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안탕강 풍경(좌)과 해안에서 본 저장성의 산지(우) ⓒ출처: facebook, tripadvisor.com
퀴안탕강 풍경(좌)과 해안에서 본 저장성의 산지(우) ⓒ출처: facebook, tripadvisor.com

중국 신화에서 사랑받는 영웅 캐릭터인 ‘예(羿)’는 종종 그리스 신화의 영웅 헤라클레스와 비교된다. 둘 다 출중한 무력과 곧은 성품의 소유자였으며, 여성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둘 다 하늘의 최고 지도자(옥황상제와 제우스의 아내 헤라)에게 밉보여서 갖은 고생을 하게 되는데, 그 고생의 내용은 대부분 인간 세상을 힘들게 만드는 요물과 괴수들을 퇴치하는 것이었다.

두 영웅의 최후에도 공통점이 있다. 사랑했던 아내가 그들 죽음의 원인이었다는 점이다. 헤라클레스는 아내 데이아네이라가 반인반수 넷수스의 흉계를 곧이곧대로 믿어 그의 옷에 독을 칠해 고통스럽게 죽는다. 예의 아내 항아는 남편의 불사약을 독차지해 그를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만든 뒤 달나라로 도망간다.

이번 회에서 조명할 곳은 ‘항아가 달나라로 도망갔다’는 부분이다. 지구와는 수십만 킬로미터 떨어진 우주 공간에 있는 위성, 달에 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옛날 이야기는 과거에 일어난 중요한 일을 기억하기 위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것이라는 점, 또 세월이 흐르는 동안, 혹은 애초부터 어떤 이유 때문에 현실이 상징적으로 표현된다는 점을 앞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항아가 도망간 곳이 실제로는 지상의 장소일 수 있다..

‘달나라’의 현실 속 지명 1순위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월’(越)나라다. 일단 달을 뜻하는 ‘月’과 나라 이름 ‘越’은 읽는 소리가 같다. 한국어에서도 ‘월’이라고 같은 음으로 읽지만, 중국어에서도 ‘위에’(yuè)라는 음으로 읽는다. 그 밖에도 그렇게 추정할 이유가 충분하다.

월나라는 지금 행정지역으로는 저장성(浙江省·절강성)에 해당된다. 거대한 양쯔강 하류 삼각주의 동남쪽 끝 부분에 위치해 있는데, 70% 이상이 해발 수백 미터의 높은 산으로 이뤄졌다. 이 산들은 육지 쪽과 경계를 만들어주고, 여기서 발원하는 퀴안탕강(옛 이름 절강) 역시 물살이 급해 외부의 접근을 차단한다. 바다 쪽으로도 높은 산이 절벽처럼 둘러 있으면서도 산지에서 흘러나온 퇴적물질이 퀴안탕강 하류에 쌓여 비옥한 농토를 이룬다. 때문에 자급자족이 잘 되는 요새와 같은 지형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런 지형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도피처로 많이 이용돼 왔다. 강이나 바다의 물길을 통해 외부의 강력한 집단이 침략해 들어올 때, 원주민이 거기 대항하기 어려우면 산으로 올라가 방어선을 구축하고 폐쇄적으로 살아간다. 그리스 반도의 원주민이 그랬고, 대만의 고산족이 그랬으며, 중국의 소수민족인 먀오족(苗族), 야오족(瑤族)이 다 그런 경우다.

이렇게 요새로 숨어들어가면 상당히 오랜 기간 언어와 생활 방식 등에서 그들만의 특색을 유지하면서 살 수 있는데, 역사적으로 ‘월’이 딱 그런 지역이었다. 월 사람들은 중국의 주류인 한족(漢族)과는 사뭇 다른, 동남아시아 영향이 강한 언어와 풍습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오월동주(吳越同舟·중국 역사에서 오나라와 월나라는 서로 경계를 맞대고 있는 앙숙이었다.오월동주는 오나라사람과 월나라 사람이 한 배를 탔다고 해서,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우리 속담과 같은 뜻을 지닌다. 이 고사성어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월나라는 바로 이웃한 나라들과도 상당히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다. 오나라와 월나라의 관계는 동아시아라는 맥락에서 한반도 거주 집단들이 맺는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주며, 이 부분은 다음 회의 주제가 될 것이다.

항아를 한 여성인 동시에 한 종족 집단을 대표했던 사람으로서 보고 다시 역사를 들여다보자. 그 종족은 오래 전, 아마도 지구환경 격변기에 생존의 돌파구를 찾아 간단한 짐을 이고 지고 줄줄이 동남쪽으로 내려왔다. 거기서 비슷하게 살 길을 찾아 반대편 한반도 쪽에서 온, 상당히 적응력이 강한 남성 위주의 집단을 만나서 서로 혼인관계를 통해 새로운 세력을 형성해서 지금으로부터 약 5만 년 전, 황하 중상류 지방에 정착하게 된다.

이들 집단은 한동안 그렇게 안정되게 살았겠지만, 다시 환경 격변기가 오면서 식량이 부족해졌을 것이다. 이에 따라 남성 중심의 잉여인구가 더 남서쪽으로 나가 살 길을 개척하게 되면서 새로운 집단과의 혼인관계가 형성되기도 하고, 이질적인 집단끼리 공존하며 갈등도 생겨났을 것이다. 강력한 남성중심 집단이 중심을 잡고 있을 때는 이런 갈등은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 중심집단 자체가 흔들리게 되면, 이반 세력이 생겨나게 마련이다.

항아가 달로 올라가 두꺼비가 되는 모습을 표현한 한나라 시대의 부조.
항아가 달로 올라가 두꺼비가 되는 모습을 표현한 한나라 시대의 부조.

이 지역의 중심집단인 ‘예’로 상징되는 무리들은 새로운 세력의 도전을 감당하기 버거워, 서쪽 산지의 인척 집단에게 도움을 청한다. 항아로 상징되는 여성, 혹은 여성집단은 그 도움을 좌지우지하는 위치에 있다. 이들은 고민했을 것이다. 원래 자신들의 인척집단인 ‘예’와의 의리를 지켜 이 불사약(서쪽 산지로부터의 지원)을 그대로 넘겨줄 것이냐, 아니면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는 ‘봉몽’ 집단에게 주어서 훗날의 평안을 도모할 것이냐?

결국 현실적 계산에 따라 움직인 항아는 새로운 집단에게 지원을 넘겨준다. 하지만 남성의 판에 낀 여성은 궁극적으로 이용당하고 버려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스 신화에서 아버지를 배반하고 적국 그리스의 영웅 테세우스를 도왔던 크레타의 공주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가 이끄는 일단이 그리스로 돌아가는 여정 중에 버림을 받는다. 황금양털을 찾는 모험대의 리더였던 이아손을 사랑했던 콜키스의 공주 메데아도 마찬가지. 자기 종족을 곤경에 빠뜨리면서까지 갖은 모험의 여정을 동반하면서 도와주었건만, 결국 남는 것은 미움 받고 버려지는 일뿐이었다.

‘봉몽’이 처음엔 항아의 영원한 안전을 약속했을지 몰라도, 일단 주도권을 장악하고 나자 항아는 눈에 가시 같은 존재가 되기 쉬웠을 것이다. 항아는 ‘예’ 집단의 보복이나 ‘봉몽’ 집단의 핍박을 피할 수 있는 곳, 월나라로 도주했을 것이다. 거기서 원래의 고귀한 신분을 지키지 못하고 두꺼비처럼 천한 존재로 살아가야 했을 가능성이 크다. 예의 설화 속에서 남편을 배신한 항아는 그 죗값으로 아름다운 모습을 잃고 추한 두꺼비로 변해서 달에서 계속 살게 됐다고 전해진다.

짤막한 옛날이야기 하나도 당시의 환경 변화, 지형지리, DNA 구성 등을 고려해서 들여다보면, 긴 세월에 걸쳐 여러 집단의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펼쳐졌던 인간 드라마의 축약본임을 알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항아가 달나라로 도망갔다는 대목은 강과 바다와 같은 물길을 이용해 세력을 확장해가는 집단과, 그에 대한 대응으로 지형지세를 이용해 방어선을 구축하는 집단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이 패턴을 잘 이해하는 것은, 이후 이 시리즈에서 보게 될 한반도의 삼국시대, 혹은 가야를 포함해서 사국시대에 있어서, 각국이 어떤 관계로 존재했는지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이진아 환경·생명 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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