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을 제련하는 모습. ⓒ출처: 픽사베이
철을 제련하는 모습. ⓒ출처: 픽사베이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에는 목재가 많이 부족했을 것이다. 양쯔강 중하류에 자리잡아, 활발한 해상활동을 펼치느라 배가 많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압도적으로 더 많이 목재를 잡아먹는 용도가 있었다. 철을 생산하는 일이었다.

누가, 언제, 어디에서 제일 먼저 철을 제련하기 시작했는지에 대해선 아직 정설이 없다. 한 두 세대 이전만 해도 기원전 11세기 근동의 히타이트(Hittite) 족이 철 제련을 시작한 게 세계로 확산됐으며, 기원전 8세기경에야 양쯔강 유역에 도착했다는 게 학계 주류 시각이었다.

20세기 후반부터 세계 각지에서 유물 발굴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철의 제련이 생각보다 일찍, 여러 곳에서 시작됐음이 밝혀졌다. 중국만 해도 2008년 간쑤성 린타오에서 철광석을 숯과 함께 가열해 만든 쇠 조각이 발견됐는데,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으로 밝혀진 그 제작연대는 기원전 14세기였다.

양쯔강 유역의 제철업 수준이 상당했음을 보여주는 고고학적 근거도 있다. 기원전 5세기 춘추시대 국가 중 양쯔강 중하류에 자리잡았던 오나라 시대 유물을 분석한 결과, 당시 숯과 풀무를 이용해 용광로 내부 온도를 섭씨 1130도까지 올릴 수 있었단 사실이 밝혀졌다. 이 정도의 고온은 다른 지역에서는 몇 세기 후에나 도달했던 수준이다.

손권의 오나라는 700년 정도 앞서 존재했던 춘추시대의 오나라를 오마쥬하면서 설립한 나라였다. 춘추시대 오나라처럼 양쯔강 중하류 유역을 기반으로 한 손권의 오나라에서는 그러나 춘추시대 오나라에서만큼 제철업이 융성하지는 못했을 것이다(자료 부족으로 구체적 확인이 어려운 부분이다). 전통사회의 제철업은 결코 지속가능한 산업형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통 사회의 철 용광로 기본 구조. ⓒ출처: Popular Mechanics
전통 사회의 철 용광로 기본 구조. ⓒ출처: Popular Mechanics

양질의 철 생산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건은 충분한 연료다. 과거 전통사회에서 연료란 사실상 목재를 의미한다. 철을 제련하는 데는 청동이나 기타 금속에 비해 연료가 훨씬 많이 든다. 그냥 목재만으로는 아무리 많이 때도 양질의 철을 만들 수 없다. 철은 산화되기 쉽고, 고온에서는 더 그렇기 때문이다. 하지만 목재를 일단 숯으로 만든 다음 그 숯을 다량 투입해 용광로의 온도를 높인다면, 숯의 환원력으로 철의 산화가 억제되면서 순도와 강도가 높은 철을 얻을 수 있다.

그러니 철 제련에 목재가 이만저만 드는 게 아니었을 테다. 양쯔강 중류에서 일찍부터 제철업이 번성했음을 말해주는 유물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 것을 보면, 이곳의 삼림이 상당히 많이 훼손 됐을 거라고 추정할 수 있다. 삼국시대엔 이미 쓸만한 삼림은 거의 소진되었을 터. 전통적으로 해군력이 강했던 지역에 자리잡은 오나라가, 고구려의 예상에 못 미치는 작은 배 밖에 유지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말해준다.

기원전 1600년부터 서기 600년까지의 기후 변화와 목재 관련 주요 사건. 왼쪽 위의 지도는 현재 간쑤성 린타오시와 춘추시대 오나라 위치. ⓒ원본 그래프: Cliff Harris & Randy Man (2017)
기원전 1600년부터 서기 600년까지의 기후 변화와 목재 관련 주요 사건. 왼쪽 위의 지도는 현재 간쑤성 린타오시와 춘추시대 오나라 위치. ⓒ원본 그래프: Cliff Harris & Randy Man (2017)

위 그래프는 제철 및 목재의 수요 변화가 기후변화와 어떤 관련성을 가지는지를 간단하게 보여준다. 중국에서 가장 오랜 철기 유물이 나온 린타오는 황하 유역 중에서는 위도가 낮은 편이다. 게다가 강의 상류 지역이어서 온난기로 치솟아가는 시기, 이 지역의 삼림 자원은 풍부했을 것이다. 중앙아시아를 거쳐 동아시아로 넘어온 제철 기술이 꽃필 만한 곳이다.

기원전 5세기 오나라에선 기후가 추워지는 가운데도 제철업이 번성했다. 이런 사실은 그곳의 기후가 비교적 온난해서 목재가 충분히 공급되었음을 말한다. 원료인 철광석은 지구상 웬만한 곳에선 풍부하게 존재하니까 문제 없었을 테고, 양쯔강 수운을 이용해 철 제품을 팔 수 있는 교역로가 형성되기 좋은 조건이다.

제철산업이 번성하기 좋은 각종 인프라가 갖춰진 이 곳에 들어선 손권의 오나라. 하지만 오나라에선 제철 관련 활동에 대해서 그리 인상적인 기록이 없다. 손권이 한반도와의 외교를 시도했던 시점은 기후학에서 ‘로마 기후 최적(Roman Climate Optimum· 대략 기원전 250년부터 서기 400년까지, 북반구에서, 그 중에서도 유럽과 북미에서 기후가 특별히 따뜻했던 시기를 말한다) 이라고 부르는 온난기의 정점 부근에 해당된다. 이런 시기엔 웬만한 지역에선 삼림이 풍부해지며, 기후 및 토양 조건이 좋은 양쯔강 중류라면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삼국시대처럼 전투가 일상인 시기엔 철에 대한 수요도 상당했을 것이다. 제철업이 융성했을 거라고 짐작될 만한 조건이다.

그런데도 ‘삼국지’를 비롯한 역사기록에서 손권의 오나라의 제철업에 관해 별 언급이 없을 뿐 아니라, 이 시기에 제철 관련 유물로 알려진 것도 거의 없다. 왜일까.

한편 온난기에는 위도가 높은 추운 지방에도 삼림이 무성해진다. 대흥안령 산맥과 소흥안령 산맥이 지붕처럼 솟아 있는 가운데를 흐르는 넉넉한 강 요하. 이 강의 삼각주에 자리잡은 요동. 장백산맥을 끼고 흐르는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이 기반인 고구려. 모두 온난기를 맞아 풍부해진 삼림 덕을 크게 봤다. 배와 철을 만들 목재가 넉넉히 공급될 뿐 아니라 강들이 얼어붙지 않아 물길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연재 ‘고구려인은 어떻게 유라시아 대륙의 강을 지배했을까?’‘고구려인들의 강력한 한 방, 흑요석의 정체’ 편에서 보았듯이, 이 시기 고구려인들은 배를 타고 북아시아의 강들을 누비며 한껏 위세를 떨쳤다. 초기에는 흑요석이 중요한 교역 아이템이었겠지만, 기온이 상승하고 나무의 생육이 빨라지면서 철광업도 빠르게 발달해갔을 것이다.

고구려 제철 수준은 상당히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철제 무기와 갑옷으로 무장한 기마 병사들이 위나라 관구검을 물리쳤다는 ‘삼국사기’의 기록도 있고, 중국 역사기록 이곳저곳에 고구려의 철제 아이템들이 다양하게 언급된다. 요동 지방의 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요동은 고구려처럼 흑요석 가공으로 인한 혜택을 누리지 못한 만큼 더 빨리 제철업을 흡수해 발전시켜갔을 수 있다.

손권이 처음에는 위와 국경을 맞댄 요동과 손을 잡아 연합전선을 펴려고 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고구려에게 러브콜을 보낸 배경은 결국 자원이었다고 볼 수 있다. 손권의 오나라는 목재도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2차 산물인 철이나 동아시아 일대에서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는 고구려의 말 등이 탐났을 것이다.

물론 이런 분석에 의문의 여지가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손권의 오나라는 중국 최고의 옥토(沃土)인 양쯔강 중하류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지구가 온난기의 정점에 이르렀던 서기 220년에 설립됐으니 말이다. 요동이나 고구려처럼 위도가 높은 곳에서도 목재가 풍부해져 제철업이 발달했던 시기에, 삼림이 발달하기 좋은 조건을 두루 갖춘 오나라가 변방 나라들에게 그렇게나 몸을 굽힐 정도로 목재가 아쉬웠을까?

이 질문의 답은 앞서 나왔던 두 번째 질문, ‘왜 손권은 한반도 남부 해역을 장악하고 있던 가야를 패스하고 요동과 고구려의 문을 두드렸을까?’ 라는 것으로 돌아가 확인해보자.

※주간조선 온라인 기사입니다.

이진아 환경·생명 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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