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박원순 서울시장의 영정사진과 위패가 지난 7월 13일 서울 서초구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을 마친 뒤 박 시장의 고향인 경남 창녕으로 이동하기 위해 운구차로 옮겨지고 있다. ⓒphoto 연합
고 박원순 서울시장의 영정사진과 위패가 지난 7월 13일 서울 서초구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을 마친 뒤 박 시장의 고향인 경남 창녕으로 이동하기 위해 운구차로 옮겨지고 있다. ⓒphoto 연합

“삶을 포기할 정도로 자신에 대해 가혹하고 엄격한 그대가 원망스럽기만 하다. 노무현 대통령, 노회찬 의원이 떠날 때 허하게 뚫려버린 가슴이 다시 아파온다. 남은 생의 기간, 나 역시 가슴에 블랙홀 세 개를 간직하고 살게 될 듯하다.”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이 박원순 서울시장의 죽음에 남긴 글이다.

조희연의 글은 파장을 낳았다. 자신에게 가혹하고 엄격했다면, 살아서 죗값을 치러야 하는 것 아니냐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민변 출신의 권경애 변호사는 박원순 시장 실종 후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박 시장이 살아서 돌아오지 않으면 그를 용서하기 힘들 것 같다”며 “피해자가 자신이 함부로 취급당했다는 무력감에서 벗어나고 치유될 기회도 주지 않고, 이제 명망 높은 정치인을 죽음에 이르게 한 몹쓸 여자라는 낙인, 아니 낙인 없이도 벗어나기 힘든 자책의 수렁에 빠뜨려 헤어나올 수 없게 만들다니”라고 질타했다. 이어 “당신 자신뿐 아니라 피해자의 남은 삶도 가져가는 무책임한 도피로 책임이 덮어질 것 같았던가”라고 반문한 뒤 “살아 돌아와서 죗값을 치르고 참회하길 바란다”고 했다.

민주노동당에서 활동한 바 있는 목수정 작가는 “덮어놓고 추모하고 명복을 빌 뿐, 그들이 서둘러 떠나가야 했던 이유를 집요하게 추적하지 않는 건, 지금껏 우리가 반복해왔던 일”이라고 지적한 후 “사회적 존재의 자연스럽지 않은 죽음엔 남은 사람들이 나누어 새겨야 할 사회적 메시지가 있는 법”이라며 “또다시 ‘어차피 떠난 사람, 유족의 뜻’ 운운하며 서둘러 사건을 덮는 과오를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다.

애도와 추모는 죽은 자에 대한 산 자의 예의다. 도덕적으로 금기시되는 자살을 한 경우에도 애달파하며 죽은 자의 명예를 지켜주고자 하는 게 한(恨)의 문화를 중시하는 한국 사회의 일반적 정서다. 죽기 전 문제를 일으켰더라도 사자(死者) 명예훼손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분위기에 휩쓸려 일체의 합리적 의문 제기와 진실 공방은 가로막힌다.

그래서일까. 언제부턴가 살아서 견디는 것보다 죽어서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길을 택하는 유력 인사들이 나오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유서에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밖에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고 쓴 뒤 세상을 하직하였다. 노회찬 전 의원은 유서에서 드루킹 측으로부터 4000만원을 받은 사실을 인정한 뒤 “누굴 원망하랴. 참으로 어리석은 선택이었으며 부끄러운 판단이었다. 잘못이 크고 책임이 무겁다. 법정형으로도 당의 징계로도 부족하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람들은 노무현과 노회찬의 죽음에 애달파했다. 대대적인 추모의 물결이 일었고, 그들의 이름값은 더욱 치솟았다. 여기서 한번 따져보자. 그들이 만약 살아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수사와 재판의 고초를 겪었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대중의 손가락질을 받아 명예가 실추되었을 것이다. 평생 쌓아온 것들이 일순간에 무너지고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는 연옥의 고통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게 뭔가. 살아서 고통을 감내하는 것보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되고 명예도 지킬 수 있는 ‘영리한 선택’이란 말인가. 이처럼 죽으면 모든 걸 덮어주는 문화는 오히려 유력 인사들의 도피성 자살을 부추기는 요인이 되고 있다. 만약 노무현과 노회찬의 사례(?)를 접하지 않았다면, 박원순은 과연 극단적 선택을 했을까. 민주당은 안희정과 오거돈 사건 당시 사용하던 피해자란 표현 대신 피해 호소인이라는 생경한 말을 들고나왔는데, 그 이유에 대해 “법적 자기방어를 할 가해자가 없기 때문에 ‘피해 호소인’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이 역시 자살이 ‘탁월한 선택’이었음을 보여주는 증표가 아닌가.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지난 7월 10일 ‘과거를 기억할 수 없는 사람은 그 잘못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는 제목의 성명에서 “박 시장은 과거를 기억하고, 말하기와 듣기에 동참하여, 진실에 직면하고 잘못을 바로잡는 길에 무수히 참여해왔지만, 본인은 그 길을 닫는 선택을 했다”며 “지난 7월 8일 박 시장은 서울시청 여성 직원에 대한 성추행 등으로 고소됐고, 이에 대한 조사와 수사 협조를 해야 할 시간이었다”라고 밝혔다.

박원순 자살이 앞선 노무현, 노회찬의 경우와 다른 점도 주목해야 한다. 노무현, 노회찬은 자신의 죽음으로 억울한 피해자를 만들어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박원순의 경우는 다르다. 피해자는 “법치국가 대한민국에서 법의 심판을 받고 인간적인 사과를 받고 싶었습니다. 용기를 내어 고소장을 접수하고 밤새 조사를 받은 날, 저의 존엄성을 해쳤던 분께서 스스로 인간의 존엄을 내려놓았습니다”라고 입장을 밝혔다. 피해자는 여당 극렬 지지자들로부터 차마 입에 담기조차 힘든 수준의 2차 가해를 당하고 있다.

박원순이 남긴 유서는 노회찬의 유서와 극명히 대비된다. 자신의 과오를 솔직히 인정하고 정의당원과 국민에게 사죄한 노회찬과 달리, 박원순은 유서 어디에서도 자신의 책임을 언급하지 않았다. 노회찬은 법정형으로도 당의 징계로도 부족하기 때문에 스스로 자살이라는 처벌을 내린다고 했지만, 박원순은 자신이 왜 극단적 선택을 하는지에 대해 적지 않았다. 결코 책임 있는 공인의 자세라 할 수 없다. 자신을 세 번이나 시장으로 선택해 준 서울시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지켰어야 했다.

박원순은 인권변호사로, 시민운동가로, 서울시장으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가 남긴 긍정적 유산은 그것대로 평가해주는 것이 맞다. 고인의 명복을 비는 것 또한 필요하다. 그러나 그의 죽음을 강압수사 논란이 컸던 노무현 전 대통령 사건이나 유서를 통해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사과한 노회찬 전 의원의 사건과 동일선상에서 바라보는 것은 잘못이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다. 유명인의 자살은 ‘베르테르 효과’에 의한 모방 자살을 부른다. 자살을 권하는 사회는 정신적으로 무너진 사회다. 일각에서는 자살도 인간의 자유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삶의 마감 방식이라 주장한다. 연명치료를 받지 않고 존엄사를 택하는 것처럼 삶에 대한 의지와 능력을 상실했을 때 택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백번 양보하여 그 같은 주장에 일리가 있다 하더라도 박원순의 선택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피해자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고, 행정 공백과 보궐선거라는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유발했기 때문이다. 책임회피성 자살은 추모의 대상이 아니다.

신지호 평론가·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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