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에서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위대. ⓒphoto 뉴시스
미국 뉴욕에서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위대. ⓒphoto 뉴시스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이 발생한 지 6개월가량 지났다. 6월 25일 현재 전 세계적으로 약 1000만명의 확진자가 발생했으며, 사망자는 50만명에 근접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희생자가 늘어나면서 사회적 약자 또는 불평등에 대한 문제가 좌파진영에서 제기되고 있다. 특히 영국 런던대학의 가이 스탠딩(Guy Standing) 교수가 제시한 비정규직 근로자나 프리랜서들을 중심으로 하는 ‘프리캐리아(precariat)’ 계층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프리캐리아는 불안정하다는 의미의 ‘프리캐리어스(precarious)’와 마르크스가 제시한 사회주의 혁명을 주도하는 ‘프롤레타리아(proletariat)’를 합성한 용어이다.

프리캐리아는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각종 권리를 보장받는 정규직 노동자들과 달리 직업안정성을 확보하지 못한 비정규직 근로자, 프리랜서, 계약직 근로자, 이민자 등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1970년대 프랑스에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2011년 국제노동기구(ILO)에서 근무했던 영국의 경제학자 가이 스탠딩이 ‘프리캐리아: 새로운 위험한 계층’이라는 책을 내면서 크게 주목을 끌었다. 최근 코로나19 팬데믹이 발생하면서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계층으로 프리캐리아라는 용어가 새삼 주목받고 있다.

2008년 금융위기를 정확히 예측했고 코로나19로 인한 급속한 경기침체를 예상한 미국의 저명한 경제학자인 누리엘 루비니 교수도 최근 독일 슈피겔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의 주가가 코로나19 이전 수준을 회복하고 있지만 경제가 V자형으로 급속하게 회복할 가능성은 없다고 단언하며 프리캐리아 만연 가능성을 강조했다.

프리캐리아=불안정한+프롤레타리아

루비니 교수는 일단 “주식투자자들은 착각에 빠져 있다”고 경고하였다. 미국의 경우 코로나19 사태 직후 수주 만에 4200만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는데 지난 5월에 회복된 것은 240만개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루비니 교수는 2008년 금융위기 당시 미국의 실업률이 10%였지만 이번에는 16~17% 수준이라며 2021년 말까지 경제가 좋아질 가능성은 없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주가지수가 코로나19 이전 수준을 거의 회복한 것을 두고서도 루비니 교수의 평가는 박하다. 그는 “정부가 월스트리트의 대기업, 은행, 기술 기업들이 망하지 않도록 한다. 이들은 인원과 비용을 줄여 생존하는 것은 물론 시장 지배력은 더 강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메인스트리트(Main Street)라고 불리는 중소업체들은 파산하게 된다”는 것이 그의 경고다. “뉴욕에서는 식당이 1초에 한 군데씩 폐업하지만 맥도날드는 생존해 나갈 것”이라는 설명이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 40%는 현금 400달러도 없어서 코로나19 같은 위기가 발생하면 대처할 수가 없다. 루비니 교수는 최근 미국에서 경찰의 체포 과정에서 발생한 흑인 조지 플로이드 사망사건에 대한 항의 시위가 대규모 사태로 발전한 이유는 바로 코로나19로 인해 살기 어려워진 사람들이 대거 참가했기 때문이라며 다음과 같이 진단하였다.

“내가 살고 있는 로어 맨해튼에서 발생한 시위의 참가자들 가운데 4분의 3이 백인이다. 그들 대부분은 청년들이며 도시의 ‘프리캐리아’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프리캐리아는 서비스경제 부문에서 전통적인 노동계층인 프롤레타리아를 대체한 하층계급이다. 프리캐리아는 임시직 근로자, 프리랜서, 시간제 근로자, 계약직 등이며 대부분 대학 졸업자들이다. 이들은 주택임대료와 전화요금을 낼 수 없게 되었으며, 집에 수도와 전기공급도 끊어질 상황에 처했다. 이들에게 올여름은 유난히 길고 더울 것이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피해와 근로 형태 변화에 관해서는 미국 캘리포니아대학의 로버트 라이스 교수도 지적하였다. 민주당 클린턴 행정부 시절 각료를 역임하기도 했던 그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의 노동계층을 4개로 분류하였다. 일단 가장 상층부에는 감염의 위협에 시달리지 않는 원격근무 가능 노동자(Remotes)가 자리한다. 전문·관리·기술 인력 등으로 노트북만으로도 장시간 근무가 가능하며 코로나19 발생 이전과 동일한 임금을 받는다. 이들은 전체 근로자의 35%를 차지한다. 그다음은 의사, 경찰관, 소방관처럼 코로나19 감염에 노출되지만 필수적인 업무를 하는 노동자들(Essentials)이다. 전체 노동자의 30%가량이다. 다음은 코로나19 때문에 실직한 노동자들(Unpaid)로, 식당이나 소매점 등 서비스업에 종사한다. 라이스 교수는 이들의 생계 유지를 위한 긴급자금지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잊힌 노동자들(Forgotten)은 사회적 거리 두기가 불가능한 노숙인과 불법이민자들이다.

그런데 코로나19 감염에 노출되지만 필수적인 업무를 하는 노동자들 중 물품 배달원이나 물류센터 직원 등은 직업안정성이나 임금 측면에서 의사나 경찰관과는 처지가 다르다.

직업 정체성이 없는 프리캐리아

코로나19 사태 이전부터 프리캐리아 계층에 관한 논의를 주도하는 영국의 가이 스탠딩에 따르면 지금 이 노동계층은 모두 5단계로 분류할 수 있다. 가장 상부에는 금권정치를 지배하는 엘리트(elite)가 자리 잡고 있다. 이들은 불로소득을 취하며 엄청난 정치권력을 행사한다. 그 아래에 봉급노동자(salariat)들이 있다. 이들은 고용안정성과 임금 이외에도 회사가 주는 연금, 유급휴가, 의료혜택 등을 누리고 있지만 점차 숫자가 줄어들고 있다. 다음에 숙련공(profician)들이 있다. 고용안정성 자체를 추구하지 않는 이들은 광적으로 돈을 벌지만, ‘번아웃’의 위험성에 직면한다. 그다음에 노동계급의 핵심인 프롤레타리아가 있다. 이들은 노동조합에 가입해 있으며 안정적인 정규직 노동자들이다. 현대의 복지국가는 이들을 위한 것이지만 이들의 숫자 역시 어디서나 줄어들고 있다. 이들의 생활양식이 규범이 되는 사회를 복구해야 할 이유는 없다. 프리캐리아는 이들 프롤레타리아 계층 밑에서 성장하는 중이다.

가이 스탠딩의 주장은 영국의 대처리즘과 미국의 레이거노믹스로 대표되는 이른바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에 뿌리를 두고 있다. 개방적 자유시장에 대한 비전과 함께 시작된 세계자본주의의 초기단계인 1980년대에 새로운 국제 계급인 프리캐리아가 탄생하였다는 것이다. 그 배경에는 세계 노동시장에 20억명에 달하는 노동자를 공급한 중국과 신흥국들이 있다. 이들의 임금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노동자들의 5분의 1 수준이다. 신흥국 노동자들의 생산성이 급성장하면서 OECD 회원국 노동자들의 임금은 하향압력을 받아왔다. 스탠딩은 이로 인해 노동유연성이 강화되고 정보통신기술의 혁명적 발전도 가능해졌지만 생산 및 고용 비용이 가장 낮은 곳으로 재분배되는 일도 가능하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국가 위에 세계적 차원의 계급 구조가 중첩되는 현상이 발생하게 됐다는 것이다. 가이 스탠딩은 프리캐리아가 사회적으로 최하계층은 아니지만, 세계자본주의가 필요로 하는 노동력의 핵심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가이 스탠딩은 프리캐리아를 크게 세 가지 차원으로 정의한다. 첫째, 프리캐리아는 ‘생산’과의 관계가 독특하다. 물론 역사적으로 항상 불안정한 노동자들이 존재해왔다. 또 프리캐리아보다 더 비자발적인 파트타임 근무도 있다. 이밖에 단기계약자, 고용주가 부를 때만 일할 수 있는 제로아워계약(zero-hours contract)자, 인턴, 그리고 우버 운전자들처럼 일반인들을 모아 기업화한 컨시어지 경제(concierge economy) 등 잡다한 형태의 노동이 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점은 프리캐리아는 직업적 정체성이 없다는 사실이라고 가이 스탠딩은 지적한다. 이로 인해 프리캐리아에 속하는 노동자들은 실존적인 불안정에 시달린다. 많은 사람이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고서도 기대보다 못한 직업을 갖게 되는 일이 발생한 것은 역사상 처음이라는 것이다. 프리캐리아는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거나, 보수를 받지 못하는 근무를 많이 해야만 한다. 일터 밖에서, 근무 시간 이외에도 착취당한다. 가이 스탠딩에 따르면, 프리캐리아는 스스로 시간을 통제할 수 없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둘째, 프리캐리아는 수입 구조 측면에서 보면 ‘분배’와의 관계가 독특하다. 프리캐리아는 대부분 현금으로 지급되는 임금에만 의존한다. 노동조합원에게만 부여하는 갖가지 이득은 얻지 못한다. OECD 국가 대부분에서 지난 30년 동안 실질임금은 정체되어왔기 때문에 프리캐리아의 실질임금도 하락했다.

프리캐리아의 사회 내에서의 상향이동 가능성은 줄어들고 하향이동 위험성은 커지고 있다. 게다가 프리캐리아는 빚더미에 시달리고 있다. 수입이 불안정하고 자주 변하기 때문에 이들은 늘 감당할 수 없는 빚을 내야 하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프리캐리아는 가난의 함정에 점점 더 깊이 빠져들어 벗어날 수 없게 된다. 당장 돈을 벌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게 되므로 더 좋은 직장을 구하는 일을 포기하기 십상이다. 요약하면 프리캐리아는 경제적 불확실성 속에서 살아간다. 흔히 만성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지고 살아가며, 사소한 충격이나 질병 때문에 최하계층으로 전락하여 지탄받거나 조기 사망하게 된다.

셋째, 프리캐리아는 ‘국가’와의 관계가 독특하다. 프리캐리아는 역사상 처음으로 문화적·시민적·사회적·경제적·정치적 기득권을 상실하는 계급이다. 프리캐리아는 선의와 자선을 구하고, 권위를 가진 인물들에게 아부하고 간청해야 한다. 인격모독이 아닐 수 없다.

가이 스탠딩이 최근 영국의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에 기고한 글에서 코로나19 팬데믹 이후의 대책으로 전 국민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프리캐리아가 배경이다.

기본소득이 필요해지는 이유

그는 코로나19로 인해 사람들의 경제 생활이 전례없이 급속하게 무너졌으며 이전과 같은 상태로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코로나19 이전에도 “급격히 늘어나는 프리캐리아는 감당할 수 없는 부채에 의지해 살면서도 자신의 처지를 탄원할 수밖에 없는 처지로 전락했다”고 진단한다. 그는 코로나19로 인해 프리캐리아 중에서도 자가격리를 할 수 없어 자신과 타인의 건강을 위험에 빠뜨리게 된 임시직 노동자들의 삶이 가장 불안정해졌다고 우려한다. 또 모든 나라에서 스트레스와 일자리의 불안정성으로 인해 폭력사태가 빈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팬데믹 이후에는 중산층을 위해서도 기본소득제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어차피 일자리는 구하기 어렵다. 구한다 하더라도 일상생활에 필요한 만큼 돈을 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코로나19 이후에는 실업이 증가하고, 불안정한 일자리가 일반화된다. 청년들뿐만 아니라 중산층 전문직 종사자들도 프리캐리아 계층으로 전락하게 된다.… 미래에는 기본소득이 공공도로나 공공도서관처럼 일반화된다. 기본소득이 새로운 경제 현실을 지탱하는 수입분배 구조가 된다. 기본소득은 과도한 불평등도 해소하고 프리캐리아의 협상력도 강화한다.”

그러나 가이 스탠딩은 기본소득을 위한 재원 마련에 대해서는 자본이득세 등을 되풀이해 주장하며, ‘보다 따뜻하고, 보다 공평한… 정의사회(just society) 구현’ 등의 막연한 구호로 마무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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