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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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재적 가해자’라는 단어는 사회문제 전반에 쓰이는 단어이기는 하지만, 대개는 성범죄와 관련되었을 때 자주 언급된다. 잠재적 가해자라는 말을 들었을 때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낀다. 자신을 향하는 말로 들리기 때문이다. 한 예를 들어 보자. 요즘은 대부분 어른들이 아동에게 ‘동의’ 없이 신체접촉을 하는 일이 없다. 아이가 귀엽다고 엉덩이를 두들기거나 뽀뽀를 하는 것이 옳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때 어른은 아동을 대상으로 한 ‘잠재적 가해자’가 된다. 원래 윤리적인 사람이었든 신체접촉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든 상관없다. 그 상황에서 그 행동이 ‘잠재적 피해자’인 아동의 입장에서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니까 잠재적 가해자라는 말은 개인의 인성을 공격하는 말이 아니다. ‘성범죄를 저지를 만한 사람’이라는 뜻도 아니다. 내가 하는 행동이 의도치 않은 가해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윤리적 의미를 전달하는 단어다. 어떤 상사는 어떤 부하직원에게 잠재적 가해자일 수 있다. 최근에는 그걸 ‘꼰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어떤 비장애인은 장애인에게 잠재적 가해자이기도 하다.

잠재적 가해자라는 단어에 대한 오해는 그 단어를 보이는 그대로 전달받을 때 생겨난다. 누구를 잠재적 가해자라고 부르는 것인지, 그렇게 불러서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인지 따져본다면 오해는 쉽게 풀릴 만하지만 대개는 그 과정을 밟지 않는다.

이처럼 단지 피상적인, 입에서 읊어지는 대로 받아들여지는 단어는 수없이 많다.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 만들어낸 단어일수록 더 그렇다. ‘성인지감수성’이라는 단어가 대표적이다. 이 단어는 종종 조롱의 뉘앙스를 담아 전달되곤 하는데 ‘감수성(sen sitivity)’이라는 말 때문에 그렇다. 얼핏 양성평등 인식을 감성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이 단어는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화두 중 하나다.

무엇을 성인지감수성이라고 할 것인지 명확히 합의된 바는 없지만 몇 가지 정의를 나열할 수는 있다. 사실 성인지감수성이라는 말이 공식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2018년 4월 12일 대법원에서 한 대학이 학생을 성추행한 교수를 해고한 것과 관련해 교수가 징계 결과에 불복해 낸 소송(2017두74702)에 대한 판결을 내리며 처음 법적으로 성인지감수성이라는 용어를 썼다.

“법원이 성희롱 관련 소송의 심리를 할 때에는 그 사건이 발생한 맥락에서 성차별 문제를 이해하고 양성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성인지감수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양성평등기본법 제5조 제1항 참조) 그리하여 우리 사회의 가해자 중심적인 문화와 인식, 구조 등으로 인하여 피해자가 성희롱 사실을 알리고 문제를 삼는 과정에서 오히려 부정적 반응이나 여론, 불이익한 처우 또는 그로 인한 정신적 피해 등에 노출되는 이른바 ‘2차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하여야 한다.”

이 판결문에 따르면 성인지감수성은 법적으로 피해자의 상황과 맥락을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문영화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 논문 ‘성희롱 관련 소송에서 ‘성인지감수성’과 ‘자유심증주의’에 따르면 성인지감수성은 ‘중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성차별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능력, 성차별과 성폭력 문제를 인식하고 양성평등을 실현하고자 하는 힘’을 포괄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문 교수는 성인지감수성은 “단순한 정서적인 차원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밖에서는 페미니스트, 안에서는 성희롱

다시 말하자면 성인지감수성에 대해 얘기하려면 먼저 무엇이 문제인지,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그건 성평등 교육 몇 번, 대화 몇 마디로 길러지는 것이 아니다. 성인지감수성을 기르고자 하는 본인의 노력이 필요하다.

성인지감수성을 갖추는 일은 쉬운 것이 아니다. 내가 자라온 사회가 성차별적 사회라는 사실을 인정하려면 기존의 고정관념을 깨는 과정이 필요하다. ‘남자가 포르노 좀 볼 수 있지’라고 생각하는 ‘일반론’에 대해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왜 남성의 성욕은 반드시 해소되어야 하는 것인지, 그것이 자위행위가 아닌 포르노 시청 행위로 풀어내야 하는 문제인지, 포르노는 어떤 점에서 성차별적 사회를 공고하게 만드는 것인지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찾는 일은 하루아침에 끝나지 않는다.

성인지감수성은 사회를 비판하는 데서 그쳐서는 안 된다.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이 필수적으로 동반되어야 한다. 내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바가 성차별적 사회에서 고정관념으로 굳어진 결과물이 아닌 것인지 관찰하고 반성하는 일이다.

심지어 성인지감수성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100년 전의 성인지감수성은 여성 참정권의 문제에 머물러 있었다. ‘감히 여성이’ 투표권을 행사하려 한다는 차별적인 시선에 맞서 무엇이 문제인지를 인식하고 해결하려고 노력했던 높은 성인지감수성을 갖춘 여성들은 혹독한 탄압을 당했다. 불과 20년 전만 하더라도 성범죄는 ‘정조에 관한 죄’라는 이름의 법률을 근거로 처벌받았다. 가사노동이 여성의 몫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도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이를 고려해본다면 성인지감수성은 끊임없는 성찰과 자기반성을 통해서 지속될 수 있는 능력이다. 남녀의 격차가 따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이 성인지감수성을 단어로만 습득했을 때 생겨난다. 한국 사회가 아직 성차별적 상황에 놓여 있으니 이런저런 해결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다. 꼭 지난한 부정(否定)의 시간을 거치지 않더라도 그럴 듯하게 성인지감수성을 갖춘 것처럼 흉내 내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리고 상당히 많은 사람이 사회구조를 들여다보고 나 자신의 언동을 반성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로 대강의 성인지감수성을 두르고 살아간다.

이렇게 대강 갖추기만 한 성인지감수성은 상황에 따라 농도를 달리한다. 다른 가치가 성인지감수성에 우선할 때도 있다. 집단 내에서 일어난 성폭력 사건을 두고도 “해일이 일고 있는데 조개 줍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때로는 단어의 뜻을 상황에 맞게 가져다 쓰는 경우도 있다. ‘2차 가해’ 혹은 ‘2차 피해’는 단순히 피해자를 괴롭히는 일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피해자가 당한 피해가 어떤 것인지 왜 그것이 피해자에게 상처가 되었는지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거꾸로 고 박원순 서울시장의 죽음이 “2차 가해 등을 방지하기 위해 죽음으로서 답한 것”이라는 윤준병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발언이 일부 시민에게 용납된 이유는 피해와 성차별적 상황에 대한 성인지감수성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말뿐인 성인지감수성을 두르고 살아가다 보면 스스로에게는 무딘 감수성을 발휘하는 경우도 있다. “성평등을 향해 함께 행동하자”고 공개적으로 발언하며 페미니스트를 자처했음에도 불구하고 부하직원을 상대로 성폭력을 저지를 수 있었던 이유다. 페미니스트 운동가로 활동 중이던 사회운동가가 상습적인 데이트 폭력을 저질러 구설수에 오른 일도 마찬가지다. 밖에 나가서는 미투 운동을 찬성하고 성범죄에 대한 갖가지 대책을 마련하면서도 돌아서서 성희롱을 할 수 있는 이유가 궁금하다면, 그건 겉으로만 습득된 성인지감수성의 문제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거슬러 올라가자면 단어만 가져다 쓰는 얄팍한 성인지감수성의 원인은, 빠르게 변화하는 한국 사회의 양성평등 기조를 깊이 있게 이해하지 못하고 겉으로만 따라잡으려는 데서 나타나는 일일 것이다. 양성평등 문제는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잠재적 가해자라는 단어에 거부감을 느끼면서 사적 영역에서는 성차별적 언어를 내뱉기도 하는 모순적인 모습은 이 많은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왜 필요한 것인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겨난다. 성인지감수성, 잠재적 가해자, 2차 가해 같은 단어가 익숙해져 더 피상적으로 느껴지기 전에 진짜 의미를 생각해보고 사회와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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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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