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칼럼은 앞편과 내용이 이어집니다.

열 개의 태양이 난동을 부리는 혼란을 평정했지만, 그 과정에서 천제의 노여움을 사 하늘나라에서 쫓겨난 예(羿). 지상에 와서도 꾸준히 사악한 존재를 물리치고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치면서 존경을 받으며 살고 있었다. 그에게는 아름다운 아내 항아(姮娥)가 있었지만, 강을 다스리는 신 하백(河伯)의 부인하고 외도했다고도 전해진다.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극복하기 위해, 예는 항아를 서쪽 나라의 여신 서왕모(西王母)에게 보내 불사약을 구한다. 서왕모는 하나를 먹으면 장수하고 두 개를 먹으면 영원히 죽지 않고 살 수 있게 되는 약을 주었다. 그런데 항아는 영생불사할 욕심에 약을 두 개 다 먹고 달나라로 도망간다. 예는 보통 인간처럼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맞아야 했다.

예가 가르친 제자 중 ‘봉몽’이라는 자가 있었다. 무술이 뛰어났지만, 스승의 경지엔 범접하지 못해 불만이던 그는 스승을 죽이고 일인자가 되려는 야심에 차 있었다. 어느 날 예가 날아가는 기러기를 화살로 맞추려고 집중하는 틈을 타서 봉몽은 뒤에서 복숭아나무 몽둥이로 때려죽였다. 사람들은 슬퍼하며 예를 장사지내고 이후 오랫동안 제사를 지내며 섬겼다고 한다.

달나라에 간 항아와 좌절한 예의 모습을 담은 현대의 페이퍼 컷. 출처: Aurélie Beatley 2014
달나라에 간 항아와 좌절한 예의 모습을 담은 현대의 페이퍼 컷. 출처: Aurélie Beatley 2014

오래된 구전 설화에서 한 개인의 행동, 혹은 운명으로 그려지는 얘기는 실제로는 하나의 인간 집단이 겪어온 경험의 총체일 경우가 많다. 대개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의 일생 동안 일어난 일처럼 그려지지만 그게 수십, 수백 년에서 길게는 수만 년에 걸친 긴 세월 동안 진행된 과정이 축약된 것일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그리스 신화의 카드모스 얘기다. 페니키아 왕자 카드모스가 납치된 여동생을 찾으러 서쪽 나라 그리스로 간다. 거기서 여행자의 수호신인 헤르메스 신의 도움으로 우물을 지키는 포악한 용을 퇴치하고, 그 용의 이빨을 땅에 뿌렸더니 땅에서 중무장한 무사들이 솟아난다, 무사들이 저희끼리 싸우다 지치자, 카드모스는 최후로 남은 다섯 명만 데리고 테베라는 도시국가를 건국한다. 카드모스 왕자 한 사람의 행적으로 그려지는 이 이야기는 고대 해양국가 페니키아가 지중해 전체로 퍼져나가는 디아스포라 과정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지난 회에 소개한 ‘예(羿)’ 전설의 전반부도 그렇게 볼 수 있을 것이다. 한반도 거주 민족이 더 북부, 그리고 북서부로 움직여 중국 내륙으로 간 디아스포라의 일면을 보여주는 거라고 말이다. 이 전설의 중반 및 후반부는 그렇게 중국 땅으로 이주한 집단의 흥망성쇠를 보여주는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흥망성쇠가 역동적으로 얽히는 드라마에 남성과 여성의 줄다리기가 빠질 수 없다. 전설의 중반부에는 영웅 ‘예’의 여자들이 등장한다. 서왕모, 항아, 하백의 아내다. 서왕모는 중국 신화의 대표 캐릭터 중 하나다. 중국 북서부 변경지대인 곤륜(쿤룬)산에 살고 있으며, 유명한 복숭아 동산을 갖고 있고, 불사약을 만들 줄 안다. 항아는 예가 지상으로 내려와 만난 아름다운 여인이다. 예가 아내 항아를 서왕모에게 보냈고, 거기서 쉽게 불사약을 얻어왔던 것으로 봐서, 이 여인은 서쪽 산지 지역과 친밀한 관계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어쩌면 그곳 출신일 수도 있다. 하백은 강을 다스리는 신을 말하는데, 바람기가 너무 심해서 그 아내가 슬픔에 빠져 있었을 때 예가 위로해주었다고 한다.

이 여성들과 예가 맺는 관계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이해하려면, 지난 회에 보았던 DNA 분석 지도의 업그레이드 버전을 보는 게 도움이 된다. IBM 연구소와 내셔널지오그래피가 2005년부터 공동으로 조사를 진행하고 있는 제노그래픽 프로젝트에서 최근 발표된 성과다.

두 가지 패턴의 인류 이동 경로를 보여주는 제노그래픽 지도. 노란 선은 미토콘드리아DNA 분석으로 확인된 경로이며, 파란 선은 Y염색체 분석으로 확인된 것. 박스 안은 각 경로가 형성됐던 시기를 표시한다.  출처: IBM Research
두 가지 패턴의 인류 이동 경로를 보여주는 제노그래픽 지도. 노란 선은 미토콘드리아DNA 분석으로 확인된 경로이며, 파란 선은 Y염색체 분석으로 확인된 것. 박스 안은 각 경로가 형성됐던 시기를 표시한다. 출처: IBM Research

이 지도엔 인류의 DNA 경로와 함께 인류 이동 경로가 추가됐다. 파란 선의 경로는 현존 인간의 Y염색체 DNA를 분석해서 확인된 이동 경로다. 새롭게 추가된 노란 선은 현존 인간의 미토콘드리아 DNA를 분석해서 확인된 경로다.

Y염색체는 남자에게만 있는 것이므로, 이를 분석하여 작성한 파란 선은 주로 남자들이 움직여간 노정을 보여준다. 미토콘드리아 DNA는 여자를 통해서 유전되는 것이므로, 노란 선 노정에는 여성들도 적잖이 포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바다와 육지를 모두 거치면서 독자적 노선을 취해 쭉 뻗어가는 파란 선과 달리, 노란 선은 상당 부분 중복되면서 내륙으로, 또 해안을 따라 움직인다.

이 지도를 염두에 두고 예 전설의 중반부를 줌인해보자.

지구자기장 밀도 변화와 예의 혼인 집단  출처: 이진아
지구자기장 밀도 변화와 예의 혼인 집단 출처: 이진아

지난 회에서 보았듯이 약 5만 년 전 지구자기장 격변으로 지구 전체가 살기 힘들어졌을 때 (왼쪽 그래프 붉은 화살표 1번) 중앙아시아에서 동아시아로 이동한 집단이 많았다. 이 중에서 바다로 돌아서 한반도를 거쳐 중국으로 들어온 M174 경로(파란색)의 집단과, 중앙아시아에서 육지로, 쿤룬(곤륜)산맥을 거쳐 중국 내륙으로 온 B 경로(주황색)의 집단이 위 지도 붉은 원 1에서 만나게 된다.

육지로 이동한 B 집단에는 여성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을 테니, 두 집단은 혼인관계를 맺었을 것이라 충분히 추정할 수 있다. 곤륜산의 서왕모와 가까웠던 예의 아내 ‘항아’는 B 집단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두 집단은 결합 후 원 1을 중심으로 더욱 번성하며 원주민 세력을 누르고 새로운 다수파를 형성해갔을 것이다.

아마 그보다 얼마 후의 일이겠지만 예 무리는 더욱 남서쪽으로 진출해 붉은 원 2쯤에서 다른 집단과 만나 혼인관계를 맺으며 세력을 확장해 간 것으로 추정된다. 새로운 인척집단은 서쪽 산지 티베트고원 중앙부에서 중국 서남부에 이르는 F 경로를 따라 유입한 사람들이다. 지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원래는 양쯔강 수원 유역의 티베트고원에서 떠나, 아마도 물줄기를 따라 양쯔강 중류까지 퍼져갔을 것이다. 강의 신 ‘하백’으로 표현되는 집단이며, 하백의 아내는 그 집단의 여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B 집단과 F 집단은 예(M174)를 중심으로, 불편한 동거를 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삼각관계는 이후 항아의 배신과 예의 몰락으로 이어지는 과정에 있어서 구조적인 원인을 제공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 편에 이어서 보기로 한다.

이진아 환경·생명 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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