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東)으로는 북태평양 오오츠크해 연안에서 서(西)로는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인 우랄산맥에 이르기까지, 그 방대한 영역이 고구려 땅이었다.” 엄정한 과학의 소산인 고(古)천문학 지도는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다. 이것을 사실(fact)이라고 받아들여도 되는 걸까?

이전 연재 기사에서 서술한 논리에 따르면 이는 충분히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까 지형·기후·삼림 분포·하천 환경 등 생태학적 조건을 통합해서 고려한다면 말이다. 고구려인의 활동 시기는 기후적으로 봤을 때 온난기였다. 게다가 고구려 영토로 추정될 수 있는 광활한 지역에는 고산지대를 관통해 흐르는 긴 강들이 호수들을 연결고리 삼아 이어져 있었다. 당시의 산에는 지금보다 나무가 무성했고, 따라서 여기서 발현한 강은 수량이 풍부하고 수심이 깊었을 것이다. 큰 배를 만들어 먼 거리를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이다.

박창범 교수의 고대 관측지도와 당시의 지정학적·생태학적 조건을 고려하여 추정해본 전성기의 고구려 영토. ⓒphoto 이진아 제공
박창범 교수의 고대 관측지도와 당시의 지정학적·생태학적 조건을 고려하여 추정해본 전성기의 고구려 영토. ⓒphoto 이진아 제공

박창범 교수의 고대 관측지도와 당시의 지정학적·생태학적 환경 조건을 고려해 전성기의 고구려 영토를 추정하면 사진1에서 주황색으로 표시된 영역이라고 볼 수 있다. 풍부한 삼림 기슭엔 비옥한 땅이 조성되어 사람이 살기 좋았고, 사람들은 서로 연결된 긴 강을 따라 소통하기 쉬웠을 테다. 이 넓은 땅에 많은 인간 집단이 살고 있었을 텐데, 제일 끄트머리에 있는 한반도 북부 출신인 고구려인들이 이 영토의 주인이었다고 말하는 건 억지스러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고구려인들에게는 그들만의 강력한 한 방이 있었다. 바로 ‘흑요석’이다. 흑요석은 유리질의 화산석이다. 투명하게 검고 부드러운 광채가 있어, 예전부터 문학작품에서 여성의 아름다운 검은 눈을 흑요석에 많이 비유했다. 웬만한 금속보다 단단하면서도 가볍고, 가공하기 쉬우면서도 잘 깨지지도 않는다. 그 절단면을 아주 날카롭게도 무디게도 만들 수 있고, 쉽게 변형되거나 부패하지 않는다.

흑요석 원석(왼쪽), 흑요석을 사용하여 만든 도구들(가운데), 흑요석 식기(오른쪽 위), 흑요석 팔찌(오른쪽 아래). ⓒphoto Wikpedia, AboutHistory, Sumerian Shakespeare, Siberian Times
흑요석 원석(왼쪽), 흑요석을 사용하여 만든 도구들(가운데), 흑요석 식기(오른쪽 위), 흑요석 팔찌(오른쪽 아래). ⓒphoto Wikpedia, AboutHistory, Sumerian Shakespeare, Siberian Times

지금은 흑요석이 희귀해져서 고가의 보석으로 여겨지며, 드물긴 하지만 첨단 수술 기계의 날로 쓰이기도 한다. 하지만 까마득한 구석기시대부터 시작해서 철기시대에 들어와서도 상당 기간, 흑요석은 가장 폭넓게 쓰인 원자재였다. 과거 사람들은 흑요석의 날을 날카롭게 세워 무기·농기구·낚시바늘·도끼 등을 만들었으며, 조리용구·식기·장신구·등잔 등 거의 모든 용도로 사용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흑요석은 나오는 곳이 한정되어 있다. 화산이 폭발할 때 형성되는 화산암인데, 흑요석이 만들어지려면 까다로운 조건이 필요하다. 용암의 주성분이 유리질을 많이 포함한 알칼리성 유문암이어야 하고, 뿜어져 나오면서 바로 폭우를 맞던가 해서 급속 냉각이 돼야 한다.

흑요석이 많이 나는 곳의 사람들은 그 덕분에 풍요롭게 살 수 있었다. 흑요석으로 많은 것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원한다면 엄청난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인류가 처음으로 장기적인 무역 네트워크를 만든 것도 흑요석으로 인한 것이란 연구1)도 있다. 기원전 1만 년, 지중해에 ‘배’가 처음 등장한 것도 이탈리아의 사르디니아와 그리스의 멜로스 섬 등에서 나는 흑요석을 나르기 위해서였다. 또 세계에서 가장 먼저 형성된 도시로 알려진 사탈후유크(기원전 7000년 경, 현재 터키 영토)는 흑요석 생산, 가공, 수출 때문에 만들어진 도시였다.

그런데 백두산 인근에 엄청난 규모의 흑요석 광맥이 형성되어 있다. 기원전 9만 년에서 기원전 8만 년까지 약 1만 년 동안, 백두산이 대규모 폭발을 한 시기가 있었다. 지질학자들이 백운봉기 대폭발이라 이름 붙인 이 폭발 당시에 알칼리성 유문암의 용암이 대거 분출됐다. 그 결과 알칼리성 화강암이 산의 대부분 지역을 덮었는데, 동남부 사면에는 대규모 흑요석 광맥이 형성된 것이다. 태평양 쪽에서 오는 습기를 머금은 공기가 백두산 인근의 찬 공기와 부딪쳐서 때맞추어 폭우를 퍼부었던 것일까?

이 광맥은 유라시아 대륙의 아시아 쪽 북쪽 절반, 그러니까 우랄산맥의 동쪽에서 오오츠크해에 이르는 광활한 일대에서 유일한 흑요석 산지다. 지금의 주류 역사학에서는 흑요석이 인류의 문명에서 갖는 의미를 크게 조명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딕슨과 렌퓨 박사팀의 연구처럼 역사학이 과학과 결합한다면, 백두산 인근에 기반을 두어 출발한 고구려가 우랄산맥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과학적인 논거를 댈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해서 고구려의 영역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영역은 지금의 러시아·중국·몽골·카자흐스탄에 걸쳐져 있다. 과거 이 지역의 주인이 한민족이었다 하더라도, 15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충분히 왜곡되고 잊힐 만하며, 다시 그 역사를 복구하기 위한 현지 조사도 쉽지 않을 상황이다. 하지만 한가지 과학적 사실은 분명하다. 이 일대에서 흑요석 산지는 백두산 동남사면 뿐이라는 것 말이다.

만일 고구려가 정말 이 광활한 땅의 주인이었다면, 고구려 사람들은 흑요석의 유일한 생산자로서 갖는 파워를 잘 활용했던 거로 볼 수 있다. 고구려 사람들은 온난기에 잘 형성된 수로(水路)를 따라 쉽게 세를 넓혀 갔을 것이다. 굳이 전쟁을 통해 정복할 필요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흑요석을 갖고 오는 사람들은 어디서나 환영을 받았을 시절이니까.

치우로 추정되는 한나라 때 그림(왼쪽). 당시 기록을 보면 치우는 다양한 무기를 구사하는 신묘한 무술을 갖춘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당 현종 때 고구려 출신 고선지 장군의 원정 루트와 원정대의 상상도(오른쪽). ⓒphoto 위키피디아, CIStoday
치우로 추정되는 한나라 때 그림(왼쪽). 당시 기록을 보면 치우는 다양한 무기를 구사하는 신묘한 무술을 갖춘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당 현종 때 고구려 출신 고선지 장군의 원정 루트와 원정대의 상상도(오른쪽). ⓒphoto 위키피디아, CIStoday

전쟁을 했더라도 문제없었을 것이다. 가볍고 강하며 가공하기 좋은 흑요석은 화살, 창, 칼 등의 무기에서 제일 중요한 날 선 촉을 만드는 최적의 재료였다. 중국의 한족(漢族)이 한반도 사람들을 이족(夷族), 즉 큰 활을 잘 쓰는 사람들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된 연유가 여기 있다. 전설 속에는 중국 대륙에서 전쟁의 신으로 두려움과 동시에 추앙을 받았던 ‘치우(蚩尤)’황제가, 역사 속에서는 실크로드를 평정했던 고구려 출신 고선지 장군의 이름이 남아있다. 이 외에도 이 지역에서는 한민족의 뛰어난 용맹과 전투력을 증언하는 민담들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박창범 교수의 고대 관측지도와 당시의 지정학적·생태학적 조건을 고려하여 추정해본 전성기의 고구려 영토. ⓒphoto 이진아 제공
박창범 교수의 고대 관측지도와 당시의 지정학적·생태학적 조건을 고려하여 추정해본 전성기의 고구려 영토. ⓒphoto 이진아 제공

그리고 박창범 교수의 지도에서 A의 영향권인 카자흐스탄이 고구려의 흔적을 많이 갖고 있다는 사실은 현지와 교류하는 다수의 학자 및 저널리스트에 의해 속속 밝혀지고 있다. 언어구조, 단군 등 신화 모티브들이 고구려의 것과 대단히 유사할 뿐 아니라 고대사회의 군사 편성 시스템도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까지 연구결과 드러났다.

고구려는 막강했다. 하지만 고구려가 한반도 전체의 주인이 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한반도 남부와 서부에 자리 잡은 세력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1) 1968년 미국의 J.E.딕슨과 C.렌퓨 박사 팀이 흑요석 유물의 잔재를 분광분석하는 과학적 연구방식을 통해 밝힌 것이다.

이진아 환경·생명 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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