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쯔강. ⓒphoto 픽사베이
양쯔강. ⓒphoto 픽사베이

한국의 고대사, 혹은 그 이전의 상고사(上古史)에는 이상한 점이 많다. 무엇보다 당시의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이 눈에 띈다. 예를 들어 보자. 최근 출토된 가야 유물을 보면 일상에서 사용한 용기에 한자를 새겨 넣은 것들이 있다. 생활용품에 한자를 새겨넣을 정도라면 한자 사용이 꽤 일반화되어 있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당시의 글은 단 한 편도 남아있지 않다.

이 때문일까. 가야는 종종 신화 속 나라로 여겨지곤 한다. 지난 겨울,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은 ‘가야본성’이라는 제목의 가야 유물전시회를 야심차게 기획해 진행했었다. 전시회가 시작되자마자 부정적인 비판이 쏟아져 나왔는데, 그 골자는 “신화를 마치 역사적인 사실인 양 전시했다”는 것이었다. 전시회 주최측은 그런 비판을 수용해 결국 전시회의 내용을 수정했다. 가야를 역사시대 이전에 존재한 ‘옛날 옛적 한반도 남쪽 바닷가에 있었던 작은 왕국’이었던 것처럼 묘사했다.

가야는 신화 시대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 나라일까? 가야 연맹의 리더 격이었던 금관가야의 초대 임금 수로왕은 서기 42년 출생으로 전해진다. 악명 높은 로마의 황제 네로는 서기 37년 생이다. 수로왕보다 5년 먼저 태어난 이 황제의 횡포를 아무도 신화일 뿐이라 치부하지 않으며, 로마제국을 먼 옛날 지중해 바닷가에 있었던 왕국이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이상한 공백은 중국 역사에서도 발견된다. 중국에는 유명한 강이 두 개 있다. 북쪽의 황하, 남쪽의 양쯔강(장강)이다. 양쯔강은 중국에서 가장 긴 강이다. 두 번째로 긴 황하에 비교하면 길이도 1000km 가까이 더 길고, 유역 면적은 거의 두 배에 달한다. 양쯔강 유역은 남쪽에 있어 황하 일대보다 기온도 더 높고, 따라서 과거로부터 중국 대륙의 곡창지대였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큰 강이 이루는 평야가 있는 곳에 사람이 모이고 문명이 발달했다. 최근의 유물 발굴 결과를 종합해보면, 황하에서는 기원전 9500년, 양쯔강에서는 기원전 7000년 무렵부터 인간이 정주했던 흔적이 발견된다. 그렇다고 해서 황하 쪽에서 먼저 문명이 싹텄다고 단정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이건 ‘발굴된’ 유물의 연대일 뿐이다. 기온과 습도가 높은 양쯔강 유역이 물질의 분해가 더 잘 되니까 유물이 오래 존속되기 어려운 조건이며, 과거로부터 사람들이 살아온 곳이라면 그만큼 유물이 망실되기도 쉬울 것이다.

황하(붉은색) 및 양쯔강(녹색) 수계와 각각의 강 유역에서 출토된 기원전 7000년 무렵의 토기. ⓒ이진아 제공
황하(붉은색) 및 양쯔강(녹색) 수계와 각각의 강 유역에서 출토된 기원전 7000년 무렵의 토기. ⓒ이진아 제공

위 지도 속 두 개의 사진은 기원전 7000년 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토기로, 황하와 양쯔강 유역에서 각각 출토된 것이다. 양쯔강 쪽 토기가 많이 훼손되었지만, 황하 유역에서 출토된 것에 기술적으로나 심미적으로나 뒤지지 않는다. 상식적으로 판단해봤을 때, 황하 일대보다 온화한 기후에 넓고 비옥한 토지를 보유한, 게다가 인류 이동 경로에서 출발점에 더 가까운 양쯔강 유역에서 더 일찍 문명이 발달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의외로 이 지역의 상고사 및 고대사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 얼마 안 되는 기록 중에도 이 일대와 거기 사는 사람들은 뭔가 시원치 않은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이 많다. 그래서인지 중국 역사 전문가 중에서도 문명이 제일 먼저 싹튼 것을 황하 유역이며, 양쯔강 유역은 그보다 뒤에 개발되기 시작한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다.

이 시리즈에서는 정치적인 이유로 변형되기 쉬운 글자로 된 기록보다, 그동안 역사에서 별로 주목하지 않았던 환경변화, 지형 등 ‘환경 기록’에 더 무게를 둬왔다. 더불어 고천문학, 유전과학(DNA 분석) 등 사람들이 임의로 개입해 왜곡할 수 없는 자료를 중시했다. 지금까지 이 시리즈에서 새롭게 조명된 내용 가운데, 양쯔강과 관련되는 부분을 추려본 다면 세 가지 정도가 나온다.

첫째, 박창범 한국고등교육원 교수의 지도에서 발견된다. 이 시리즈는 지금까지 고구려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사실 제일 눈에 띄는 것은 상대 신라의 관측지다. 지도의 붉은 화살표가 가리키듯, 그 관측지는 뚜렷하게 양쯔강 중류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떤 상황이었던 걸까?

(왼쪽) 박창범 교수의 고대 일식관측지도가 보여주는 상대 신라의 일식 관측 중심지, (오른쪽) IBM과 내셔널지오그래피가 합작해 만든 게놈지도 위에 표시한 양쯔강 수원지(녹색 원), 월나라 위치(붉은 원) 및 양쯔강 줄기(파란 선). ⓒ이진아 제공
(왼쪽) 박창범 교수의 고대 일식관측지도가 보여주는 상대 신라의 일식 관측 중심지, (오른쪽) IBM과 내셔널지오그래피가 합작해 만든 게놈지도 위에 표시한 양쯔강 수원지(녹색 원), 월나라 위치(붉은 원) 및 양쯔강 줄기(파란 선). ⓒ이진아 제공

둘째, 앞선 연재에서 살펴본 ‘예(羿)’의 전설에서 나오는 종족들의 이동 경로에서 양쯔강은 아주 중요하다. ‘예’ 집단(위의 오른쪽 지도상 M174 표시)과 ‘하백’집단(F 표시)이 마주친 곳은 티베트고원을 조금 벗어난 곳으로, 지금의 칭하이성(省)에 해당되는 지역이다. 오른쪽 지도에서 초록색 원으로 표시된 곳이다. 하백 집단은 중앙아시아에서 티베트고원을 거쳐 양쯔강 수원에서 물줄기(파란 선)를 따라 이동했다. 예 집단이 하백 집단과 만난 뒤, 이들 중 가족을 이루지 않은 남성 중심의 일단은 더 서남쪽으로 뻗어갔겠지만, 서로 결합한 일단은 강 유역을 중심으로 이동했을 것이다. 이 연합 집단은 더 강력해져 양쯔강 일대를 장악했을 것이다.

셋째, 앞선 연재에서 항아가 도망갔던 곳으로 추정했던 월나라, 즉 오른쪽 지도에서 붉은 원에 해당되는 지역으로 가는 길이다. 험난한 지형으로 요새처럼 둘러싸인 월나라에 접근하는 방법 중 가장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것이 양쯔강을 따라 가는 경로다. 양쯔강을 따라 바다로 나가 해안선을 끼고 항저우만(灣)으로 들어와 과거 월나라의 중심지였던 지금의 샤오싱시(市) 쪽으로 가는 것이다. 샤오싱은 물살이 격한 퀴안탕 강에 도착하기 전 바닷가에 있으며 다른 해안과 달리 산으로 둘러싸여 있지도 않다. 월나라 쪽에서 방어선을 치고 쫓아내지만 않는다면 비교적 쉽게 들어갈 수 있었을 법한 곳이다.

월나라처럼 요새와도 같은 험난한 지형은 정착지로 인기 있는 편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인간의 정주 조건에서 최우선순위는 풍부한 삼림을 지닌 산기슭을 따라 강물이 흐르고, 그 강이 운반해주는 퇴적물이 쌓여 평야를 이루는 곳이다. 큰 산지 밑의 길고 수심이 깊은 강일수록 하류에 넓은 평야를 형성해서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리겠지만, 이런 노른자 땅은 그만큼 노리는 인간집단이 많게 마련이다.

5만 년 전 지구환경 격변기에, 서로 다른 방향에서 양쯔강 상류로 접근한 두 집단, 예와 하백은 연합한 후 물길을 따라 하류로 내려가서 원주민을 쫓아버리고 비옥한 평야를 점령했던 것으로 보인다. 원주민이었던 사람들은 양쯔강 하류의 요새 같은 산지로 도피해, 후대 ‘월나라’로 불리게 된 폐쇄적 사회를 만들었을 것이다. 이후 양쯔강 하류 산지의 원주민 집단과 평야의 이주민 집단은 ‘오월동주(吳越同舟)’ 등의 고사성어로 유명한 적대관계로 살았을 것이다. 이런 구도에서 ‘예+하백’ 집단을 배반한 항아가 상당한 인적 및 물적 자원을 갖고 월나라로 갔다면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한반도역사를 다루는 글에 왜 계속 양쯔강 이야기를 하나 생각이 들 수 있다. 그건 양쯔강까지 봐야 한반도를 기반으로 했던 사람들이 움직여간 틀 전체를 정확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후 연재에서 점점 더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양쯔강 유역이 한반도와 특별한 관련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대목은 중국의 역사에서 그 밖에도 더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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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아 환경·생명 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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