스토킹 범죄를 무엇으로 정의할 것이냐는 부분이다. 심영주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초빙교수는 “어떤 것이 범죄행위가 될 수 있는지 법률상 명확히 밝혀야 하는 ‘죄형법정주의’ 원칙에 따르면 스토킹처벌법에서는 스토킹 범죄의 유형을 열거하는 것이 필요하다”면서도 스토킹 범죄의 유형이 광범위하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스토킹 범죄 유형도 다양하게 진화하는 만큼 ‘그 밖의 행위’ 같은 조항을 넣어 해석의 여지를 두자는 것이다. 2000년 ‘스토커 행위 등 규제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한 일본이나 2007년부터 형법상 스토킹 범죄를 처벌하는 근거를 마련한 독일에서도 스토킹 범죄 유형을 명확히 규정하기 위해 여러 차례 개정이 이뤄졌던 것을 보면 그렇다.

스토킹 범죄를 정의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은 실효성 있는 ‘응급조치’를 취하는 것이다. 심영주 교수는 “스토킹 범죄의 특성상 ‘예방’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고 말했다. 스토킹 범죄의 끝이 많은 강력 범죄와 맞닿아 있는 만큼 스토킹처벌법의 목적은 스토킹 범죄가 더 진행되는 것을 막는 일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스토킹 범죄 피해자는 구체적인 피해 사실이 없는 이상 처벌할 수 없다는 말만 들어야 했다. 만약 스토킹처벌법에 적극적인 응급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규정해둔다면 스토킹 범죄 피해 신고가 접수됐을 때, 가해자와 피해자를 분리하거나 곧바로 접근금지명령을 내리고 피해자를 시설 등에 보호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할 수도 있다.

상당수의 스토킹 범죄가 친밀한 관계의 가해자로부터 이뤄진다는 사실 때문에 피해자의 의사에 반해 처벌할 수 없다는 ‘반의사불벌죄’ 조항은 삭제돼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성범죄와 마찬가지로 스토킹 범죄 또한 성별 권력의 영향을 많이 받는 범죄이기 때문이다. 스토킹처벌법이 보호하는 피해자의 범위를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토론의 여지가 있다. 스토킹 범죄 유형 중에는 피해자의 주변인에게까지 가해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보다 확장된 피해자 범위가 필요하다는 의견이다.

그러나 이런 제안들은 모두 4년마다 한 번씩 떠올랐다가 사라지곤 했다. 스토킹처벌법 제정의 필요성에만 동의하고 실질적인 법 제정은 이뤄지지 않은 채로 21년이 지났다.

김효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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