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연구하기 전에 역사가를 연구하라.”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명저로 유명한 영국의 역사학자 E.H.카의 말이다. 카는 역사기록이란 기록을 남기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다르게 쓰일 수 있다고 말했다. 역사기록을 보고 과거의 상황들을 이해하려 한다면, 먼저 어떤 사람이 어떤 맥락에서 그 기록을 남겼는지를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역사인식 위에 환경사적인 관점을 더해 중국 역사서 ‘삼국지’를 살펴보면 한반도와 관련해 흥미로운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중국 삼국시대 최전성기의 판도와 당시 한반도 국가들 지도. ⓒphoto 이진아 제공
중국 삼국시대 최전성기의 판도와 당시 한반도 국가들 지도. ⓒphoto 이진아 제공

중국의 삼국시대란 서기 200년대 후반부터 약 100년 동안 세 나라가 서로 맞서며 중국대륙을 차지하고 있던 때를 가리킨다. 황하 유역을 기반으로 조조가 세운 위나라, 양쯔강 중상류가 무대인 유비의 촉나라, 양쯔강 중하류의 노른자 땅으로 손권이 통치하는 오나라의 삼각구도다. 위나라를 세운 조조는 서기 220년에 죽었는데, 그 뒤를 이은 아들 조비도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다. 조비는 촉, 오와의 대치선을 팽팽히 유지한 채 동북부의 군벌 세력을 치면서 한반도 쪽으로 세력을 확장해갔다.

위나라의 팽창은 그 남쪽에서 국경을 맞대고 있는 촉·오는 물론, 북쪽의 나라들에게도 위협이었을 테다. 그런 가운데 오나라의 주군이었던 손권이 거리상 상당히 떨어져 있는 중국 동북부의 국가, 한반도로 가는 문턱인 요동에 힘을 합쳐 힘을 합쳐 위나라에 맞서자는 제안을 했다.

당시 요동의 지배자는 공손연이었다. 손권의 제안을 받은 공손연의 고민은 깊어갔다. 위나라의 위협에 대비를 하긴 해야겠는데, 혼자 하자니 버거운 상황. 그렇다고 오나라와 덥썩 손을 잡자니 자칫 위나라를 자극해 적국으로 돌려버릴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손연은 일단 오나라에 사신(使臣)을 파견해 동정을 살피고 오도록 명했다.

오나라 손권은 요동의 사신이 도착하자 마치 군사동맹을 맺기로 결정된 것처럼 크게 기뻐했다. 그렇게까지 할 것 있냐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즉각 대규모 사절단을 요동으로 파견했다. 사절단엔 400명 규모의 사신들과 1만 명의 병사, 그리고 공손연에게 선물로 바칠 진귀한 보물들이 포함됐다.

하지만 상황은 복잡하게 꼬이기 시작했다. 손권이 보낸 사절단이 요동에 상륙하기 직전, 오나라를 정찰하러 갔던 요동의 사신이 먼저 도착해서 공손연에게 보고했다. “오나라는 위나라에 대적하지 못할 약체”라는 내용이었다. 결국 공손연은 위나라에 줄 서기로 결정했다. 그는 오나라의 사신단과 군대가 요동에 도착하자 이들을 서로 격리시키고 군대를 폐쇄된 곳으로 보냈다. 사절단에 포함돼있었던 오나라의 고위급 관리 두 사람의 머리를 베어 위나라에 보내고, 400명이 넘는 사신들을 포박해 이곳저곳으로 분산시켜 감금했다.

오의 사신 중 두 사람이 탈출에 성공했다. 이들은 요동과 이웃하고 있는 고구려로 도망쳐 갔다. 당시 고구려는 동천왕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요동과 사이가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고구려는 오가 요동과 연맹을 맺으려 했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 오나라에서 요동으로 가려면 위나 북방 종족 들이 버티고 있는 육로로 가거나 고구려 앞 바닷길로 가야 한다. 당시 상황에서 육로로 가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러니 오나라 사신단이 고구려를 ‘패스’해 요동으로 갔다가 결국 고구려로 도주했다는 게 뻔히 보였을 테다.

당시의 고구려는 요동과 그 너머에 자리한 위나라로부터의 위협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기회에 풍요로운 강남 땅에 자리잡은 오나라와 연대해 나쁠 일이 없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고구려의 동천왕은 오의 두 사신을 후대하고, 고구려 사신 25명과 함께 선물까지 들려서 오나라로 안전하게 돌려보냈다.

오나라의 손권은 고구려와의 연대도 크게 기뻐했다. 234년, 오는 고구려로 선물을 가득 실은 대규모 사절단 함대를 보낸다. 다만 이번엔 좀 조심해서 고구려 항구에 도착하자 일단 선발대를 고구려의 도읍인 국내성으로 보냈다. 그런데 선발대의 사신이 거기서 놀라운 정보를 접하게 된다. 위나라에서 고구려에, 오나라 사신을 죽이고 머리를 보내라는 연통이 왔었다는 것이다. 고구려가 이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려 한 건진 몰라도, 지난 번 요동에서 공손씨로부터 일을 겪은 오나라 선발대로서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오의 선발대는 국내성을 빠져나가 사절단이 임시로 대기하고 있는 곳으로 도주했다.

선발대의 보고에 사절단은 분노와 두려움에 휩싸였다. 동천왕이 보낸 고구려의 사신들이 사절단이 머무는 곳에 도착하자 이들을 인질로 삼아 고구려와 대치했다. 이 상황을 전해들은 동천왕은 다시 사람을 보내 오나라 사신단에게 사죄하고 말 수백 필을 내주며 달랬다. 사신단은 고구려 말을 배에 싣고 허둥지둥 오나라로 돌아갔다. 기록에 따르면 오나라 배가 작아서 겨우 80마리의 말을 싣고 갔다고 한다.

손권은 또 한 번 몸을 낮췄다. 2년 뒤인 236년 2월, 손권은 또 다시 사신단을 고구려에 보냈다. 하지만 이번엔 고구려가 달라졌다. 동천왕은 오의 사신을 잡아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위나라로 보냈다. 이후 오나라는 요동을 비롯한 중국의 동북부(한반도의 서북부) 세력들과의 외교 교섭을 다시는 시도하지 않았다.

중국 지린성 지안현에 있는 고구려 고분 삼실총 벽화의 일부. 험한 지형에도 잘 달리는 튼튼한 말뿐 아니라, 말 관련 제반 문화에 있어서 고구려는 당시 세계를 선도한 것으로 보인다. ⓒphoto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중국 지린성 지안현에 있는 고구려 고분 삼실총 벽화의 일부. 험한 지형에도 잘 달리는 튼튼한 말뿐 아니라, 말 관련 제반 문화에 있어서 고구려는 당시 세계를 선도한 것으로 보인다. ⓒphoto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중국 정통 역사서 ‘삼국지’는 삼국이 진(晉)에 의해 통일된 후인 200년대 말 진수라는 사람이 당시까지 전해졌던 삼국시대의 기록을 모아서 펴낸 책이다. 그는 촉나라 사람으로, 진나라가 촉의 유씨 왕조를 타도한 뒤 진나라의 관리가 됐다. 진나라는 황하 유역 기반인 위나라의 정통을 표방한 나라였다. 그러니까 삼국지란 역사기록을 남긴 역사가가 촉나라 출신으로 위나라 후계인 진나라에서 급여를 받아 사는 사람이었다는 얘기다.

삼국지의 주인공 세 사람 중 위나라 조조는 머리가 좋고 행동력 있는 캐릭터로, 촉나라 유비는 넉넉한 리더십의 표상으로 그려진다. 반면 손권은 크고 작은 실수가 많은 이미지다. 어딘가 모자라는 손권의 행동 중 대표적 사례로 꼽히는 것이 위에서 얘기했던 한반도 소재 국가들과의 관계 맺음이다.

삼국지의 저자 진수에 대한 사전정보가 없다 하더라도, 그가 남긴 손권에 대한 기록은 좀 이상한 점이 있다. 적어도 두 가지 점에서 그렇다.

첫째, 오나라 같은 중원의 대국이 변방국가인 요동과 고구려에 왜 그렇게 외교적으로 저자세를 취했을까? 둘째, 지도에서 보듯이, 오나라에서 한반도로 간다면 서해 바다를 건너게 된다. 이때 한반도 북쪽에 있는 요동이나 고구려보다 한반도 남쪽의 가야가 훨씬 접근하기 쉬웠을 것이다. 그런데 왜 가야와의 동맹은 시도하지 않았을까?

역사의 기록이 전하는 과거 인간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을 때, 그 역사를 기록한 사람의 입장과 환경 변화를 함께 놓고 생각해보면 명쾌한 설명이 나오기도 한다. 다음 회에서는 그렇게 해서 위 두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려 한다.

※주간조선 온라인 기사입니다.

이진아 환경·생명 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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