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11일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 차려진 고 박원순 서울시장의 시민분향소를 찾은 시민들이 조문을 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지난 7월 11일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 차려진 고 박원순 서울시장의 시민분향소를 찾은 시민들이 조문을 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거대한 권력 앞에서 힘 없고 약한 나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공정하고 평등한 법의 보호를 받고 싶었다. 힘들다고 울부짖고 싶었다.” (지난 7월 13일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행 피해자 입장 발언 중)

“전혀 예상치도 못한 사건으로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 무서웠던 것도 사실이다.” (지난 4월 23일 오거돈 전 부산시장의 성추행 피해자 입장 발언 중)

“시간이 지날수록 권력의 크기를 점점 더 잘 알게 됐다. 그럴수록 두려움도 커졌다. 내가 세상에서 사라질 수도 있겠다는 공포가 그대로 굳어져 갔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성폭행 피해자 김지은씨 저서 ‘김지은입니다’ 본문 중)

여기서 이야기된 ‘공포와 두려움’은 일차적으로 성폭력 피해 트라우마에서 비롯되고 있지만, 그 기저엔 가해자의 권력에 대항할 수 없었던 무력감과 박탈감 등도 자리한다. 피해자를 향한 가해행위는 조직이 규정한 위계 구조 안에서 이뤄졌고 피해자는 가해자의 지위와 권세에 눌려 이를 문제 삼기 어려웠다. 조직은 이를 묵인했고, 가해자는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며 피해자를 세뇌했다. 피해자와 그를 지원하는 법조계, 시민사회계가 말하는 이른바 ‘권력형 성폭력’의 사슬 구조다.

피해자들의 진술과 주장이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이 과거에 남긴 상반된 행적 때문이다. 이들은 1980년대 민주화운동뿐만 아니라 여성 인권 향상에도 앞장서왔던 인물들이다. 특히 지난 7월 10일 성추행 혐의로 피소된 직후 숨진 채 발견된 고 박원순 시장의 경우 1990년대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며 ‘서울대 우 조교 성희롱 사건’을 대리, 성희롱이 명백한 불법행위라는 인식을 최초로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해결을 위한 법적 지원 활동에도 참여했고, 서울시장 역임 당시엔 여성 친화적 정책도 다수 마련했다. 정치적으론 대권주자로까지 촉망받던 그의 성추행 논란은 지자체장들로 한정했을 때 오거돈 전 부산시장, 안희정 전 충남지사에 이은 세 번째 일탈이다.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기엔 그가 죽으면서 사회에 떠넘긴 숙제가 적지 않다.

한국여성변호사회 인권이사인 서혜진 변호사는 “박 전 시장은 결국 최근 4년여간 안 전 지사, 오 전 시장의 미투 사건을 보면서도 이런 범죄를 지속해서 저지른 셈이다. 기득권층, 즉 권력을 지닌 이들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지적했다. 김한균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공적 권력을 지닌 지도층에 한정돼 발생한 일련의 성범죄 사태다. 가해 행태와 사건 진행 과정이 모두 유사하다. 중요 사회현상이다. 사회구조적인 관점에서 이를 들여다봐야 한다”고 평했다. 바꿔 말하면 사건 진상규명, 가해자 처벌로 끝날 문제가 아니라 피해자 보호, 유사 사건 방지를 위해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머리를 맞대야 한다는 말이다.

통제력에 대한 과신과 오판

이를 위해선 우선적으로 사회지도층의 성추문 논란이 ‘왜’ 계속 반복되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 이에 대한 해결책과 대안도 모색할 수 있다. 최근 1~2년에 걸쳐 발생한 일련의 사건을 단편적으로 정의 내리거나 해석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를 ‘리더십의 윤리적 실패’라는 측면에서 바라보면 어느 정도 그 원인과 배경을 가늠해 볼 순 있다. 1993년 미국 비즈니스 윤리저널에 실린 논문 ‘밧세바 신드롬(Bathsheba Syndrome)’은 일부 지도자들의 실패를 도덕성에서 찾은 바 있다. 여기서 언급되는 밧세바 신드롬은 권력층의 윤리적 타락을 통칭하는 용어로 성경 속 다윗왕과 밧세바의 일화에서 그 명칭을 따왔다. 논문은 일부 지도층의 윤리적 실패 사례를 분석, 그 원인을 다음의 4가지로 압축해 제시한다. ‘누구에게도 제약받지 않는 지도층의 권력’ ‘이를 통해 모든 걸 은폐할 수 있을 거란 오판’ ‘정보 또는 사람에 대한 특권적인 접근 가능성’ ‘개인적·조직적 성공이 주는 만족감으로 인한 본연의 목표 상실’.

20여년 전에 나온 분석이지만 지금의 지자체장이 갖는 권한 등을 고려했을 때 이를 현 사태에 대입해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은 적지 않다. 김민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본적으로 국내 정치권 인사 등의 권위는 상당한데 그중에서도 지자체장이 갖는 권위는 무소불위에 가깝다. 중앙기구의 경우 여야로 갈려 여러 제도적 장치를 통해 감시와 견제를 지속해서 이어간다. 하지만 지자체장들은 지역에서 사실상 일당 체제를 유지하며 그 어떤 견제도 받지 않는다. 지역 의회 의원들의 권한은 지자체장의 권한과 비교했을 때 그 존재 의미가 미미할 정도로 작다. 견제는 이뤄지지 않는다. 위 분석이 지금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은 거다.”

실제 박 전 시장 등은 피해자의 고소 사실을 미리 파악할 정도로 상당한 정보력과 통제력을 가졌고 피해자는 이로부터 엄청난 공포심을 느꼈다고 진술한다. 다수의 성폭력 피해자를 상담해온 장형윤 경기남부해바라기센터 소장 겸 아주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보통 이런 경우엔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 정보의 불균형이 생기고 피해자는 윗사람이 얼마만큼의 힘과 정보력을 갖는지 파악하지 못하는 데에서 상당한 두려움을 느낀다. 그게 시장, 도지사 등 지자체장일 땐 망상 수준의 공포를 경험한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이런 권력형 성폭력에서 지도자는 자신의 통제력을 과신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일부 사람들은 이번 사태를 두고 ‘성욕구를 그렇게 못 참나?’라고 말한다. 하지만 가해자들은 자기 관리와 사회적 능력이 그 누구보다 뛰어나다. 그렇기에 그 자리까지 오른 거다. 하지만 거기에 도달하며 받아왔던 조직 내 피드백을 통해 ‘내가 이렇게 해도 문제 제기를 못하는구나’를 경험적으로 느꼈고, 그럼 욕구대로 행동해도 문제는 되지 않을 거란 판단이 작용한 거다.”

지난 7월 13일 서울 은평구 한국여성의전화 교육관에서 ‘서울시장에 의한 위력 성추행 사건 기자회견’이 열렸다. 왼쪽부터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처장,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고미경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 김재련 법무법인 온-세상 대표변호사,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 ⓒphoto 뉴시스
지난 7월 13일 서울 은평구 한국여성의전화 교육관에서 ‘서울시장에 의한 위력 성추행 사건 기자회견’이 열렸다. 왼쪽부터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처장,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고미경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 김재련 법무법인 온-세상 대표변호사,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 ⓒphoto 뉴시스

‘위력에 의한 간음’에 대한 둔감함

여기에 이들을 견제, 구속할 수 있는 법적 장치는 미비했고 법원과 사회는 이에 대한 처분 경험이 부족하다 보니 사태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터질 수밖에 없었다. 지도층의 가해행위는 결국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 및 추행’으로 분류되는데 법조계에선 기존 법원 판결 관행과 제도적 결여로 인해 이에 대한 지도층의 경각심이 낮을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한다.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위력에 의한 간음과 추행 여부는 ‘행사된 위력의 내용과 정도’ ‘가해자의 지위·권세의 종류’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 ‘가해행위가 발생한 경위’ ‘구체적 행위 태양(態樣)’ 등을 기준으로 두고 판단한다. 하지만 법원은 판결문에서 이 기준이 어떻게 적용돼 유무죄가 결정되는지는 밝히지 않는다. 남다른 사회적 지위를 누리는 판사가 자의적으로 이를 판단하는 식이다.

앞서의 서혜진 변호사는 “위력 행사와 간음 사이에 어떤 인과관계가 있는지를 들여다보는 식인데 법원은 이를 두루뭉술하게 해석한다. 실제 이에 따라 입건되거나 법적 처분을 받은 경우는 안희정 전 지사의 2심 판결을 빼고는 극히 드물다”고 말했다. 경찰청 범죄 통계에 따르면 2018년 경찰이 전체 1만7943건의 강제추행 범죄 혐의 중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추행으로 검찰에 기소 의견으로 송치한 건수는 323건으로 전체의 1.80%에 불과하다. 전체 강간 범죄 혐의(6087건) 중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 혐의(35건)로 송치한 비율은 0.57%다. 위력에 의한 간음·추행죄를 바라보는 공권력의 시선 자체가 이미 무뎌 있는 셈이다.

위력에 의한 간음·추행죄가 실제 현장에선 유죄를 입증하기 위한 보충적 수단으로 존재하는 측면도 배제할 수 없는 요인이다. 박찬걸 대구가톨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강간이나 강제추행죄를 입증하기 위해선 결국 가해자의 폭행, 협박이 있었음을 보여야 하는데 보통은 피해자, 가해자 둘만 있는 공간에서 범죄가 발생하다 보니 이를 입증하기 어렵다. 이에 유죄 판결을 위해 보충적으로 끌어다 쓰던 게 위력에 의한 간음·추행죄였다. 가해자의 지위, 권세는 사실상 법적 다툼에서의 수단에 불과했다”라고 말했다. 그렇다 보니 실제 위력에 의한 간음·추행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이뤄지기 어려웠고 사회지도층의 자각도 미미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오거돈 전 부산시장(왼쪽)과 안희정 전 충남지사 ⓒphoto 뉴시스
오거돈 전 부산시장(왼쪽)과 안희정 전 충남지사 ⓒphoto 뉴시스

386세대의 도덕적 해이

하지만 이것만으로 최근 발생한 권력형 성폭력의 원인을 모두 설명할 순 없다. 통제력을 과신한 지도층의 오판, 제도적 장치 미비 등 대내외적인 배경을 고려한다 해도 왜 이것이 최근 몇 년 동안 여권 인사들에게서만 발생하느냐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일각에선 지금의 성추문 가해자들이 과거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던 진보 진영, 이른바 386세대를 연결고리로 묶여 있다는 점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386세대는 1980년대 군부정권 타도를 외치며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던 세대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도래하면서 이들은 제도정치권에 편입됐고 그러면서 이들의 존재 정당성은 퇴색, 목표에 대한 재합의가 필요해졌다. 앞서 언급한 밧세바 신드롬과 관련해 ‘노무현 정부의 386정치인들의 도덕적 실패에 대한 연구’로 이들의 변화상을 분석했던 김태승 고려대학교 교수는 “결국 이들은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고 목표를 재설정하는 과정에서 도덕적 해이가 초래됐다”고 평한 바 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례가 2003년 안희정 전 지사의 불법 대선자금 수수 사건이다. 당시 안 전 지사는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가 인정돼 징역 1년의 형기를 채우고 나온 바 있다. 안 전 지사는 자신의 자서전 ‘담금질, 안희정의 새로운 시작’에서 당시를 이렇게 평했다. “대통령 선거를 차떼기에 대항해 쇼핑백으로 장하게 이겼다. 과거 수천억 들어가던 선거를 쇼핑백 수준으로 치렀다는 자부심을 지니고 있다.” ‘집권’이란 변화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저질러야 했던 정당성 있는 과오라는 말인데, 최근 연이어 터진 성추문 논란도 결코 이와 무관하다고 볼 순 없다.

김민전 교수는 386세대를 비롯한 지금의 진보 진영이 띠고 있는 특성도 따져 봐야 한다고 말한다. “진보 진영이자 386세대는 인물을 중심으로 권위주의적인 모습을 보이는 측면이 있다. 때문에 그 인물에 대한 견제가 내부적으로 잘 이뤄지지 않는다.” 여권이 당초 박 전 시장의 성추행 의혹과 거리를 두거나, 피해 당시 박 전 시장의 보좌진이 이를 묵인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나오는 것도 결국 이런 맥락에서 봐야 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오래전부터 박 전 시장과 알고 지내온 진보 진영의 한 원로 인사는 박 전 시장이 자살을 결심하게 된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그는 약자에 대한 감수성이 컸던 사람이었다. 이런 우를 범하면서도 한 번쯤은 번뇌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지금의 이념정치 속에서 책임을 떠맡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고 이는 ‘실패의 원인을 밖에서 찾고 내부에선 책임을 져선 안 된다’는 강박을 보이는 지금의 진보 진영을 떠올리게 한다. 진보 진영은 18대 대선 패배 직후 책임윤리 부재와 함께 지속해서 이런 모습을 보여왔다.”

권력형 성폭력은 ‘부패’로 다뤄야

권력형 성폭력의 폐단을 끊어내기 위해선 사회지도층이 저지른 성범죄에 대한 접근부터 달리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여타 성범죄와 동일선상에 두지 말고 공직자의 ‘부패’ 범주에 포함시켜 대응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들의 추행은 개인의 문제로 볼 수 없거니와, 사적 영역으로 보호해야 할 성적 관계에 공적 권한을 개입시키는 것 자체가 이미 ‘월권’이라는 이유에서다.

김한균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은 “뇌물이나 특혜를 받는 것만이 부패가 아니다. 그 권한이 본래의 영역을 넘어 행사됐다면 성추문 또한 부패다. 해외에선 지도층의 성추문을 이런 식으로 바라본다. 부패는 더 많은 장치를 통해 감시, 감독할 수 있다. 우리나라도 이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현재 영미권에선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죄를 따로 두지 않고 모든 유사 범죄를 강력히 처벌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동의하지 않은 모든 간음을 범죄로 규정, 그 과정에서 폭행이나 협박, 위력행사 여부에 따라 형량을 달리하는 식이다. 국내 법조계에선 이런 측면에서 ‘비동의간음죄’ 신설과 함께 관련 법규를 넓게 해석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서 변호사는 “지도층이 두려워하는 건 형벌보다는 적발 자체다. 이들의 간음행위를 구속, 적발할 수 있는 구성요건을 추가, 구체화할 필요도 있다”고 말했다. 2018년 10월 형법 개정으로 위력간음죄의 형벌은 ‘5년 이하 징역 또는 15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서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으로 상향했는데, 이는 큰 효과를 꾀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20대 국회에서 여야 의원들이 내놓은 대다수의 개정안은 간음죄 구성요건 개정이 아닌 법정형 상향만을 골자로 했기 때문에 핵심에서 비껴났다는 지적도 나온다.

장형윤 소장은 조직문화부터 변화해야 한다고도 말한다. “해외에선 경영인이라 할지라도 사내연애 사실이 적발되면 자리에서 물러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상하 관계에 있는 직원 간 연애가 실제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보이지 않는 가해자의 부적절 행위가 조직 내에서 편애나 특혜로 비치면서 왜곡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그만큼 위력으로 발생할 수 있는 범죄의 여지를 조금도 남기지 않는 것인데, 이런 조직문화가 권력형 성폭력 경계에 첫 출발점이다.”

이런 측면에서 안희정 전 지사를 고발했던 김지은씨가 자신의 저서를 통해 남긴 다음의 말은 국내 다수의 조직 문화를 되돌아보게끔 만든다. “불법과 부정이 횡행했지만 모두가 눈감았다. 그곳에서 조직의 대의와 목적 이외 모든 것은 사사로웠다. 사람도, 인권도, 정의도 그저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작은 것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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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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